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fact)를 나열해보자.새벽 6시, 한 중년 주부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을 턴다. 이유가 뭐였든 소리가 때마침 잠을 청하던 이들에게 방해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순간 신경이 곤두선 이웃 부부가 등장. 아니, 평소와 다름없는 심리상태였더라도 단잠을 깨우는 소음이 유쾌했을 리는 없다. 하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간신히 눈을 붙인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테다. 그들이 어떤 어조로 운을 떼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내용은 대략 ‘지금 당장 그 행위를 멈추어 달라’는 것이었으리라.문제는 이 순간 이후 주부가 보여준 반응이다.오디오기기
“강물 위의 아지랑이들이 내 앞에서 군무를 추면서 서로 들락날락하는 동안, 내 인생의 패턴이 그 강의 패턴과 합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동생을 기다리는 동안 이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인생의 스토리가 종종 책보다는 강과 더 비슷하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스토리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 강물 소리에서 이 스토리가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노먼 매클린, 『흐르는 강물처럼』시카고대학에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노먼 매클린(영문학)이 퇴임후 발표한 소설 『흐르는 강물
“셰헤라자데는 밤마다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멈췄기 때문에 나머지를 듣기 위해 왕은 하루하루 처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 샤리아 왕도, 독자도,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욕망과 결말을 알고 싶다는 궁금증에 사로잡혀 더더욱 이야기에 빠져들 뿐이다.”―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전문분야보다 21세기 독자들을 위한 필독서 매뉴얼로 더 유명한 피터 박스올 서섹스대 교수(문학이론)가 『천일야화』에 대해 기술해 놓은 위 구절은, 외국어 구사력의 ‘다른 위상’을 몸소 체험했던 필자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필자는 일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살랑살랑, 부드럽고 시원한 소리가 몸을 감싼다. 그것이 나뭇가지에 달린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라는 것을 그때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농밀하고 생생한, 크고 작은 수많은 무언가가 시시각각 변해가는 주변의 공기 속에 충만했다. 그것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엄마, 아빠 소리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이미 그것을 나타낼 표현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답은 목구멍까지, 바로 곁까지 다가와 있었다. 금방 그걸 나타낼 말을 찾을 수 있었는데. 하지만 그것을 찾아내기 전에 새로운 소리가 머리 위로 쏟
한껏 긴장된 머리와 신경은 말 한마디가 비위에 거슬려도 더럭더럭 부아가 나서 견딜 수 없다. 몇 번이나 쓰던 것을 찢어버리고 나의 천품이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하잘 것 없는 것을 한탄하는지 모르리라. 이를 두고 당나라 시인 백낙천은 “내생막작여인신(來生莫作女人身, ‘내생에는 여인으로 태어나지 마라’는 뜻)”이라고 하였지만, 나야말로 “다음 생에는 제발 글 쓰는 사람이 되지 말지다”하고 기도라도 올리고 싶다.― 현진건, 중에서28년 전 이 무렵이었다. 사실주의의 개척자요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
집단 괴롭힘으로 인한 강력사건을 접하는 순간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해법은 보통 ‘가해자에 대한 무거운 처벌’ 즉, 엄벌주의(punitivism)다.당연할뿐더러 나름 의미 있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방향을 지지하는 이들 중 대다수는 집단 괴롭힘의 끔찍함에 분노하며,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입장일 테니까. 아울러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는 전통적 상식에도 어느 정도 삶의 진실은 반영되어 있다.그러나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보자. 엄벌주의는 (사형을 제외한) 실형을 선고받았을 때조차 전제되는 갱생의 여지를 차단해버릴 위험
인생의 80퍼센트 이상을 랩의 마니아로 살면서 주위 어른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그게 노래냐’는 것이다.하지만 딱히 진지하게 답한 적이 없다. 애초에 랩 자체가 음악적 기교의 하나일 뿐더러 표현방법 또한 다양하니까.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는 구어와의 차이는 타임라인이 ‘일상의 시간’이 아닌 ‘인스트루멘톨 트랙(instrumental track)’에 맞춰져있다는 정도. 반드시 박자에 맞추지 않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오프 비트). 기원에 관한 설도 여러 가지다. 1960ㆍ70년대 뉴욕의 블록 파티(block party)에서 기원
첫 번째 이야기.사람들의 표현을 빌면 “차여도, 차여도 포기하지 않는 실연 터미네이터”인 주인공. 다섯 살 때부터 짝사랑해온 남자가 갱스터의 애인과 밀회가 들통나 손가락을 잃는다. 하지만 이 ‘사건’은 돌연 영화의 스토리나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주인공이 잘린 손가락의 세포를 복제해 만든 클론과 연애를 하게 되었으니까.두 번째 이야기.온종일 TV와 대화하는 주인공에게 이성친구가 생긴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다면서 무려 12개 국어에 통달한 능력자. 그런데 좀 확연하게 표가 나는 ‘옥에 티’가 있어 지내기 만
“정말 섭섭해요.”그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현역 연기자’에서 ‘그 시절 소녀팬’으로 돌아갔다. 객리단길에서 만난 어느 단편독립영화의 주연배우. 80년대에 태어난 그녀는 무려 14년 전 개봉한 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밖에도 , , , 혹은 같은 영화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가깝게는 15년 전, 멀게는 19년 전 작품들이다. 팬으로서도 거의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가까이 함께해 온 내력을 가지고 있는 것. 물론 기억의
단언컨대 그는 지난 2월 의 미국 아카데미 4개 부문 수상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했던 해외 영화감독 중 한사람이다. 같은 아시아의 영화인으로서?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그밖에도 몇 가지 특별한 이유가 있다.봉준호 감독과 그는 친구다. 한 살 터울의 또래로 비슷한 시기 조감독 생활을 거쳤다. (봉 감독은 , 등, 그는 , 등) 그리고 2000년 둘 다 장편상업영화 감독에 데뷔했다. 봉 감독은 2월에 개봉한 로 4월
1년 전 9월 9일.괌 인근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이 공항을 덮쳐 철도와 버스 운행이 중단되고 고속도로까지 통제된다. 만 삼천 명을 넘는 이용객의 발이 꼼짝없이 묶여버린 상황. 순간, SNS으로 현장정보를 중계하는 계정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공항을 벗어날 방법을 알아보고, 주변의 숙소를 수소문하고. 그러나 긴장되기보다 왠지 신이 나 있는 느낌. 뭔가 낯익은 분위기. 스크롤을 올려 이름을 확인해보면 ‘묘한 기시감’의 정체가 드러난다.우에다 신이치로. 좀비 영화 촬영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상황을 번득이는 유머로 풀어낸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지겨운 식사,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상기, 그것에 의해요즘 나는 살아 있다.”- 황지우,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돌이켜보면, 신간코너에서 시집을 읽다 이 대목에 밑줄을 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1998년 12월 마지막 주 화요일에도 세상은 편치 않았다.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해군이 거제도 남쪽 해상에서 북한 잠수정을 격침시켰다. 크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하긴, 특별할 게 뭐겠는가. 연일 이어지던 기업들의 줄도산 소식, 친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 힘이 (The force that through the green fuse drives the flower)푸른 내 나이 몰아간다; 나무들의 뿌리를 시들게 하는 힘이 (Drives my green age; that blasts the roots of trees)나의 파괴자다. (Is my destroyer.)하여 나는 말문이 막혀 구부러진 장미에게 말할 수 없다 (And I am dumb to tell the crooked rose)내 청춘도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졌음을. (My youth i
신촌으로 향하는 내내 거리에 잔류해있는 겨울의 스산함을 느꼈다.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로 높아지던 일상복귀의 기대조차 무색할 만큼의 고요. 오랜만의 야간외출이 갑작스레 날아든 부고 때문이었음을 상기하며 입술을 깨문다. 수면제 장복에 따른 우울증이 언제 다시 도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역설적으로 20여 년 전 어느 날. 봄볕 가득한 백양로를 가로지르며 나눈 대화를 소환한 것은 바로 그 때다.“말의 의미는 알겠는데 공감하긴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어.”“뭔데?”“응. 자란 환경이 달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통 모르겠던데...”“...?”“외
“도대체 내일도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단 말인가?폭탄 한 개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필자 자신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으로 지금까지 혜택을 보고 있는 번역 작가지만, 편집자들의 네이밍 감각에 감탄할 때가 많다.예컨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독일어 원제는 『백장미(Die Weiße Rose)』이다. 작가인 잉게 숄이 자신의 두 동생, 죠피 숄과 한스 숄이 나치에 맞서 조직한 비밀결사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딱히 와 닿지
1973년부터 5년간 미국 ABC에서 방영된 라는 TV시리즈가 있다. 불의의 사고로 큰 부상을 입은 우주비행사(리 메이저스 분)가 첨단과학기술의 힘을 빌려 슈퍼히어로로 재탄생한다는 내용의 드라마. 망원경에 야간투시경 기능까지 갖춘 눈에 자동차도 가뿐하게 들어 올리는 팔, 시속 100킬로미터로 악당을 쫓는 다리, 추격 신에서 슬로모션과 함께 ‘두두두두두’하는 효과음이 흘러나오면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드라마는 한국에서도 인기를 이어갔다. 1976년 7월부터 매주 일요일 저녁 시청자들을 TV앞에 붙잡아 두었고 주인
Ale rzecz główna, aby każdy był sobą, a nie udawał kogoś, kim nie jest, nie grał całe życie często wstrętnej mu, narzuconej przez wychowanie i tradycję, nie pasującej doń roli.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이 되어야하며 다른 사람인 척 하지 말아야한다는 거다. 평생토록 스스로를 혐오하게 하는 교육과 전통에 휘둘리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남부의 겨울휴양지 자코파네로 향하는 여정 내내 폴란
“치열한 모순의 존재(creature of intense contradictions)”한영혜가 분했던 극중 캐릭터에 관한《할리우드 리포터》의 평은 대단히 강렬할뿐더러, 그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유효하다.인구 10만을 조금 넘는 시즈오카 현의 중소도시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그는 열 살에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거장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이었다. 2년 뒤 캐스팅된 작품의 감독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공연자(costar)는 영화제 사상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다만, 그자신은 연기
A man tells his stories so many times that he becomes the stories.그 자신이 이야기가 된 한 남자가 있다.They live on after him.그는 사후에도.And in that way, he becomes immortal.이야기로 남아 불멸이 되었다.(팀 버튼 감독). 대한극장, 마지막 회.엔딩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뒤에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제인 '부자간의 화해'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감독의 연출력도 좋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로부터 풍기는 아름다움에 취해가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 어렵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다움을 열어주려는 마음이 일기까지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한 순간에 그 아름다움의 한복판에 서있음을 느끼곤 아찔해 한다.”― 여균동, 『몸』안성의 텅 빈 소극장에 홀로앉아 정신없이 읽다가,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는 충격과 함께 필사했던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린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19년 뒤인 지난해 10월 5일. 200페이지 넘는 장편의 대부분을 차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