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가 술에 취해 죽었다? 너구리와 라쿤을 구별 못하는 언론

  • 기자명 임영대
  • 기사승인 2019.12.3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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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0, 연합뉴스에서는 재미있는 해외토픽을 하나 내놓았다. 독일의 한 시장에서, 야생동물인 너구리가 사람들이 흘린 술을 마시고 취해서 돌아다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한참 사람들을 즐겁게 하던 너구리는 소방관에게 잡혀간 뒤에 일단 동물보호소로 보내졌고, 그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서 사냥꾼에게 넘겨져 사살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오르게 된다. 독일은 환경보호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나라인데, 그런 독일에서 왜 너구리를 자연에 풀어주지 않고 사살했을까? 술에 취해 있었으니 반항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냥 우리에 넣어서 숲에 가져가 풀어주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은 기사에 포함된 사진을 보면 일거에 사라진다. 술에 취한 모습으로 구경꾼들을 즐겁게 했던 그 동물은 애초에 너구리가 아니었다.

연합뉴스 '독일 크리스마스 시장서 '낮술' 너구리…비틀거리다 생 마감' 기사 캡처.
연합뉴스 '독일 크리스마스 시장서 '낮술' 너구리…비틀거리다 생 마감' 기사 캡처.

 

이 동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너구리가 아니라 라쿤(raccoon), 즉 일명 미국너구리이다. 이 녀석은 본래 북중미 지역에 서식하는 미국너구리과()에 속하는 동물로, 개과()인 너구리와 계통이 아예 다르다. 진짜 너구리는 실제로 이렇게 생겼다.

사진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너구리#/media/파일:Tanuki01_960.jpg
사진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너구리#/media/파일:Tanuki01_960.jpg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된다. 독일에는 애초에 미국너구리는 물론 너구리도 서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적색은 원래 러쿤 서식지, 청색은 이입된 지역
적색은 원래 러쿤 서식지, 청색은 이입된 지역

 

청색은 원래 너구리 서식지, 적색은 이입된 지역
청색은 원래 너구리 서식지, 적색은 이입된 지역

 

독일에 사는 너구리는 구소련에서 모피용으로 사육하던 것이 1920년대에 탈출하여 야생에 적응해서 독일까지 확산한 것이다. 러쿤 역시 마찬가지로, 1930년대에 독일에서 모피 채취를 위해서 사육하던 녀석들이 탈출해서 처음 야생화했다. 본격적으로 숫자가 폭증한 건 1970년대부터로, 독일에는 1970년에 러쿤 2만 마리가 있었다고 추산되고 있다.

본래 생태계에 없던 동물이 들어왔으니 당연히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현재 독일에서는 이 침입자를 유해동물로 간주해서 사냥하고 있으며, 그 숫자는 막대하다. 2013년 사냥철에 처음 10만 마리를 넘겼고, 2015년 사냥철에는 12만8100마리에 달하는 러쿤이 사살되었다.

 

이런 정보 없이 단순히 저 기사만 본다면 큰 해도 끼치지 않는 너구리를 왜 독일 당국이 사살했는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실상은 저 귀여운 너구리가 자연환경에 막대한 해를 끼치는 외래동물미국너구리였음을 안다면, 독일 당국의 처치가 다소 잔인할지언정 필요한 조치였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 뉴스는 단신으로 나온 것까지 합쳐 총 10회 보도되었다대부분의 매체는 연합뉴스 최초보도를 그대로 인용하여 이 동물을 계속 너구리라고 표기했다. 하지만 그중 단 하나, 파이낸셜 뉴스는 이 동물이 라쿤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파이낸셜뉴스도 제목은 '너구리'라고 표기했다. 기사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계속 너구리라고 적었지만, 서두에서 진짜 너구리가 아닌 미국너구리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므로 후반에서의 너구리 표기는 오류가 아닌 약칭으로 볼 수 있겠다.

 

9(현지시간) 미 폭스뉴스 등에 따르면 지난 7일 낮 12시 독일 튀링겐주 에르푸르트의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술취한 라쿤(미국너구리) 한마리가 발견됐다.

낮술 취한 너구리 발견.. 크리스마스 시장서 '헤롱헤롱'(입력 2019.12.1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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