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초반 항일 의식이 강한 학생들은 독서회 모임을 통해 민족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거나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면서 일제 타도를 모색했습니다. 당시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경성제대반제동맹사건 역시 독서회를 모체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만 독서회 운동의 중심은 전국 각지의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독서회를 반제사회주의 활동으로 규정한 일제는 화순ㆍ공주ㆍ서울ㆍ대구ㆍ함흥 등지에서 학생들을 검거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이인 변호사는 함흥 만세교 아래에서 졸업 기념으로 모였다가 검거된 학생들을 위한 변론에 나섰습니다. 이인은 사회주의운동
1927년 5월, 경상남도 평의회 석상에서 김기정 평의원은 ‘조선에서는 보통학교를 증설할 필요가 없으며, 교육도 필요하지 않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나면 사상이 악화되어 위험하므로 학교를 늘릴 필요가 없다.’면서 교육 예산 삭감을 주장했습니다. 조선인들을 가르칠수록 사회 불안만 가중되니, 조선인들은 가르치지 않는 게 낫다는 황당한 망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망발에 분노한 통영 주민들이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민중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그런데 낌새를 챈 김기정은 한 발 먼저 주동자들을 경찰에 신고하였고, 경찰은 발 빠르게 관련자들을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조선인들도 사전을 갖게 된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일제하라는 제약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편찬자들이 말을 모으고, 낱말 카드를 정리하면서 오로지 사전 편찬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사전 편찬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후원한 민족 지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온 가슴으로 아파한 이우식, 김양수, 장현식, 김도연, 이인, 서민호, 신윤국, 김종철, 설원식, 윤홍섭, 민영욱, 임혁규, 조병식 등은 사전편찬후원회를 만
1914년 여름, 주시경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말모이 작업은 중단되었다. 1915년 최남선은 광문회에 계명구락부를 결성하여 조선어사전 편찬을 재개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쫓긴 김두봉은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0년 이규영마저 세상을 떠났다. 주시경이 시작한 말모이 편찬은 성난 바람과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돛단배마냥 막막한 바다 위를 표류했다. 물론 조선인들의 사전 만들기가 완전히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1927년 문일평, 오세창, 윤치호, 이능화, 최남선 등이 주도했던 계명구
정세권은 1888년 4월 10일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잇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전통 교육을 받았고, 진주백일장에서 장원을 했으며 진주사범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는데, 3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18살에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23살에 하이면장이 되어 주위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샀다.1910년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나, 면장으로서 주민들의 소득을 향상하고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방풍림 조성사업을 벌이고, ‘대동계’라는 저축계를 발족했으며, 누에를 치는 잠업조합연습소를 설
북촌한옥마을은 나들이객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서울의 명소 중 한 곳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한옥들 사이를 지나는 좁은 골목길을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지나다 보면 마치 100년 전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착각에 빠진다.정독도서관 앞 네거리에서 율곡로3길을 따라 안국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다가 첫 번째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윤보선 가옥에 이르게 되는데, 좁다란 골목길 앞에 눈길을 끄는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에 새겨진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니 이곳이 바로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이다. 지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리하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은 검사 앞에서도 당당했다. 한국을 일본에 팔아먹은 스티븐스 처단은 한국인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티븐스 저격에 나섰다가 권총 불발로 실패한 전명운 역시 ‘한국인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환영하고 있다는 스티븐스의 말에 격분해 그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할 생각으로 거사했다’고 진술했다.피격 이후 스티븐스는 병원을 세 차례나 옮기며 치료를 받았다. 오른쪽 어깨 아래 폐 부위에 한 발, 복부 아래쪽에 한 발, 모두 두 발의 총
2018년 6월 3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그날의 암살자’란 제목으로 1908년 3월 23일 한국의 애국청년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사건을 소개했다. 스티븐스 암살을 위해 뒤를 쫓던 장인환은 페리선착장까지 찾아가게 되었고, 총을 꺼내 스티븐스를 저격하려는 순간 스티븐스를 저격하려는 전명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하지만 전명운이 암살에 실패하자 총알 세 발을 발사해 스티븐스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병원으로 이송된 스티븐스는 수술을 받았지만, 이틀 후 사망했다. 재판정에서 전명운과 장인환은 조국을
일본 신화에서 천손이 강림했다는 신화의 땅 미야자키는 규슈의 남동부에 있다. 동쪽의 푸른 바다 외에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계절풍의 영향을 적게 받고 난류의 기운 덕분에 겨울에도 따뜻하다. 한국 관광객들에게 특별히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겨울이면 두산 베어즈나 기아 타이거즈가 전지훈련을 하고, 따뜻한 날씨와 푸른 잔디를 그리워하는 골퍼들의 발걸음도 잦다.미야자키시 해발 60m에 평화대공원(平和台公園)이 자리하고 있다. 푸른 잔디밭은 산책하기에 좋고,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있으며,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하니와
SBS 영재발굴단 118회에 영어영재 장유훈 군이 소개되었습니다. 2017년 방영 당시 9살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영어를 술술 잘 합니다. 그때는 군함도가 화제여서 그랬는지 이태원에 작은 무대를 차려 놓고 군함도에 관한 길거리 강연을 영어로 했습니다. 이태원답게 무대 앞에 외국인들이 눈에 띱니다. 영어로 이름과 나이를 밝힌 유훈이가 무대 위 사진을 보여주며 섬의 이름이 군함도인 이유가 그 섬이 일본 군함을 닮았기 때문이고, 한국인들이 군함도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국인들이 이 섬으로 끌려가 하루 16시간
1919년 3월 1일 선포된 선언서(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기독교·불교계 인사 33인이 이름을 올렸다.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천도교는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명망가들의 참여를 바랐기에 여러 방면의 요인들을 접촉했는데, 500여 년간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하고 이끌어온 유학자들이 포함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지만 이들에 대한 교섭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왜 유학자들은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까장면 ①1919년 2월 선언서 작성을 맡은 최남선이 경학원 대제학인 유학자 김윤식을 만나 민족대표들의 뜻을 전하고 참여를
3.1운동 100년이 되는 해를 맞아 3.1운동을 기리는 행사가 여느 때보다 많았다. 정부·지자체·역사학계·시민사회단체·각급학교·문화예술단체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념식, 기념공연, 독립선언서 다시읽기 ,독립선언서 필사하기, 독립선언서 널리 전파하기 등등 다양한 형태로 3.1운동을 기념하고 축하하면서 ‘선언서’가 표방했던 독립과 자주·평화의 정신을 기렸고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를 설계했다.그런데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주최한 ‘3.1절 범국민대회’에서 묘한 주장이 나왔다. 행사에 모인 참석자들이 3.1운동의 정신을 이어
세상을 크게 바꾼 역사의 현장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3.1운동은 1918년부터 준비되고 있었지만, 불을 댕긴 것은 도쿄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고,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이끈 것도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시위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 선언서를 배포하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강이남에서 가장 먼저 만세소리가 터져 나온 군산의 3.1운동을 촉발한 것도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군산 영명학교 출신 김병수였다.2월 25일 김병수는 민족대표 이갑성으로부터 군산지역의 만세
이 글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3.1운동에 대한 오해와 궁금증을 풀고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한 팩트체크 글이다.1. 민족대표 33인은 어떻게 독립선언에 참여했나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민족 지도자들의 의견을 구하는 동시에 지원을 요청하고자 학생대표 중 한 사람인 송계백을 경성(서울)으로 급파하였다. 송계백은 현상윤을 만나 사각모 안에 숨겨온 선언서 초안을 보였고, 학생들의 움직임에 크게 자극받은 현상윤은 선언서 초안을 최린·송진우 등에게 보이고,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천도교
지난 글 '독립선언서 첫 인쇄본, 朝鮮(조선)인가 鮮朝(선조)인가'에서 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고 있던 현장을 포착한 조선인 형사 신승희(신철)의 이야기를 언급했다. ‘하마터면 독립 선언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종일과 손병희는 거금 5000원으로 신승희의 입을 막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것이 널리 알려진 신승희와 선언서에 관한 일화다. 이 얘기를 다룬 글들이 많지만 그 중 하나를 읽어보자. 한창 인쇄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
독립선언서 작성자가 최남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대표 33인의 이름 속에서 최남선 석 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최남선은 당대 문장가로서 선언서를 작성했지만,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작성자가 최남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독립선언 이후 33인에 대한 취조와 심문을 담당했던 일본경찰 덕분(?)이었습니다.그 후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최남선으로서 독립선언문을 작성케 함은 불가한 일이니 선언문을 자기가 짓겠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으나, 나의 생각은 누가 짓든 간에 선언서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鮮朝(선조)’의...1919년 3월 1일 발표할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월보」를 발행하고 있던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사장 이종일에 따르면,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조판된 것을 가져다가 2월 20일부터 은밀하게 인쇄를 시작하여 2월 24~25일, 2만5천 장의 1차 인쇄가 끝났다.독립선언서는 즉각 천도교본부를 거쳐 지방의 천도교당에 발송되었다. 전주 신흥교보 유병민은 2월 24일 자정쯤에 졸업생으로부터 민족대표 33인
주시경은 『독립신문』 1897년 9월 28일자에 투고한 「국문론」에서 한글은 가로 써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지만, 당시까지의 관습이나 출판 사정에 따른 한계로 인해 정작 그의 저작 대부분은 세로쓰기로 간행되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말모이」 원고가 예외적으로 ‘가로쓰기’였던 것은 그것이 사전을 만들기 위한 원고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주시경의 마지막 저작인 『말의 소리』(1914) 끝머리에 실린 ‘우리글의 가로 쓰는 익힘’이란 글에서는 한글 자모가 마치 영어 알파벳처럼 자모가 분리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글을 쓸 때, 손으로 쓰든 컴퓨터를 이용하든 가로쓰기를 한다.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알다시피 우리 옛 문헌은 한문으로 된 것이든 한글로 된 것이든 지금과 같은 가로쓰기가 아닌 세로쓰기 방식이었다.전 세계 문자 쓰기는 크게 가로쓰기(횡서)와 세로쓰기(종서)로 나뉘는데, 가로쓰기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좌횡서와 그 반대로 쓰는 우횡서로, 세로쓰기에는 행갈이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하는 우종서와 그 반대로 하는 좌종서로 나뉜다. 한국어·중국어·일본어·베트남어 등 한자문화권에서는
1990년대 초반 유행했던 ‘따봉’이란 말이 있었다. 따봉은 1990년(?) 롯데 델몬트에서 출시한 주스의 이름으로, 오렌지의 명산지라는 브라질 현지에서 촬영한 텔레비전 광고가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서 삽시간에 유행어가 되었다.“브라질에서는 정말 좋은 오렌지를 찾았을 때, 델몬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따봉!” 이밖에 과즙음료 시장에서는 최근 롯데 델몬트의 따봉 광고 구호가 풍미하고 있다. 경쟁 업체인 해태 썬키스트와 같이 해외 현지 촬영을 통해 신뢰성을 높이는 것에 주력해 만든 이 광고물은 남녀노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