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과학 회의주의자, 모두 실패하거나 우경화됐다

  • 기자명 김우재
  • 기사승인 2019.12.11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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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톱에 쓴 글들 때문에 유사과학단체에게 고소를 당했고, 평범했던 과학자의 삶에는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평범한 시민이, 그것도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내는 상아탑의 과학자가 고소를 당할 일은 거의 없다. 다양한 매체에 날 선 글을 써왔고, 때로는 대통령과 정권의 실책을 매섭게 비판해왔지만, 단 한번도 그 권력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적은 없다. 민주주의 사회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며, 특히 지식인의 권력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전진시키는 중요한 활동이라 생각한다. 모든 권력은 견제받아야 한다. 특히 그 권력이 평범한 시민의 시야를 가리고, 그들을 잘못된 지식으로 이끈다면, 그것을 알게된 지식인은 반드시 공공의 이익을 위해 비판을 서슴지 말아야 한다. 한국의 몇몇 유사과학단체들은 유사종교의 형태를 띄고 조용히 숨어 권력이 되었으며, 그들의 비과학적 세계인식과 이를 통한 비즈니스 활동은 때로는 제도권의 과학을, 때로는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과학이 공공을 위한 지식체계라면, 과학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지식인이어야 한다. 

와디즈 펀딩 캡처.
와디즈 펀딩 캡처. 와디즈 펀딩 사이트 주소

 

과학조선에서 수돗물 불소화 논쟁까지

유사과학, 영어로는 pseudoscience라고 부르는 각종 활동은 오랫동안 인류와 공존해온 생활양식이기도 하다. 근대과학의 역사는 길게 잡아야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평범한 민중이 과학의 존재를 깨닫게 된건 19세기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그 19세기에도 다윈의 진화론은 종교의 권위를 두려워해야 했고, 20세기 독일과 미국에서는 우생학과 창조과학이 과학보다 더 맹렬하게 대중을 사로잡았다. 21세기 벽두에도 미국의 중산층 일부는 백신거부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 세계에서, 근대과학과 유사과학의 출몰은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는 독립적 사건으로 보이기도 한다.

근대과학의 기원은 서양이다. 제국주의는 동아시아에 과학을 전파했고,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은 과학이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지닌 힘의 근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앞다투어 과학을 배웠고, 과학을 받아들였다. 조선도 마찬가지였으며, 실학운동에서 최한기로 이어지는 흐름은 식민지 단절을 거치면서고 '과학조선'의 이름으로 해방공간에 등장했다. 과학은 새로운 조선에 어울리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국대안파동과 분단으로, 과학조선의 꿈은 기약없이 밀린다. 이후 박정희가 주도한 개발독재의 시대에, 과학이 어떻게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정치에 종속된 애국주의와 결합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산업개발기의 한국에서, 과학과 유사과학의 구분은 크게 의미 없는 화두였다. 대부분 먹고사는 일이 더욱 중요했으며,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은 사치에 가까웠다. 게다가 정치권력은 자연을 탐구하는 기초과학보다, 산업개발의 원천이 되는 기초연구를 과학이라고 불렀다. 한국의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일반 민중이 먹고 사는 일에서 어느 정도 해방이 되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일상에 중요한 사안들 중에서 과학이 설명하고 관여하는 주제들이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1980년대 시범사업이 실시되고 이후 2000년대까지 논쟁이 지속되는 '수돗물 불소화 논쟁'이다. (다음 논문을 참고할 것. 서이종. (2004). 한국 과학사회논쟁과 이식성-수돗물 불소화 논쟁을 중심으로. 환경사회학연구 ECO, 39-74.)

수돗물 불소화 논쟁은, 시민들의 치아 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불소를 상수도 처리과정에서 섞자는 보건의들의 주장과, 이런 불소의 투입이 위험하며 시민의 건강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환경단체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이런 논쟁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도 과학이 사회의 각종 문제들에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고, 여러 사회문제의 해결에서 과학이 중요한 지식체계로 등장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1981년 한국창조과학회가 창립되고, 1990년 사단법인 인가를 받는다. 1980년~1990년대 한국사회는 드디어 과학이 시민사회에 인식되고 논의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수돗물 불소화 논쟁 기사 캡처
수돗물 불소화 논쟁 기사 캡처

 

한국 유사과학 전쟁사

1990년대 PC통신에는 수많은 동호회가 존재했고, 그들의 문화 중 일부는 2000년대 초 한메일, 안랩, 한글과컴퓨터 등의 벤처회사의 모태가 된다. 바로 이 시기 천리안에는 강건일 박사와 김진만씨가 만든 '의사과학비평동호회(CSS)'가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은 영어의 스켑틱스 skeptics를 회의주의자로 번역하며, 스스로를 회의주의자로 불렀다.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과학자사회의 규범 중 하나로 '조직적인 회의주의 organized sketicism'을 들었는데, 이는 과학자사회가 나이, 연령, 인종, 권위 등에 상관 없이 상대방의 지식체계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걸 뜻한다. 미국과 한국의 소위 회의주의자들은, 과학의 가장 큰 특징을 이 회의주의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물론 머튼은 공산주의, 보편주의, 이해상충주의 등의 다른 과학의 규범을 말했고, 과학의 특징은 회의주의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런 특징은 이들의 비과학적인 사회현상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초자연현상, 컬트, 심령현상, 초능력, UFO 등을 비과학적인 사회현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과학의 이름으로 낙인찍고 공격하여 처벌한다.

한국의사과학문제연구소 사이트 화면 캡처.
한국의사과학문제연구소 사이트 화면 캡처.

 

회의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의 사상은, 때로는 과학에 대한 협소한 이해로, 때로는 과학을 잘 모르는 대중에 대한 멸시로, 때로는 서로의 지식을 경쟁하고 자랑하는 공격적 태도로 나타난다. 천리안의 대표적 동호회로 자리잡았던 CSS는 강건일과 김진만의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지고, 이들은 강건일의 '한국의사과학문제연구소 KOPSA'와 김진만의 '합리주의자의 도'로 갈라진다. 내가 한국 회의주의자들을 알게 된건 1990년 인터넷을 통해서였고, 이미 그 시기에 강건일과 김진만은 상대방을 비난하며 큰 갈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인터넷을 통해 활동했는데, 게시판을 통해 유사과학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이 주된 활동이었다. 인터넷이 막 한국을 점령한 그 시기의 한국사회는, PC통신 동호회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네티즌들이 게시판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던 시기였고, 안티조선 운동 등을 통해 강준만, 진중권 등의 인터넷 키보드워리어들이 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회의주의자들은 과학을 자신들의 상징자본으로 내세우며 바로 그 시기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점령하고 있었다.

김진만의 '합리주의자의 도' 사이트 캡처.
김진만의 '합리주의자의 도' 사이트 캡처.

한국 회의주의자들의 역사를 1990년대 중후반으로 잡는다면, 그 역사도 이제 20여년이 되었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대체의학, 한의학, 초능력 등을 비판하며 대중을 계몽시키는 활동을 펼쳤고, 창조과학회처럼 인터넷을 통해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키는 단체들에 맞서 옳바른 정보를 전달하려 싸운 키보드워리어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진정성만큼은 의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행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한국 회의주의자들의 역사는 갈등과 반목으로 얼룩져 있다. 강건일과 김진만이라는 회의주의자들의 대표주자들은 수십년을 갈등하며 유사과학과 싸워야 할 에너지의 상당부분을 서로를 비방하는데 사용해왔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물리학자 출신의 경제학자 양신규는 홍성욱과 논쟁을 통해, 인터넷에서 유명해진 논객이었는데, '스켑렙 skeptical left'라는 웹사이트는 훌륭한 글들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자살한 양신규를 추모하는 페이지에서 출발한 회의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특히 90년대를 지나며 정치적으로 우파적 경향을 보였던 강건일과 김진만의 웹사이트에서 불만을 느낀 이들이 모인 이 곳에서, 회의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좌파라고 인식하며 다양한 논쟁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강건일과 김진만의 회의주의자 활동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았던 이 웹사이트도 결국 운영자간의 갈등과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웹사이트들로 분화되어 나간다.

그리고 정치적 좌파를 내세웠던 스켑렙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우익 청년 변희재의 미디어워치와 협력하며, 여러 진보적 지식인들의 논문표절을 검증하고 이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최근엔 스텝틱이라는 잡지가 출판되어, 상당한 판매량을 올리고 있다. 스켑틱이라는 잡지가 회의주의자 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바 없다. 개인적으로 만나본 잡지사의 사장은, 기존 회의주의자 운동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인본주의자로 보였다).

http://theacro.com/zbxe/free/604992
http://theacro.com/zbxe/free/604992

한국 회의주의자들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결국 모두 우경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과학적 지식으로 비과학적인 현상을 비판하는 회의주의자들이 어떻게 우경화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다. 과학으로 유사과학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일은, 언론이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과 같은 종류의 일이며, 그 안에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가 내재되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중동 등의 극우언론이 보여주는 행동 패턴과, 회의주의자들이 걸어간 길에는 비슷한 궤적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건 바로, 과학을 권력으로 사용하려는 회의주의자들의 습관 때문이다. 조중동이 언론을 권력으로 사용해 시민의 시야를 가리고 생각을 주입하려 하듯이, 한국의 회의주의자들은 과학이라는 가장 합리적인 지식체계에서 권력의 냄새를 맡고, 이를 이용해 비과학적인 모든 현상들을 교정하고 계몽하고 가르치려 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인 정치적 우경화를 낳는다. 나는 한국 회의주의자들의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왔고, 그 활동이 한국사회에 가져온 변화가 국소적이었음에 슬퍼한다. 과학으로 무장한 회의주의자들의 유사과학에 대한 전쟁은, 실패했거나 여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1990년대 시작한 회의주의자들의 위대한 투쟁사는, 한국사회에서 유사과학을 물리치지도 못했고, 과학이 자리잡는 토대를 마련하지도 못했다. 여전히 창조과학은 더욱 성장하며 세를 늘리고 있고, 뇌과학을 토대로 사용하는 유사과학단체는 제도권에 침투해 과학으로 된 권위를 얻으려 한다. 회의주의자들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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