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의 소식지인 《오늘의 도서관》 2021년 11월호에는 일본 메이지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했던 서기준(徐基俊, 1900~?)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서기준은 1923년에 메이지대학 정치경제과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전라북도의 관리로 근무하다가 이듬해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6년부터 모교인 메이지대학 도서관의 대출계 직원으로 근무를 시작하였고, 1933년에는 도서관 사서에 임명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근대 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조선인 사서는 극히 소수였고, 해외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경우는 더더
지난 6월 11일에 '총살당한 한국의 라이노타이프 발명가 '심현'을 아십니까' 기사를 통해 한국의 발명가 심현을 소개하였는데, 심현의 학력에 대해서는 ‘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퇴학하였다’는 기사 문장을 인용한 바 있다. 그런데 어떤 기사에서는 그가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고도 되어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 것일까? 이번 기사에서는 심현이 받은 공업 교육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지난 기사에 살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심현과 관련된 기사들 중에서 학력에 관한 정보가 들어 있는 부분을 인용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은 광복 직후부터 사망 전까지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김성칠의 부인인 이남덕과 아들 김기협에 의해 『역사 앞에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친숙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김성칠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정릉리(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50년 9월 24일자 일기에 정릉리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기술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9월 24일지서 옆
최근에 문화재청에서는 덕수궁 중명전에서 라는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전시회는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사건인 을미사변을 목격한 인물이자 러시아공사관, 독립문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을 주제로 한 특별전이었다. 사바틴은 1883년에 조선으로 온 뒤 한국의 근대건축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으며 스스로를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건축가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개항과 더불어 이루어진 서양 건축의 도입과 외국인 건축가들의 활동이 한국 건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대한제국 말기에서
지난 3월에 출간된 바베 다카히로(馬部隆弘)의 책 는 3개월 여만에 5쇄를 결정하며 일본의 여러 독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쓰바이 문서란 쓰바이 마사타카(椿井政隆, 1770~1837)라는 인물이 18~19세기에 위조해낸 엄청난 양의 문서들을 가리키며, 바베 씨는 십여 년간 쓰바이 마사타카와 위작 문서들을 추적하여 문서가 만들어진 수법과 목적, 그리고 문서가 분포하는 범위와 지역 사회에 대한 영향을 분석해 왔다. 역사학에서는 가짜 문서를 제외하고 진품인 문서만으로 과거의 역사
2008년 12월 13일 KBS1 에서는 를 방영하였다. 해당 방송을 예고하는 2008년 12월 10일자 뉴시스 기사 에 따르면, 869년에 규슈에서 조공품으로 바쳐지던 물자를 약탈하고 894년에 쓰시마섬을 습격했던 신라해적의 정체를 추적한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내용이었다. 2012년 9월 11일자 뉴스메이커 기사 에서는 신라해적에 대해 조금 더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는데, 이 내용 역시 2008년의 방송
작년에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 한국 정부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GSOMIA) 종료 결정 등으로 인해 한-일 관계가 상당히 악화된 가운데, 10월에 열린 나루히토 천황 즉위식에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가 참석하기로 하여 일본을 방문하게 되면서 관계 회복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모으기도 하였다. 특히 상황(전 천황)인 아키히토가 과거 식민과 전쟁 피해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고, 새로 즉위한 나루히토의 경우에도 아베 총리와 입장을 달리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천황과의 접촉을 통해 아베 정권의 대(對)한국 정책에 일정 정도
요즘 한일관계가 많이 악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본을 왜(倭), 일본인을 왜놈이라고 멸시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을 상대로 멸시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 그와 같은 표현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쉽게 사용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1925년 1월 2일자에 실린 CW생, 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지나(支那)나 우리가 왜국(倭國)이니 왜(倭)놈이니 하야 멸시(蔑視)하든 일본(日本)이나 일인(日人)도 유(
시리즈① 양갱의 원형은 '양고기 수프'인가 '양의 선지'인가② 승려들이 고안한 '양 없는' 양고깃국, 양갱으로 변신하다한국사를 살펴보면 중국으로 유학을 갔던 유명한 승려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는 당나라로 건너가 불도를 수행하고 천축국을 순례하였던 인물이다. 의상과 원효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고려시대의 승려인 대각국사 의천도 송나라로 유학을
시리즈① 양갱의 원형은 '양고기 수프'인가 '양의 선지'인가② 승려들이 고안한 '양 없는' 양고깃국, 양갱으로 변신하다팥과 한천 등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지는 양갱은 이제는 우리에게 제법 친숙해진 과자이다. 예를 들면 영화 가 개봉하였을 때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단백질 블록이 양갱과 닮았다고 해서 주목을 받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또한 양갱을 전문으로 파는 상점이 등장해 인기를 끌기도 했고, 2017년에는 김정숙 여사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100일을 맞아
시리즈① 사무라이는 원래 '호위무사'가 아니었다② 군주를 모시는 신하, 시신(侍臣)이 사무라이가 되다③ 막부의 등장, 그리고 '무사'가 된 사무라이지난 글에서 사부라이(사무라이)가 원래 군주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인 시신(侍臣)과 통하는 말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무나 천황의 곁에서 모시는 신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에 걸쳐 율령에 입각한 고대국가를 형성해 나갔는데, 이때 천황과 신하의 관계도 제도적으로 규정되었다. 중국과 우
시리즈① 사무라이는 원래 '호위무사'가 아니었다② 군주를 모시는 신하, 시신(侍臣)이 사무라이가 되다③ 막부의 등장, 그리고 '무사'가 된 사무라이2019년 4월 1일, 일본의 새 연호 ‘레이와(令和)’가 발표되었다. 기존의 일본 연호가 중국의 고전을 출전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 정해진 연호는 라는 일본의 고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는 현재 남아있는 일본의 시가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나라시대(710-794) 후기에
시리즈① 사무라이는 원래 '호위무사'가 아니었다② 군주를 모시는 신하, 시신(侍臣)이 사무라이가 되다③ 막부의 등장, 그리고 '무사'가 된 사무라이우리가 일본 하면 떠올리는 것들 중에는 사무라이가 있다. 앞머리를 밀고 상투를 튼 머리 스타일에 기모노나 일본식 갑옷을 입고 일본도를 허리에 찬 무사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사무라이의 이미지일 것이다. 실제로 무사들은 적어도 근대 이전에 약 200여 년에 걸쳐 일본의 지배층 역할을 수행하였고, 당시 사회에서도 이른바 무사도 정신이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