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2월 12일 탁구와 청소년축구의 남북단일팀 합의 선언이 나왔다. 그 동안 쟁점이 돼 왔던 남북 교차 훈련 일정 문제는 북한쪽 주장대로 일본 전지훈련으로 대체하기로 했고 공동단장을 고집하던 북한이 한 수 접어 탁구팀 단장은 북한이, 청소년축구팀 단장은 남한이 맡기로 하면서 합의가 이뤄졌다. 단일팀의 선수단기는 하얀 바탕의 하늘색 한반도 지도를 그려 넣은 것으로, 단가는 아리랑으로 확정됐다. 수십 년 동안 뜸은 들였으나 한 번도 뚜껑을 열지 못했던 밥솥이 열렸다. 당장 두 달 뒤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
분단은 한반도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영위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스포츠 분야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가장 두드러졌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시산혈해를 이룬 전쟁이 휴전으로 대충 마무리된 뒤 스포츠는 남과 북의 대리전의 현장이었고, 남북대결이라도 벌어질라치면 출전하는 선수들은 그야말로 “지면 죽는다”는 듯 눈에 불을 켜야 했다. 평화의 제전이건 세계인의 축제이건 뭐건 관계 없었다. 북한이 뭘 하려면 무조건 막아야 했고 남조선이 까불면 덮어놓고 밟아야 했다. 남한 해방직후 NOC 먼저
소니의 가정용 게임 콘솔 기기인 ‘플레이스테이션’ 은 최근까지도 엑스박스와 더불어 콘솔 게임시장을 이끄는 브랜드다. 90년대 닌텐도와의 불화 끝에 소니의 단독 게임 플랫폼으로 탄생한 이래 여러 콘솔 기기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한 플레이스테이션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이 대중적 게임으로서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가 대중적인 게임으로 자리하기 시작한 시점은 2000년대 초중반이다. 그런데 이 시기 한국 게임 문화는 ‘스타크래프트’를 중심으로 한 P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 열렸다. 2차대전 후 유럽에서 처음 열리는 월드컵이었다. 그리고 사상 최초로 아시아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에 나선 대회이기도 했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인도네시아) 팀도 있었으나 정식 국가의 대표팀으로는 사상 첫 도전이었다. 그 영광스런(?) 도전의 주인공이 바로 한국팀이었다. 월드컵 극동 예선에는 한국 대만 일본이 편성돼 있었다. (오늘날의 중국, 즉 중공은 국제 스포츠무대에 나서지 않을 때였다.) 대만은 예선에 출전하지 않았고 결국 월드컵 티켓은 한일전의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조편성이 끝났다. 우리는 F조, 상대는 자그마치 독일, 스웨덴, 멕시코다. 어느 한 팀 만만한 팀은 커녕, 어떻게 해 볼 엄두가 돋지 않는 상대들이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은 망했구나 암담한 맘으로 우리와 상대할 팀들의 면면을 들여다보자니 슬며시 까마득한 옛날 기억과 사연들이 뭉개뭉개 피어오르기도 한다. 독일, 스웨덴, 멕시코는 대한민국 축구의 초기 역사에 저마다 특이한 추억의 고리들을 걸어 놓은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그 사연들을 잠시 역사 속에서 끄집어내 보자. 첫 출전 런던올림픽에서 만난 멕시코ㆍ스웨덴 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