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토록 구체적으로 느껴본 예도 드물 것이다.대학원에서 정치학으로 유학 준비를 하다 늦깎이로 들어간 예술대학의 단편영화 워크숍. 퇴로는 없었다. 좋든 싫든 해내지 못하면 졸업에 차질이 생긴다는 제도의 벽이 가로놓여 있었으니까. 맨 처음 손을 내민 이는 ‘늦깎이’라는 면에서 비슷한 처지이던 같은 학번 동기다. 고교시절 특채 연기자로 데뷔, 극장용 장편영화의 주연까지 했던 그에게 단편영화 제작에 당장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을 배웠다.허나, 그런 그조차 해법을 줄 수 없는 또 다른 난제가 바로 캐스
“The fundamental things apply...As time goes by”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1942년 작, 에서 둘리 윌슨이 피아노연주와 함께 부르는 노래(As time goes by)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는 소절.옛 연인의 재회와 두 사람의 회한이 스토리의 핵심인 의 이미지가 강해서일까. 작곡가 허만 헙펠드가 1931년에 만든 이 발라드가 브로드웨이 뮤지컬 코미디에 처음 사용된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수에 찬 멜로디에 더해 아홉 살 때 교회의 오르간 연주가이던 아버지에 의해 독일로
“몇 년 전 모 해외 영화제에 5명의 젊은 감독이 모였다. 새로운 기획을 세일즈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그를 만났는데, 거의 완성 직전 단계로 보이는 기획을 가져왔다. 그런데 정작 나머지 네 사람은 얼마 안 되어 신작을 만들었고, 그의 기획만이 남겨졌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을 보고 난 지금, 깊이 납득한다. 쉽게 완성할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인디펜던트이기에 가능했던 풍윤한 시간, 어득함마저 느껴지는 수고를 통해 엮어 올린, 호화로운 판타지 영화였던 것이다.”약간의 실례를 무릅쓰고 원래의 발언에 등장하는 특정인의 이름을 3인칭으로
늘 무심한 얼굴로 다가오는 삶의 드라마틱한 순간은 2019년 3월 15일 금요일도 예외가 아니었다.시계의 분침이 저녁 8시 정각을 지나 5분 지점을 가리킬 무렵, 와카사만의 어부들이 고등어를 지고, 고도(ancient city)를 찾아오던 그 길 끝 상점가 이층 건물의 미니시어터에서 의 마지막 상영이 종료되었다.제 아무리 덤덤하게 키보드를 두드려보려 해도 아쉬움에 '평소와 다름없는 주말 저녁' 같은 표현을 쓸 수 없다. 별세 직전 출연하거나 내레이션을 맡은 몇 개의 작품을 저마다 ‘유작’이라 선전하지만, 필자
순전히 아침 댓바람에 출발해 저녁녘이 되어도 목적지에 닿을 수 없는 여정 때문이었다. 2010년 10월을 이틀 남겨놓은 토요일 《더 가디언》에 실린 ‘경애하는’ 캐서린 테일러의 리뷰만을 읽고 무작정 약 보름 전 출판된 단행본을 주문한 것은.하지만 재킷 앞주머니 작은 비닐주머니에 수면유도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저자인 이삭 마리온이 세계시장에서 백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부자가 될 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가 경유지인 항공기 이코노미클래스 좌석에 압핀처럼 고정되어 있었던 건, 옆
1분 30초.불 꺼진 상영관에 앉아 직항으로 꼬박 11시간이 걸리는 그 도시의 노면전차를 떠올리는데 걸린 시간. 2월이면 어차피 절반은 궂은 날씨일 테니 스크린 속에서 내리는 비도 어색할 게 없었다. 무엇보다, 무채색의 차창 위를 흐르는, 비슷한 습도이나 전혀 다른 느낌의 공기가 영락없었다. 촬영지야 도쿄 23구 어디쯤이었을 테다. 그럼에도 지난 1월 17일 개봉한 영화 의 인트로를 보던 필자가 떠올린 곳은 분명 바르샤바였다. 한때 배우를 꿈꿨던 친구가 세일즈맨으로 살아가고 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낯익은 역무원이 오랜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는 산골마을 간이역. 유쾌한 걸음걸이의 사내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미소와 정성스런 식탁이 정겹다.“아, 이 맛! 역시 엄마 손맛이 최고야!”뭉클한 느낌의 BGM과 어우러져 불과 15초 만에 시청자의 시선을 붙드는 부엌의 미장센. 여기까지라면 영락없는 휴먼드라마다. 하지만 장르는 순식간에 코미디로 바뀐다. 편의점에서‘바로 그 메뉴’가 담긴 레토르트파우치를 집어드는 어머니의 시선이 아들과 마주치는 순간.“어? 그... 그거... 엄마!”느닷없는 추격전(?)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끝나버리는 이 재
궂은날이었지만 마음까지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좀 들떠있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뉴스톱》 연재를 시작한 필자에게 사카모토 류이치 씨가 데뷔 40년 기념 단독 인터뷰 기회를 제공하는 호의를 베푼 지 한 달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스티븐 쉬블이 연출한 의 시사회소식을 듣고 커먼즈(commmons, 사카모토 씨를 주축으로 설립된 음악사무소)의 Y씨에게 연락하니 한국방문 일정이 잡혀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뉴욕도, 도쿄도 아닌 서울에서 이루어지게 될 재회. 어찌되든 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한 뒤 흐뭇한
“영사기는 스크린에 빛을 투사한다. 이제 마술 환등,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ía)의 빛이 영화관을 장악한다. 스크린 위엔 세상물정을 담은 ‘인생극장’이 펼쳐진다.”- 노명우, 『인생극장』 중에서. 수은주가 빙점하로 급전직하했던 전날의 기온 때문일까, 안개를 동반한 겨울비가 따듯하게 느껴지던 일요일이었다.2017년 12월 3일.날짜와 날씨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취재라는 생업으로 몸에 익은 메모하는 습관 때문이나, 이날의 기억이 유독 생생한 이유는 따로 있다.세계에서 가장 늦게 개최된(12월 23일부터 3
The flower that blooms in adversity is the most rare and beautiful of all.(역경을 이겨내고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인터뷰어(interviewer)이기 이전에, 제주영화제 폐막작 초청 게스트 수행팀장으로 사흘간 배우 미사키 아야메를 지켜보던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전주영화제에서 20년 만에 다시 만난 의 결말부에 나오는 이 대사였다. 나름의 한계야 있겠지만 은 나 쯤으로 수렴되던 당시 디즈니 애니메이션
급물살의 시라세(白瀬川) 강 굽이치는 물결에청청(清清)히 머리를씻어 주옵소서…동편의 초가는 머물다 갈 곳이요서편 무덤 주자독(厨子甕ㆍ유골함) 집은 최후에 닿을 장소라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관이 담긴 시가(詩歌)같은 익숙함. 19세기 말까지 독립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류큐(琉球)왕국이던 오키나와에서, 시마우타(섬 노래)라는 통칭으로 전래돼온 민요 중 하나다. 오늘 이 지면을 통해 이루어질 만남의 매개이자, 필자가 번역을 맡은 영화 에서, 이 노래는 오키
“I decide who I am.”좀 엉뚱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를 통해 부활한 세기의 로큰롤 히어로, 프레디 머큐리의 이 대사를 듣는 순간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1991년 11월 런던에서 머큐리가 사망하기 정확히 한 해 전인 1990년 11월, 시즈오카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배우 한영혜다. (인터넷무비데이터베이스에서 그녀의 이름은 한영혜의 일본어 독음을 영어로 표기한 'Hanae Kan'으로 검색된다. 엔딩크레디트에 가타가나가 병기되지 않은
치카우라 케이 감독의 장편 독립영화, 의 히로인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아카사카 사요를 처음 본 것은, 3년 전이다. 도쿄대에서 친하게 지내던 중국인 학생들의 웨이보 계정을 통해서였다. (웨이보는 미사용자에게 사용자가 업데이트한 콘텐츠를 공개하지 않는다) 패션모델로써 정점을 찍던 시절 그녀의 프로필이 일본어판 위키피디아가 아닌 바이두바이케(百度百科)에 소개되어 있는 이유도 그녀가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는 곳이 중국이기 때문이다.물론 중국에서 아카사카의 인지도는 일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몇 가지 상징적인 사건
얼핏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싶을 수도 있다.예술가의 아우라가 넘치는 외모야 그렇다 치자. 베를린에서 성장한 ‘국제파’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세칭 ‘명문대’ 출신이다. 단편의 국제영화제 수상 및 초청이력도 화려하다. 장편 데뷔작 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치카우라 케이 감독의 이야기다.이게 끝이 아니다. 작품에 참여한 캐스트와 스태프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느새 입가에서 ‘이 사람 뭐지? 브루스 웨인?’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도 있다. 엄연히 신인(그것도 독립영화)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영화의 주연배우가
로빈 윌리엄스. 과 에서 터무니없을 만큼 밝고 푸근한 낙천가의 웃음을 보여준 사내. 좀 뜬금없지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분에 초청된 영화, 의 원작자, 우타가와 타이지와 마주 앉는 순간, 그 평화로운 미소를 바라보던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년 2개월 전 우리 곁을 떠나간 그리운 이름이었다.이 즈음에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우타가와가 지나온 삶의 궤적이 그리 낙천적인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자랑스러워하던 아름다운 어머니는
주머니를 털어 조금의 만용을 부리니 고속버스로 꼬박 한나절이 걸리는 지난한 여정이 반으로 줄고, 시간대를 선택할 자유까지 주어졌다. 그렇다고 목청 높여 ‘자본의 효용’을 찬양할만한 기분도 아니었다. 깊은 우울 속으로 침잠해가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별다른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고치(高知) 현 고치 시의 누군가의 옛집에 찾아갔다. 작고 소박하지만 겨울이면 볕이 깊숙이 들어 푸근하던 남향. 봄이면 달빛에 희끔히 빛나는 목련이 곱다라니 피어있었다던 그곳은, 편의점이 되어 있었다. 이웃의 할머니에게 전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년
2년만의 신작 로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미노리카와 오사무 감독은 일본 영화계의 전설이 된 1949년 생 동갑내기 두 사내를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은 2004년 이후 줄곧 일본영화감독협회 이사장에 재임 중인 최양일이다. 한국에는 재일한국인 문호(文豪), 양석일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달은 어디에 떠 있는?빱爻뵉퓻?뼈』)로 알려져 있는 그는 나가노 현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다른 한 사람은 1970년대 시리즈로 스타덤에 올라 연기파 배우로
필자가 2년만에 후카다 코지라는 이름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지난 7월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한 오가타 다카오미 감독의 작품 에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은 주연배우, 마쓰바야시 우라라의 트윗 때문이었다.な、な、ななななななんと…映画『飢えたライオン』がプチョンで、NETPAC(最優秀アジア映画賞)を受賞しました…この賞は過去には、深田監督の『歓待』や武正晴監督の『百円の恋』が輝いてきた賞です‼️R
‘운명’이라는 단어를 즐겨 쓰지 않는다.인간 자주성의 포기를 전제하는 개념 자체도 영 마뜩찮지만, 제목만으로도 내용이 예상되는 소프오페라(soap opera)에서 구태의연한 전개를 정당화하는데 남용된 사례가 셀 수도 없어서다.하지만 적어도, 두 편의 작품(, )이 지난 7월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고, 그 중 가 EFFF(European Fantastic Film Festivals Federation) 부문 심사위원 특별 언급이라는 성과를 올린 지 석 달 만에
10회째를 맞은 DMZ국제다큐영화제 프로그래머에게 드리고싶은, 조금 상반된 분위기의 두 가지 질문이 있다.‘대체 어떻게 이 작품을 찾아내셨느냐’는 것과 ‘왜 이 감독을 이제야 이 감독을 부르셨느냐’는 것. 올해 아시아경쟁 부문에 초청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2017)과, 그 연출자 이세 신이치(69) 감독의 이야기다. 일단 팩트체크부터 해야겠다. 인터넷무비 데이터베이스가 소개하는 이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고작 세 편 뿐이지만, 실제로 1995년 첫 장편 다큐멘터리 이후 그가 발표한 작품은 20편에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