“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로부터 풍기는 아름다움에 취해가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 어렵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다움을 열어주려는 마음이 일기까지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한 순간에 그 아름다움의 한복판에 서있음을 느끼곤 아찔해 한다.”― 여균동, 『몸』안성의 텅 빈 소극장에 홀로앉아 정신없이 읽다가,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는 충격과 함께 필사했던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린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19년 뒤인 지난해 10월 5일. 200페이지 넘는 장편의 대부분을 차지하
“몇 년 전 모 해외 영화제에 5명의 젊은 감독이 모였다. 새로운 기획을 세일즈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그를 만났는데, 거의 완성 직전 단계로 보이는 기획을 가져왔다. 그런데 정작 나머지 네 사람은 얼마 안 되어 신작을 만들었고, 그의 기획만이 남겨졌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을 보고 난 지금, 깊이 납득한다. 쉽게 완성할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인디펜던트이기에 가능했던 풍윤한 시간, 어득함마저 느껴지는 수고를 통해 엮어 올린, 호화로운 판타지 영화였던 것이다.”약간의 실례를 무릅쓰고 원래의 발언에 등장하는 특정인의 이름을 3인칭으로
“Though it had not all the decided pretension, the resolute stylishness of Miss Thorpe’s, had more real elegance. Her manners showed good sense and good breeding; they were neither shy nor affectedly open; and she seemed capable of being young, attractive, and at a ball without wanting to fix the at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으로 가보자.2월 2일 관악산에서 소수의 아군이 중공군 정예부대와 맞붙었다. 선두의 병사가 눈에 띤다. 그는 1950년 12월 중공군이 남하했다는 정보를 목숨 걸고 얻어낸 전공이 있었다. 전투는 전원 한국어와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와 47명의 동료들이 중공군으로 위장, 적진지를 파괴하다 신분이 노출되면서 벌어졌다. 실탄이 바닥났음에도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저항하던 그는 결국 적의 총탄에 스러진다. 만 스물여섯. 1950년 10월 한국군 지휘관을 제 발로 찾아가 총을 든 ‘중국집 청년’이었다.함께
1978년 동료들과 YMO(Yellow Magic Orchestra)를 결성하고 미국에서도 음반을 발매해 빌보드차트에 진입했다. 1984년에는 데이비드 보위와 공연한 영화 (1983)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으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받는가 하면, 3년 뒤에는 세계 영화사의 명작 로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상, 그래미상을 함께 거머쥐었다.이후 3년 주기로 이루어진
단언컨대 그는 지난 2월 의 미국 아카데미 4개 부문 수상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했던 해외 영화감독 중 한사람이다. 같은 아시아의 영화인으로서?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그밖에도 몇 가지 특별한 이유가 있다.봉준호 감독과 그는 친구다. 한 살 터울의 또래로 비슷한 시기 조감독 생활을 거쳤다. (봉 감독은 , 등, 그는 , 등) 그리고 2000년 둘 다 장편상업영화 감독에 데뷔했다. 봉 감독은 2월에 개봉한 로 4월
“강물 위의 아지랑이들이 내 앞에서 군무를 추면서 서로 들락날락하는 동안, 내 인생의 패턴이 그 강의 패턴과 합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동생을 기다리는 동안 이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인생의 스토리가 종종 책보다는 강과 더 비슷하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스토리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 강물 소리에서 이 스토리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노먼 매클린, 『흐르는 강물처럼』시카고대학에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노먼 매클린(영문학)이 퇴임후 발표한 소설 『흐르는 강물
“I decide who I am.”좀 엉뚱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를 통해 부활한 세기의 로큰롤 히어로, 프레디 머큐리의 이 대사를 듣는 순간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1991년 11월 런던에서 머큐리가 사망하기 정확히 한 해 전인 1990년 11월, 시즈오카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배우 한영혜다. (인터넷무비데이터베이스에서 그녀의 이름은 한영혜의 일본어 독음을 영어로 표기한 'Hanae Kan'으로 검색된다. 엔딩크레디트에 가타가나가 병기되지 않은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지겨운 식사,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상기, 그것에 의해요즘 나는 살아 있다.”- 황지우,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돌이켜보면, 신간코너에서 시집을 읽다 이 대목에 밑줄을 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1998년 12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도 세상은 편치 않았다.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해군이 거제도 남쪽 해상에서 북한 잠수정을 격침시켰다. 크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하긴, 특별할 게 뭐겠는가. 연일 이어지던 기업들의 줄도산 소식, 친
“치열한 모순의 존재(creature of intense contradictions)”한영혜가 분했던 극중 캐릭터에 관한《할리우드 리포터》의 평은 대단히 강렬할뿐더러, 그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유효하다.인구 10만을 조금 넘는 시즈오카 현의 중소도시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그는 열 살에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거장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이었다. 2년 뒤 캐스팅된 작품의 감독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공연자(costar)는 영화제 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다만, 그자신은 연기
“이 팀 이제 살았네, 살았어.”신바시 역 인근 선술집.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영화잡지 기사를 읽던 친구가 탄성을 뱉었다. 감독 데뷔 이후 발표한 아홉 편의 작품 중 여덟 편이 한국의 국제영화제, 심지어 그 중 네 편(당시)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신작, 의 크랭크 업 소식. 전주 상영을 기준으로 정확히 1년 전이었다.는 두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되었다.우선은 원작이었다. 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 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베트남
해변이 보이는 언덕 위에 전화 부스 하나가 서 있다.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상대방과 화상통화까지 가능한 최근의 세태를 생각하면 뭔가 이질적인 느낌마저 드는 풍경. 안에는 오래된 다이얼식 전화와 이곳을 찾은 이들이 사연을 적는 노트 한 권이 놓여있다. 전화선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종이 위에 인쇄된 안내문구가 눈에 들어온다.“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보세요. 바람소리나 파도소리, 혹은 새의 지저귐이 들린다면 당신의 마음을 전해주세요.”짐작할 수 있듯 전화 부스는 편의시설이 아니다. 아름다운 바닷가마을의 풍경에 이끌려 이주한 정
“정말 섭섭해요.”그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현역 연기자’에서 ‘그 시절 소녀팬’으로 돌아갔다. 객리단길에서 만난 어느 단편독립영화의 주연배우. 80년대에 태어난 그녀는 무려 14년 전 개봉한 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밖에도 , , , 혹은 같은 영화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깝게는 15년 전, 멀게는 19년 전 작품들이다. 팬으로서도 거의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가까이 함께해 온 내력을 가지고 있는 것. 물론 기억의
처음엔 좀 의아스러웠다.칸영화제에서만 세 번에 걸친 수상경력을 가진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제 와 왜 새삼스럽게 그간 도전해본 적 없는 시대극을 연출했는지.그러나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2004년 이후 출연작이 대부분 한국에 소개되어 이제는 결혼소식 등의 사생활 관련 기사까지 아무렇지 않게 국내매체에 보도될 정도로 친근한 배우, 아오이 유우가, 1950년대 우리영화의 고전 의 오선영(김정림 분)을 연상시키는 ‘고색창연한 말투’의 히로인으로 등장한지 대략 10분쯤 지나고 나니 알 수 있었다. 60대 중반을 넘
일본은 서울에서처럼 수백만명 규모 촛불집회가 벌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현재 아베 정권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이다. 모리토모(森友)학원의 국유지 헐값 매입과 관련해 일어난 공문서 조작 사건 때문이다. 이 비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비교될만큼 큰 사건이다. 위기에 봉착한 아베총리는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념문제를 꺼내들었다. 3월 25일 있었던 자민당 전당대회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헌법에 확실히 자위대를 명기함으로써 위헌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언제나처럼 이념을 내세워 위기를 돌파
초청작 상영이 끝나고 스크린 앞에 선 감독, 간단한 소개 뒤에 관객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호감을 표하거나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 열띤 분위기 속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차분하게 정리발언을 이어갔다.“다양한 견해와 입장이 존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맡았던 사람이라 제 의견이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저는 그저 한때 이 작품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따름이니까요. 나머지는 여러분의 몫이죠. 영화를 불러주신 분이나 틀어주신 분, 또, 즐겁게 봐 주신 분 모두의.”필자와의 막역한 관계는 차치하더
“도대체 내일도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단 말인가?폭탄 한 개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필자 자신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으로 지금까지 혜택을 보고 있는 번역 작가지만, 편집자들의 네이밍 감각에 감탄할 때가 많다.예컨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독일어 원제는 『백장미(Die Weiße Rose)』이다. 작가인 잉게 숄이 자신의 두 동생, 죠피 숄과 한스 숄이 나치에 맞서 조직한 비밀결사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딱히 와 닿지
한껏 긴장된 머리와 신경은 말 한마디가 비위에 거슬려도 더럭더럭 부아가 나서 견딜 수 없다. 몇 번이나 쓰던 것을 찢어버리고 나의 천품이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하잘 것 없는 것을 한탄하는지 모르리라. 이를 두고 당나라 시인 백낙천은 “내생막작여인신(來生莫作女人身, ‘내생에는 여인으로 태어나지 마라’는 뜻)”이라고 하였지만, 나야말로 “다음 생에는 제발 글 쓰는 사람이 되지 말지다”하고 기도라도 올리고 싶다.― 현진건, 중에서28년 전 이 무렵이었다. 사실주의의 개척자요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
해설을 맡은 학예사의 영어는 금실이 수놓인 예복 위 호박 단추처럼 유려했다.노르웨이 오슬로 왕궁궁원 인근 입센 박물관.100주기를 맞아 그가 만년을 보낸 집에 만들었다던가,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인증샷’처럼 찍어놓은 서재에서의 사진은 부자연스러웠고 안내데스크와 전시실을 지나 맞닥뜨린 근대극의 세트 같은 공간도 딱히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는 거기 없었으니까.‘뭐가 그리 못마땅하냐’는 핀잔을 들어도 할 수 없다. 어차피 작가를 어떻게 바라볼 지는 수용자(Rezipient)의 주관에 달려있거니와. 연극을 공부하던 시절 필자에게 입센은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 힘이 (The force that through the green fuse drives the flower)푸른 내 나이 몰아간다; 나무들의 뿌리를 시들게 하는 힘이 (Drives my green age; that blasts the roots of trees)나의 파괴자다. (Is my destroyer.)하여 나는 말문이 막혀 구부러진 장미에게 말할 수 없다 (And I am dumb to tell the crooked rose)내 청춘도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졌음을. (My youth 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