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자마자 잉글랜드로 떠난 A와 재회한 것은 봄꽃 소식을 기다리던 지난해 3월 목요일 오후였다. 이미 학교를 떠난 필자를, “제발 이름을 불러 달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생님”이라 칭하는 고지식한 그도 반가웠지만, 화사한 표정으로 건넨 붉은 페이퍼박스가 내내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모처럼 준비해온 선물이니까 사양 말고 먹어 볼까?”염치없이 솟아오르는 식탐.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만화가 쿠엔틴 블레이크의 유명한 로고가 그려진 상자에서 묵직한 느낌의 쿠키를 꺼내 물었다. 직항로로 한나절 거리를 날아온 캐러멜 크
겨울재킷의 지퍼를 턱밑까지 올리고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입가를 맴돈 것은, 촌부의 평범한 삶을 사랑하던 어느 잉글랜드 시인의 노래였다. 해질 무렵 면경처럼 빛나는 웨일스의 강줄기는 아닐지라도, 이른 시각부터 쉼 없이 달려온 여로를 고첨하기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후타바 군 히로노 마을. 4천명 조금 안 되는 인구의 시골 동네. 후쿠시마 제1원전 2킬로미터 권역에 진입하던 당시 시간당 2.2 마이크로시버트, 킬로그램당 3.3 베크렐 까지 뛰었던 방사능 수치는 어느새 0.13에 0.2로 내려와 있었다.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의 대략
Ты небо недавно кругом облегала,И молния грозно тебя обвивала;И ты издавала таинственный громИ алчную землю поила дождем. “너는 조금 전까지 저 하늘을 온통 뒤덮고,번개는 사납게 너를 감싸 안았다.너는 비밀스러운 천둥소리를 내지르며메마른 대지를 소나기로 적셨노라.” 플로샤디 레볼루치(Площадь Революции). '혁명광장'이라는 다소 전투적인 이름의 모스크바 지하철역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린 건, 태풍이 지나간 뒤
Two monks were arguing about a flag. One said: “The flag is moving”; the other said: “The wind is moving". The sixth patriarch happened to be passing by. He told them: “Not the wind, not the flag; It’s the mind that moves.”두 승려가 깃발에 대해 논쟁일 벌이고 있었다. 하나가 말했다. “깃발이 움직이고 있어”; 다른 하나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고 있다니까
호놀룰루가 자리한 오아후섬 동부ㆍ카우아이섬 북부 어딘가의 숲 속.많아야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지만, 1997년 연극무대에 데뷔했으며 영화에 출연한 지는 만 10년이 되어가는 베테랑 여성연기자가 있는 힘껏 아름드리나무를 밀고 있다. 시나리오에는 “숲을 걷는다” 정도로 적혀있던 장면. 그녀가 액션의 동기(motive)에 대해 묻자 감독은 예의 차분하고 상냥한 어조로 답했다.“가장 괴로웠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밀어보세요. 한번 싸워 보는 겁니다. 어떤 감정이 떠오르는지 보자고요.”리허설을 마치고 본 촬영이 시작되었으나 좀처럼 오케이 사인
“See you now, Your bait of falsehood take this carp of truth”― Act 2, Scene 1 of William Shakespeare's “Hamlet”“‘진리’라는 잉어를 낚아 올리는 허구의 미끼”.현대 영어로 그 뜻을 풀어 써보면 대략 “Make sure your little lie brings out the truth.” 정도로 풀이되는 『햄릿』의 대사를 ‘판타지’를 설명하는데 가져다 쓴 이는 프로이트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소망들이 성취되는 장소이자 양식(예술). 판타지가
“Though it had not all the decided pretension, the resolute stylishness of Miss Thorpe’s, had more real elegance. Her manners showed good sense and good breeding; they were neither shy nor affectedly open; and she seemed capable of being young, attractive, and at a ball without wanting to fix the at
“제가 소녀시대 인기를 어떻게 당하겠어요. 신작이고 뭐고 그냥 날 샌 거죠.”“...?! 와하하하!”몇 초간 정적이 흐르다 객석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일견 지극히 평범한 것 같지만 무엇 하나 이례적이지 않은 게 없는 상황. 일단 얼마 전 예순 네 살 생일을 맞은 그가 난생처음 게스트 뷰(GV)를 위해 한국 관객들 앞에 섰다는 사실도 그랬지만, 하필 그 자리에서 서른 번째 장편 상업영화 개봉일의 ‘실패담’을 ‘드립’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 웃음의 포인트였다. 반응도 빨랐다. 하긴. 관객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던 마니아들의
가족의 손을 잡고 유원지에 가보았던 어린 시절 추억이 없다.자각증상이 기준이라면 딱히 그 사실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으니 대수로운 일은 아니리라. 다만, 늘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화려한 유니폼을 입고 손님들을 안내하는 어트랙션(attraction)의 스태프는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멋대로 상상했다. 길게 이어진 줄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마치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보였을 거라고, 또한 그 자신 몇 번이고 뿌듯함을 만끽했으리라고.부천국제판타스틱영회제(BIFAN) 개막식이 진행되던 목요일 저녁, 부천체육관 근
“행사 시작 15분 전입니다.”“네. 저는 준비됐습니다.”대략 한 달 전부터 준비해온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연회를 앞두고 재킷의 앞단추를 채웠다. 행사 타임 테이블을 점검하고 준비상황 브리핑을 받으며 주변을 둘러보다 시선이 멈춘 자리에, 그녀가 서 있었다.누가 보든 ‘파티용 복장’이 아니라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캣우먼의 신분을 감추고 파티장에 나온 의 앤 해서워이처럼 개구진 표정. 호스트들이 등장하면 그녀는 호텔에서 대략 30킬로 가까이 떨어진 곳으로 향할 것이다. 동대문. 건축과 도시, 그리고 디자인의
요즘엔 주로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로 언급되는 존 보이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한국 관객에게 그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작품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 도,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장 도 아니었다. 아들(릭 슈로더)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건 복귀전에 나서는 전직 복서로 분한 다.1979년 9월 초, 당시로써는 외화사상 최고 가격인 2억 원에 수입되어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는 2년 뒤 설날 시즌까지 상영되면서 55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다. (1981년 1월 13일 현재) 단관개
반기는 이 없는 집안행사는 썩 유쾌하지 않으나 대략 두세 시간 정도 인내심을 발휘하면 넘길 수 있는 가벼운 난관이다. 그러나 ‘모두가 한 장소에 묵는’ 형태를 띠면 상황이 심각해진다. 일단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는 상태로 시선을 접시에 고정한 채 음식을 한 입에 우겨넣어야 하는 디너테이블부터 스트레스의 레벨이 다르다.할리우드 무성영화시기를 대표하는 D. W. 그리피스의 대작 사극 촬영장 자리에 스페인 식민지 부흥 양식(The Spanish Colonial Revival Style)으로 세워진 영화관. 비스타시어터의
는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에 주연까지 맡은 로 아카데미 각본상ㆍ감독상ㆍ최우수작품상을 석권,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오른 영화작가이자 희극인 우디 앨런의 대표작이다.내용은 이렇다. 스스로를 불세출의 예술가라 여기는 주인공이 있다. 그간 두 편의 희곡을 발표했지만 무능한 동료들 탓에 반향을 얻지 못한 거라 믿는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작품을 연출해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다만 조건이 만만치 않다. 연기력은커녕 대사도 못 외우는 투자자(마피아 두목)의 애인을 캐스팅해야한다.
“Bienvenue à Montréal!” (Welcome to Montreal!)몬트리올 중앙역을 바라보던 운전석의 윌이 제라르 드빠르디유의 말투를 흉내 내며 한 마디를 내뱉자,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롱아일랜드(뉴욕)에서 시작된 열 시간의 여정. “그 무슨 정신 나간 아이디어냐”며 혀를 차는 이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어차피 JFK에서 항공편을 이용 한다 쳐도 서너 시간 정도 절약될 뿐이니까. 게다가 40회를 맞은, 이 “규모는 작지만, 독특하고 흥미로우며, 치명적으로 아름다운”(윌의 표현에 따르
기차가 포이어제역에 닿았다. 이제 플랫폼에 내려 10분 남짓 걷다 보면 그 이른 봄날의 엉뚱하고도 충동적인 여정도 일단락 될 것이었다. ‘엉뚱하고도 충동적인’ 뒤에 ‘심지어 멍청하기 까지 한’ 정도를 덧붙여도 나쁘지 않으려나.시간을 대략 반나절 정도 앞으로 되돌려보자. 출장을 마치고 나리타로 돌아가다 스톱오버로 뮌헨에 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벌어놓은 시간을 굳이, 300년간 침잠해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그런 까닭에 시가지의 대부분이 1945년 이후 지어진 도시에 오는데 써버릴 이유는 없었다. 당장
“What's in a name?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William Shakespeare, 「Romeo and Juliet」“이름이란 뭘까?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감미로운 향기는 그대로인 걸.”-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유품’이라기보다 어머니의 ‘학창시절 추억의 오브제’라는 표현이 정확했으리라. 생전에 좋아하시던 노란 후리지어가 가득 수놓아져 있는 앞치마.당신의 지인에게 건네받던 날, 멜로드라마 주인공
“When your prized possessions / Start to weigh you downLook in my direction / I'll be round, I'll be round”너의 소중한 것들이 / 너를 짓누르기 시작할 때내 쪽을 바라봐줘 / 내가 주위에 있을 거야, 주위에 있을 거야 정작 존 레논이 이 곡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창작물이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스스로 생명력을 지닐뿐더러, 사토 야스시의 원작 소설은 물론, 영화까지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노래,
청명하나 쌀쌀했던 전날에 비해, 흐려도 한결 푸근해진 날씨 때문이었을까. 16세기 지어진 고찰의 이름을 딴 역에 내려, 한때 양잠장(養蠶場)이었던 공원을 가로지르는 내내 명주실로 촘촘히 짜놓은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2014년 3월 29일은 꽤 괜찮은 토요일이었다. 3년 전 런던에서 처음 본 피닉스 댄스 시어터 출신 안무가가 연출한 공연을 관람하러 가기에는. 리젠트 파크의 꽃송이들처럼 화려했던 퍼포먼스를 떠올리며 몇 분을 보냈을까.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곳에 만 스무 살의 이시바
“멋진데.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이를테면, 뭐가?”“다(Everything)...”“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열차가 전주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올 무렵, 옥스포드에서 이른 점심을 먹던 친구가 이번 기사에 대한 기대를 담은 메시지를 보내왔다.친구는 충분히 설레어 할 만 했다. 목축으로 유명한 잉글랜드의 월든 출신인 그가 도쿄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데릭 하트필드의 소설을 찾아보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알프레드 번바움이 번역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장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등장하는 그
“이 팀 이제 살았네, 살았어.”신바시 역 인근 선술집.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영화잡지 기사를 읽던 친구가 탄성을 뱉었다. 감독 데뷔 이후 발표한 아홉 편의 작품 중 여덟 편이 한국의 국제영화제, 심지어 그 중 네 편(당시)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신작, 의 크랭크 업 소식. 전주 상영을 기준으로 정확히 1년 전이었다.는 두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되었다.우선은 원작이었다. 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 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베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