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과학 대응' 과학은 항암제가 아니라 백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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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과학 대응' 과학은 항암제가 아니라 백신이 되어야 한다
  • 김우재
  • 승인 2019.12.2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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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과학체크] 셔머, 굴드, 셰이건, 그리고 한국 회의주의자들

국내 회의주의자들의 역사는, 유사과학과의 전쟁보다 회의주의자들 간의 잦은 갈등과 다툼으로 점철되어 있고, 결국은 정치적인 우경화의 길로 빠져들어 유사과학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국내 회의주의자들이 주장의 근거로 삼는 대부분의 문헌들은 미국의 과학적 회의주의자를 위한 잡지 <스켑틱>에 기대고 있다(<스켑틱>은 현재 바다출판사에서 번역해 판매하는 잡지로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다). 스켑틱을 설립한 학자 마이클 셔머는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실험심리학으로 석사학위를, 그리고 과학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과학학자다.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에게 셔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며, 그의 책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와 <과학의 변경지대> 등은 유사과학에 대한 가장 유명한 비판서로 알려져 있다.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표지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표지

 

마이클 셔머의 책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의 서문은 작고한 고생물학자이자 민중을 위한 과학 등에서 리처드 르원틴 등과 함께 활동했던 좌파 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썼다. 그 서문에서 굴드는, 칼 세이건의 마지막 저서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과 자신의 저서 <인간에 대한 오해>를 언급하며 회의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굴드는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노예사냥, 홀로코스트를 초래했던 우리의 어두운 잠재력의 조직적인 폭력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그 한 가지가 인간이 지닌 훌륭한 도덕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도덕성만으로는 우리를 어두운 군중 행동의 비합리적인 힘에서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이성이라고 말하고, 인간을 감정의 지배로부터 구원할 힘을 가진 이성의 선봉에 바로 회의주의가 놓여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굴드에 따르면 “인간의 사회적∙시민적 품위에 이르도록 해 주는 열쇠의 하나”가 바로 회의주의다. 

그리고 굴드는 회의주의가 혹평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도 분명히 기술해 두었다. 그것은 바로 회의주의가 대부분의 경우 “부정하는 방법을 써서 잘못된 주장을 제거해 버리기만 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굴드는 회의주의가 긍정적으로 작동하려면, 적절한 폭로와 부정적인 제거의 방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안과 새로운 설명모델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굴드는 회의주의가 완벽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도덕성과 결부된 이성적 합리성”(서문)의 양 날개가 조화롭게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이클 셔머는 이 책에서 칼 세이건이 1987년 패서디나에서 했던 강연의 일부를 책의 프롤로그 앞부분에 인용하고 있다. 바로 거기서 칼 세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충하는 두 가지 욕구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앞에 차려진 모든 가설들을 지극히 회의적으로 면밀히 검토하는 것과 아울러, 새로운 생각에도 크게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의에만 머문다면, 여러분은 어떤 새로운 생각도 보듬지 못하게 됩니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비상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될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귀가 가볍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마음을 열면, 그리고 회의적인 감각을 터럭만큼도 갖추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가치 있는 생각과 가치 없는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생각들이 똑같이 타당하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결국 어떤 생각도 타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기에 말입니다.”

-마이클 셔머, <왜 사람들은 이상한것을 믿는가> 4페이지.

칼 세이건은 과학적 회의주의자가 갖추어야할 균형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림출처 https://xbooks.tistory.com/81
칼 세이건은 과학적 회의주의자가 갖추어야할 균형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림출처 https://xbooks.tistory.com/81

 

국내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지적으로 대단한 탄력성을 보여주는 마이클 셔머의 저술과 궤적은, 굴드와 세이건이 말한 회의주의자들이 가져야만 하는 어떤 균형에 대한 감각을 여전히 그가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회의주의자들이 유사과학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여전히 그 존재감을 한국사회에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과학은 신비주의를 제거할 수 있는가

과학적 회의주의를, 유사과학을 제거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이에게 과학과 신비주의의 기묘한 역사적 관계는 부정하고 싶은 역사일지 모른다. 근대과학이 등장하고 나서, 21세기 인류는 과학의 급속한 발전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믿음, 현대 과학기술문명을 거부하는 방식의 자연주의, 고도로 발전한 형태의 신비주의와도 조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과학의 발전은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믿음이나 신비주의 그리고 종교에 대한 인류의 집착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어쩌면 과학의 진보와 유사과학적 현상에 대한 인류의 집착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유사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피해를 과학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려면 우선 과학과 신비주의의 관계를 간략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과학의 선구자들 모두가 철저한 과학적 합리성의 수호자였던 것은 아니다. 역학을 정립해서 천상계와 지상계를 하나의 물리학적 원리로 설명해낸 아이작 뉴턴은 한 평생 연금술에 몰두했고, 심지어 연금술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남겼다. 행성의 타원궤도를 밝힌 케플러는 그 궤도가 신비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고, 과학적 이성의 수호자로 알려진 프랜시스 베이컨은 마술에 뿌리를 둔 힘의 개념을 믿었다. 기체의 법칙을 밝힌 로버트 보일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자신의 작업이 신의 원리를 밝히는 일이라고 믿었고, 떼야르 샤르댕 같은 진화론자나 유전의 법칙을 밝힌 멘델은 아예 직업적 종교인이었다. (서한결. (2009). 과학의 어머니였는가, 이성의 훼방꾼이었는가?-신비주의와 과학, 그 깊고도 오묘한 관계에 대하여. 참고)

 

예이츠 같은 과학사가는 13~14세기 유럽의 마술적 세계관의 확산과 신비주의적 사조가 17세기 과학혁명을 예비했다고 주장한다. 뉴턴의 만유 인력은 연금술적인 원격작용에 기원을 두고 있고, 케플러가 발견한 천체 운동 법칙의 근원에는 자기철학과 물활론이 녹아 있으며, 베이컨의 도구적 자연관은 헤르메스적 마술사의 자연지배 이념이 모태라는 식이다. 근대과학혁명의 원인으로 알려진 수학적 이론과 실험적 증명의 종합조차, 디와 델라 포르타의 비밀 아카데미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신비주의적 흐름이 보여준 역사적 변혁의 끝에 과학이 있다는 것이다.

뉴턴은 근대과학의 창시자이자 마지막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그림출처: LG사이언스랜드
뉴턴은 근대과학의 창시자이자 마지막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그림출처: LG사이언스랜드 http://lg-sl.net/product/scilab/sciencestorylist/IQEX/readSciencestoryList.mvc?sciencestoryListId=IQEX2010100032

 

하지만 예이츠가 탐구한 과학과 신비주의의 역사적 연원은, 사상사를 기반으로 둘 사이의 유사성을 추적한 연구에 불과하다. 같은 방식의 사상사적 추적으로 과학과 신비주의가 적대적 관계임을 보일 수도 있다. 즉, 근대과학이 이룬 과학적 방법론의 승리가 가져온 계몽주의라는 사상적 조류는, 마술과 신비주의에 대한 서구사회의 거부를 불러 일으켰고, 이후 확산된 기계론과 회의주의는 중세의 마술적 세계관을 박살내었다는 식이다. 사상사적으로 과학과 신비주의의 관계를 추적하면, 과학은 신비주의와 대립되지 않는다. 특히 서구의 지적 전통에서 중세-르네상스-근대로 이어지는 흐름은 단절보다는 연속성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기원에 마술적 세계관이 녹아 있다는 역사학적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 주장으로부터 현대과학이 생산하는 지식체계에 마술적 세계관을 녹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발생학적 오류에 불과하다. 현대과학이 작동하는 방식은 근대과학혁명이 발견한 과학적 방법론, 즉 수학적 이론과 실험적 증명의 역동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으며, 언제나 이론이 실험에 의해 제어되는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바로 과학혁명이 얼마나 쉽게 이론, 즉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쿤의 책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읽는다면, 마술적 세계관이 근대과학의 선구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오히려 역사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 또한 그 마술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며, 그들이 창안했던 이론들은 이후 다른 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발견한 사실들에 의해 쉽게 대체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여 마술적 세계관이 근대과학의 이론들에 남아 있었다 해도, 이미 그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거나, 사라지는 중이다. 그것이 과학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세속화시킨다고 할 때의 의미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과학의 시작에는 신비주의적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영향은 이후 근대과학이 걸어간 길과는 무관하다. 둘째, 과학은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제거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과학은 오로지 자연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밝히는데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셋째, 따라서 과학을 신비주의나 유사과학과 싸우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균형을 요구하는 일이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유사과학과 싸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싸움은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주변의 이웃과의 갈등을 풀어내는 것과 더 비슷하다. 왜냐하면, 신비주의와 유사과학을 전파하는 이들 대부분이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이며, 그것을 통해 이익과 권력을 얻는 극소수의 사악한 이들을 제외한다면,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할 이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회의주의자 진영은, 바로 이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성전을 치르고 있다는 착각 속에 서서히 침몰한 셈이다. 

 

과학은 유사과학을 무찌를 수 있는가 - 치료제에서 백신으로

근대과학은 신비주의와 대립하며 발전한 것이 아니다. 근대과학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과학혁명의 시작을 열었고, 이후 재현가능한 측정량을 통해 연구의 영역을 넓혀 나갔을 뿐, 신비주의를 없애버리겠다는 그 어떠한 목표나 기능도 추구하지 않았다. 17세기에는 물리학에 머물렀던 근대과학의 영역은, 복잡한 현상에 대한 측정을 정확하게 만드는 도구들이 발전하면서, 화학과 생물학 그리고 심리학 및 사회현상으로 범위를 확장시켜나갔다. 19세기가 되면 ‘확률혁명’으로 과학적 방법론의 적용범위가 더욱 확대된다. 결국 과학은 끊임없이 과학적 방법론을 정교화시키면서 여러 분야로 과학의 범위를 확장해 나갔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 자체가 유사과학이 되기도 했고 - 예를 들어 나치와 미국의 우생학 - 초끈이론처럼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물리학이 등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국내 과학교양서 시장에서는 대단히 잘 정립된 과학처럼 소개되고 있는 진화심리학은, 마시모 피글리우치 같은 진지한 과학자에게는 유사과학으로 분류되기도 한다(마시모 피글리우치의 책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를 참고). 즉, 과학 내부에서도 과학과 유사과학의 대결은 언제나 진행중이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이 책에서 마시모 피글리우치는 창조과학뿐만이 아니라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도 유사과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이 책에서 마시모 피글리우치는 창조과학뿐만이 아니라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도 유사과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비판한다.

 

철학자들은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문제를 ‘구획문제’라고 부르고 다양한 대답들을 내놓았다. 다양한 이론이 난무하고 있지만, 구획문제는 여전히 철학계의 풀리지 않는 문제로 분류된다. 즉, 과학도 철학도, 유사과학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과학은 이미 그 발전의 과정 속에서 언제든 유사과학을 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고, 철학은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구획문제’라는 현학적인 논쟁만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과학자들은 바로 이렇게 과학과 철학이 처한 곤경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집단이다. 유사과학자들 대부분은, 과학철학이 구획문제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자신들을 유사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교묘하게 진화한 유사과학집단은 현대 과학계가 과도한 경쟁과 상업화에 빠져 만들어낸 왜곡된 학술지 시장에 진입해, 자신들도 과학연구를 수행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사과학을 제어하는 문제는 이처럼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의 싹을 사회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싶어도, 유사과학은 언제든 돋아나는 잡초처럼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 때마다 과학을 이용해서 유사과학을 제거해야 한다면, 우리는 과학을 원래 목적이 아닌 곳에 사용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렇다고 유사과학이 공공의 영역에 들어와 피해를 주는 일에 과학이 무관심할 수도 없다. 과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대적 의미의 신비주의인 유사과학을 상대해야 한다.

유사과학을 제어하는 과학의 이미지는, 이제 치료제 개념에서 백신과 같은 면역 개념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출처: https://takentext.tistory.com/638
유사과학을 제어하는 과학의 이미지는, 이제 치료제 개념에서 백신과 같은 면역 개념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출처: https://takentext.tistory.com/638

 

그동안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은 마치 항암제로 암을 치료하는 방식으로, 과학을 이용해 유사과학을 퇴치하려고 했다. 그런 방식을 위해 회의주의자들은 과학을 결과주의적으로 사용했고, 나아가 과학에 지나치게 큰 권위를 부여해 독단적인 과학주의를 양산했다. 항암제가 암세포만 죽이지 못하듯이, 과학적 회의주의자들 역시 유사과학만 골라 처치하지 못했고, 결국 그 전쟁은 사회에서 여전히 유사과학이 활개를 치는 결과로 나타났다. 과학을 치료제로 사용하려던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나는 과학이 치료제보다는 백신에 가까운 형태로 사용되어야만, 유사과학에 대응하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유사과학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 그건 바로 사회 속에 과학이라는 백신을 더욱 깊고 넓게 확산시키는 일이다. 다음 글에서는 내가 현재 진행중인 와디즈 펀딩이 왜 기존의 과학적 회의주의자들의 방식과는 다르게 유사과학을 더욱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인지에 대해 다루도록 한다.

김우재   Woo.Jae.Kim@uottawa.ca    최근글보기
'초파리 박사'로 유명한 행동유전학자다. 포항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UCSF에서 초파리 행동유전학의 대가인 유넝 잔에게 사사했다. 한겨레 <야! 한국사회>에 6년 동안 칼럼을 쓰고 있으며 <플라이룸>을 출판했다. 오타와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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