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국의 순간,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람들 752년 12월, 탈라스에서 당으로 돌아온 고선지는 안서사진절도사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수만의 군대를 모두 잃은 패장인 만큼 처형하라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당 현종은 그의 예전 공적을 감안해서 형벌을 가하지는 않았으며, 우우임군대장군․어사대부라는 명예직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다만 이것은 실제 부임지와 군대가 없는 형식적인 자리에 불과했다. 고선지는 그 후 장안에 거주하면서 황제의 군사참모 역할을 했을 뿐이다.오히려 752년 12월에 고선지의 밑에서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며 안서의 행군사
시리즈① 고선지는 왜 '서역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나② 고선지의 '과욕'과 '약탈'이 부른 '탈라스 전투'의 대패 ● 힌두쿠시를 넘어서 만들어낸 신화 고선지가 연운보에서 곧장 소발률국의 수도를 향해 진격할 것을 공언했을 때,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특히 조정에서 현종이 파견한 술사 한리빙과 환관 변령성도 두려워서 가려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고구려 출신 장수인 고선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중앙에서 내려 보낸 이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00일 동안의 고단한 행군과
시리즈① 고선지는 왜 '서역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나② 고선지의 '과욕'과 '약탈'이 부른 '탈라스 전투'의 대패7세기 말, 당나라 수도 장안의 궁궐 옆 고급 연회장에서 한바탕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측천무후 황제의 총애를 받던 장동휴(張同休)라는 자가 조정의 여러 고관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자리였다. 아름다운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고관대작들의 옆에는 기생들이 붙어서 술시중을 들었다. 다들 한창 술이 돌아 흥이 났을 때, 누군가가 양재사라는 관리의 얼굴을 가리키며, “
① 북연왕 풍홍의 '권력욕'과 동아시아 국제분쟁의 서막② 고구려 장수왕, 북위를 배신하고 북연왕 풍홍을 '차지'하다③ 남조 송까지 개입한 풍홍 사건...고구려는 '일촉즉발' 전쟁위기를 어떻게 넘겼나 ● 풍홍의 ‘도박’, 남조 송나라를 끌어들이다.풍홍의 부하들이 서신을 들고 뱃길을 통해 도착한 곳은 남조 송나라였다. 당시 송나라는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 지역을 통해 해로로 요동반도로 왕래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송나
① 북연왕 풍홍의 '권력욕'과 동아시아 국제분쟁의 서막② 고구려 장수왕, 북위를 배신하고 북연왕 풍홍을 '차지'하다③ 남조 송까지 개입한 풍홍 사건...고구려는 '일촉즉발' 전쟁위기를 어떻게 넘겼나● 화룡성에서 마주친 맹수들고구려의 의향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북위의 황제인 태무제였다. 북위는 아직까지 요하 동쪽의 고구려라는 세력과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외교 접촉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나라가 한반도와 요동 등지를 포괄한 많
① 북연왕 풍홍의 '권력욕'과 동아시아 국제분쟁의 서막② 고구려 장수왕, 북위를 배신하고 북연왕 풍홍을 '차지'하다③ 남조 송까지 개입한 풍홍 사건...고구려는 '일촉즉발' 전쟁위기를 어떻게 넘겼나가끔 스릴러 영화에서 그런 경우를 본다. 그저 큰 소동 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작은 일이 등장 인물들의 끝도 없는 욕망에 의해 본의 아니게 아주 큰 사건으로 확대되어 버리고, 급기야 그 사건에 개입했던 인물들 모두가 ‘욕망’의 대가로 인해 겉잡을 수없는 거
1회. '삼국시대' 오나라와 고구려의 운명적ㆍ비극적 만남2회. '믿음 부족' 오나라와 '애매한 태도' 고구려의 예정된 파국3회. 손권의 '구애'에 자극받은 위나라, 요동과 고구려를 토벌하다 ○ 깨어진 손권의 꿈, 곧이어 닥쳐온 요동의 비극고구려인들이 사굉 등 오나라 사절단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누가보든 남의 나라에 와서 국왕의 접견을 거부하고, 왕이 보낸 사신들을 잡아 인질극을 벌이는 등의 도발적 행각을 벌였다면, 이를 두고 교섭이
1회. '삼국시대' 오나라와 고구려의 운명적ㆍ비극적 만남2회. '믿음 부족' 오나라와 '애매한 태도' 고구려의 예정된 파국3회. 손권의 '구애'에 자극받은 위나라, 요동과 고구려를 토벌하다 ○ 고구려와 오나라의 운명적 만남거지꼴을 한 채 아무런 징표도 지니고 있지 않았을 진단과 황강이 고구려인들에게 어떻게 스스로 오나라 사절임을 입증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중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가운데, 그들의 신분과 학식을 문장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1회. '삼국시대' 오나라와 고구려의 운명적ㆍ비극적 만남2회. '믿음 부족' 오나라와 '애매한 태도' 고구려의 예정된 파국3회. 손권의 '구애'에 자극받은 위나라, 요동과 고구려를 토벌하다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조조와 유비, 손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후한말 이래 중원을 두고 수많은 영웅들이 서로 다투었으나, 황하 연안에서 일어난 군웅들은 대부분 한나라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은 조조에 의해 평정되었다. 조조는 205년에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원소를 무너뜨리
1월 3일 JTBC의 라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서예학자인 김병기 교수가 광개토왕비문 ‘변조설’을 다뤘다. 실제로 1970년대초에 광개토왕비문의 글자들이 변조되었다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팩트체크 미디어 은 2회에 걸쳐 광개토왕비 발견 이후 한중일의 '해석 전쟁'을 소개하고 '광개토왕비 조작설'의 실체를 확인한다. 신묘년조를 둘러싼 논쟁과 '능비조작설'의 등장신묘년조의 해석을 두고 벌어지던 한・일 역사학
1월 3일 JTBC의 라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서예학자인 김병기 교수가 광개토왕비문 ‘변조설’을 다뤘다. 실제로 1970년대초에 광개토왕비문의 글자들이 변조되었다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팩트체크 미디어 은 2회에 걸쳐 광개토왕비 발견 이후 한중일의 '해석 전쟁'을 소개하고 '광개토왕비 조작설'의 실체를 확인한다.일본인들이 비문의 일부 글자들을 변조해서 고대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했다는 이 설은 현재도 일반인들에게 꽤 널리 알려져서 회자되고 있다. 이 ‘조작설’은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