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우리안의 중국인 혐오, '130여명 학살'로 이어지다

[김형민의 역사이야기] 만보산 사건과 혐오 발언의 위험

  • 기사입력 2020.01.30 09:16
  • 기자명 김형민

언젠가 딸아이가 누군가를 두고 심각한 험담을 퍼붓기에 유심히 들었더니 이름이 정철이라고 했다. 뉘 집 자식인지 모르나 내 딸을 그리 괴롭힌다니 울화가 치밀어 정철이 그놈 뭐하는 놈이냐, 선생님한테 얘기했냐 하니 딸이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송강 정철 말인데 무슨 소리야 아빠.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이 왕한테 아부를 왜 떨어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냐고오오오.” 음 그러니까 송강 정철의 가사가 국어 시험 범위에 들어가면서 하도 외울 것이 많아 열받은 것이었구나.

하기야 이해가 아니 가는 것이 아니다. 국어 교과서 안의 모든 작품들은 아름다운 시와 향기로운 문학이 아니라 은유법과 직유법을 배우고 도치법과 점층법을 익히고 자음접변과 두음법칙을 외워야 하는 국어 실험 기자재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으니까. 그렇게 교과서에서 배운 소설 가운데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이 있었다. 당시 교과서에서는 ‘조국’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거기서 나는 우리 말 1인칭 대명사로 여(余)라는 말이 있음을 처음 배웠거니와, 그런 잡다한 시험 재료들을 제외하면 그 작품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만주의 조선인 소작농들과 중국인 지주의 대립. 억울하게 맞아죽은 조선인의 원수를 갚고자 하나 누구 하나 앞장서지 않는 무력함 속에서 기생충,인간 쓰레기같은 짓을 일삼던 ‘삵’이라는 별명의 ‘익호’가 홀로 중국인 지주집에 찾아갔다가 역시 맞아 죽는다. 죽어가는 그가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하고 마을 사람들은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른다.

이 작품은 당연히 해방 이후에 발표됐다 여겼는데 국어 선생님이 아니라고 하셨다. 일제 강점기 때 나온 소설이라는 것이다. 1932년.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다. 저자 김동인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가 치도곤을 당했겠구나 싶은 정도로. 그러나 내막은 좀 달랐다. 실제로 만주에서는 조선인 박해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또 국내에 들어와 있던 화교들이 조선인들과 상권(商圈)이나 일자리 경쟁에 나서면서 반중감정은 꽤 심각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동포들아. 우리가 이미 멸망한 민족인가. 생명과 재산을 황포한 불법 수단에 압살을 당하여도 이에 대항할 하등의 힘이 이미 없어지고 말았는지 (중략) 조선총독부는 이것을 방관하고 중국인은 이 방관자를 곁눈질하면서 우리 머리에 매질을 하고 우리 형제에게 악행을 가한다. 우리 스스로가 일어서서 우리의 생명과 우리 재산을 방위하는 방책을 강구하여야겠다.”(동아일보 1927년 12월 9일자, '生存權(생존권)에對(대)한 自衛策(자위책)')는 비분강개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작가 김동인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같은 ‘불온한’ 창가로 치도곤을 맞지 않은 이유는 일본이 이 요즘 말로 ‘반중감정 쩐다’고 할 <붉은 산> 소설에 잘코사니라며 쾌재를 불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나오기 1년 전인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다.)

조선인과 중국인이 사이가 좋으면 안된다는 것이 일본의 속내이기도 했거니와 만주인에게 학대받는 조선인들과 사실상 그를 방관하면서 짐짓 조선인을 보호하는 척 하는 일본 관헌의 구도는 꽤 오랫 동안 남발됐던 일종의 ‘클리셰’였다. 김동인은 여기에 편승했던 것이다. 그의 반중감정은 꽤 오래 됐다. 유명한 소설 <감자>에도 주인공 복녀를 비참하게 죽이는 ‘왕서방’이 등장하지 않던가.

만보산 사건 이후 파괴된 평양의 화교 거리. 1931년 7월. 출처: 위키피디아
만보산 사건 이후 파괴된 평양의 화교 거리. 1931년 7월. 출처: 위키피디아

 

그가 <감자>를 발표한 1925년과 <붉은 산>을 내놓은 1932년 사이에는 우리 역사의 흑역사 가운데에서도 유독 시커멓다 할 사건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1931년 7월 일어난 만보산 사건이다. 현재 중국 지린성 창춘 근처의 만보산이라는 곳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농사를 위해 조선인들이 판 수로가 문제가 됐다. 그 수로 때문에 자신들의 경작지로 흘러 들어가는 물길이 막혔다고 본 중국인들은 수로 공사를 방해했고 중국 관헌도 조선인들을 구속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그런데 일본 측이 ‘일본 제국의 신민’ 조선인들을 보호하겠다고 나서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에 부아가 치민 중국인들은 조선인 정착촌으로 몰려가 수로를 파괴하며 난동을 부렸고 일본 경찰이 출동해서 이를 저지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가 펼쳐진 것이다.

일본 경찰이 총까지 쏘았다니 보통 사안은 아니었지만, 조선인과 중국인 양쪽에 다친 사람이 거의 없어서 별 탈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요인들이 첨부되면서 사건은 기묘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를 이간질해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들려던 일본은 이 사건을 최대한 부풀릴 필요가 있었고 일본은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에게 피해를 봤다’고 선전하며 조선인들의 반중감정에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이에 말려든 것이 <조선일보>였다.

만보산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살상했다'는 기사가 이후 중국인 학살의 도화선이 됐다.
만보산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중국인들이 조선인들을 살상했다'는 기사가 이후 중국인 학살의 도화선이 됐다.

 

창춘에 주재하던 조선인 기자 김이삼은 만보산 현지를 답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관헌의 말을 급보로 송고한다.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명의 동포와 충돌, 조선인 다수 살상, 중국 주재 (일본) 경관 교전 급보로 창춘 주둔 일본군 출동 준비” 등 흡사 전쟁이라도 터진 느낌의 보도였고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며 이 소식을 식민지 조선 전역에 전파한다. 안그래도 만주에서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어떻게 한다는 소식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조선인들은 폭발하고 만다. ‘되놈들이 우리 동포들을 어떻게 했다고?

 

전국 곳곳에서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가던 중국인들은 그야말로 조선인들의 분노 쓰나미에 휩쓸리고 만다. 그해 7월3일 새벽 인천의 차이나타운 거리가 조선인들의 습격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서울,평양 원산 등 전국적으로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피해가 극심했던 곳은 평양이었다. 7월5일 시민 수백명이 중국 요리집 동승루를 공격하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차차 모여드는 군중들이 합세하야” 늘어난 군중은 중국인 가게와 거주지를 습격했다. 1931년 7월7일자 〈동아일보〉는 “평양 부내에 사는 중국인 476호는 거의 전부 습격을 당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목격담을 더 들어 보자.

 

“역사로서 자랑삼는 평양에 기록이 있은 이래로 이런 참극은 처음이라 할 것이다. 미의 도 평양은 완전히 피에 물들었다. 우리가 인류사를 뒤져서 문야의 별이 없이 피 다른 민족의 학살극을 얼마든지 집어낼 수가 있다. 그러나 유아와 부녀의 박살 시체가 시중에 산재한 일이 있었던가. 나는 그날 밤 발 밑에 질적거리는 피와 횡재한 시체를 뛰어넘으며 민족의식의 오용을 곡하던 그 기억을 되풀이하여 (내 비록 늙어 망녕이 들어도 이 기억은 분명하리라.) 검열관의 가위를 될 수 있는데까지 피하면서 거두절미의 회고록을 독자 앞에 공개한다.”

-오기영, 평양폭동사건 회고 재만동포문제 특집, 동광 제25호

 

아이와 부녀자 가리지 않고 학살하는 것은 항상 ‘일본군’이었고 ‘피 다른’ 민족의 피로 축제를 벌인 건 관동대지진 때의 일본인들로만 알았는데 만보산 사건에서 조선인들의 살육 실력(?)은 일본인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오기영은 여기서 ‘민족의식의 오용’, 즉 잘못 사용된 ‘민족의식’이 낳은 비극에 통곡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 민족’임에 더하여 다른 민족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얹어졌을 때 민족의식이란 곧 악마의 뿔보다 더 날카롭고 짐승의 이빨보다 더 강력한 야만의 칼로 변했다. 평양 시내의 학살자들은 저마다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들의 복수를 외쳤을 것이고 조선인들을 학대한 중국인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며 휘두르는 몽둥이에 손독을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멸시가 있었다.

나라 잃은 백성 주제에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에 대해 우월감을 꽤 강력하게 지니고 있었다. “어느 공원을 가든지 문에는 인도인과 중국인 순사가 섰다. 중국인은 들이지 아니한다. 중국인 특권이 있는 사람은 잔디밭 가꾸는 노동자와 백인 아이의 유모차를 끄는 늙은이 뿐이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4일) “중국인을 연상할 때에는 반드시 아편을 연상케 되며, 아편을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중국인을 연상하리만치.....”(동아일보 1925년 5월 3일) “우리는 중국사람이라 하면 더러운 것과 푸른 옷을 먼저 상상한다.” (1926년 3월 1일 동아일보) “사람으로서의 체면유지라든가 위생사상으로부터 따진 생활법이란 것은 털끝만큼도 생각지 아니한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4일) 잠깐만 검색해 봐도 당시 사람들이 중국인들에 대해 지녔던 편견의 덩어리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이런 편견들은 결국 스스로를 악마로 만들었다.

“유방이 양쪽으로 잘려나가고 임산부도 참혹하게 살육당했으며 심지어 땅바닥에 엎어져 우는 화교 또한 밟혀 피떡이 되었다.” (1931년 일제강검지의 화폭동과 화교, 중국근현대사연구 41, 손승희) 이쯤 되면 화교들이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7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라고 노래해도 무방할 정도의 잔인성이다.

단 하룻밤 사이에 130여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전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밀려난 적이 없다는 화교들이 이 사건 이후 대거 조선을 떠났을 만큼 공포는 컸다. 반화교 폭동 중에서도 잔인함이 최악으로 치달았던 평양 시내에는 작가 김동인도 있었다. 그의 화교 학살 현장에서의 목격담은 매우 무표정하고 건조하다. 그 중의 일부.

“한 사람의 중국인이 수만 명의 흥분된 군중 가운데 뛰쳐들었다. 그가 뛰쳐든 곁에는 마침 다행히 순사가 한명 있었다. 왁하니 중국인에게로 몰려드는 군중을 제어하는 순사가 그 중국인을 보호하려 할 때에, 중국인은 어디서 주웠는지 돌맹이 한 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겨냥을 하는 것이었다. 미상불, 그는 너무 큰 공포 때문에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단 한 개의 돌멩이를 가지고 수만 명의 군중을 대항하려는 이 중국인의 행동은 성한 사람의 일로는 볼 수가 없다. ” 과연 그 현장에서 이성을 잃었던 것은 누구였을까. 조선인들이었을까. 김동인이었을까. 이름 모를 중국인이었을까.

이렇듯 김동인은 중국인 포목상 파괴 현장에 있었고 누군가 비단을 찢으라고 강요하자 자신도 엉겁결에 그렇게 했노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역시 그곳에도 목격자가 있었다. 김동인의 이복형 김동원의 사위였던 화가 김병기. 그의 눈에 띈 김동인은 이랬다. “중국인 소유의 도매상 태안양행도 습격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 현장에 김동인도 있었다. 그는 광목을 찢으면서, ‘이놈들 나쁜 놈이야’, 마치 중국인에게 복수하려는 듯 분노를 표시했다. 화교 집들은 모조리 폐허가 돼버렸다.” (한겨레 2017년 4월 19일자 “김동인 자서전에 ‘한량 케이’가 바로 부친 김찬영”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김동인(맨 왼쪽)은 동인문학상으로 유명한 소설가지만 1931년 중국인 학살 사건에 참여한 과거를 갖고 있다.
김동인(맨 왼쪽)은 동인문학상으로 유명한 소설가지만 1931년 중국인 학살 사건에 참여한 과거를 갖고 있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사실 적다. 나찌 치하의 독일인들도,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터키인들도, 심지어 관동대지진과 남경대학살의 일본인들도 하나 하나 뜯어보면 그리 나쁜 사람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포는 잘못된 정보와 오해의 늪에 빠지면 혐오라는 괴물로 재탄생하고, 이 괴물은 그때껏 내부에 쌓여 있던 편견을 끌어모아 녹인 쇳물을 특정 대상을 향해 내뿜게 된다. 우리는 그 괴물과 인연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상은 인연이 있다. 1931년 7월,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동인문학상’의 주인공 조선일보와 김동인 역시 그 괴물의 하나였다.

오늘 아침 이런 카톡을 받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단톡방 세 군데에 올려졌다. 이 카톡을 읽으며 나는 악마가 준동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차한 설명 없이 그 내용을 옮기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언론미노출

코로나바이러스 폐렴 때문에 중국당국은 우한지역 봉쇄 폐쇄령, 근처 13개 지역 폐쇄 접근금지

중국인 탈출행렬 가속화 우한지역 후베이성에서만 500만명 탈출 폐쇄령이후 30만명 추가 탈출도만 사실상 베이징 상하이도 봉쇄된듯

확진자 집계 불가 대략 9만명이상 확진판정 뉴스에 공식발표는 1300여명 축소발표

사망자는 1분에 1명꼴로 길거리에서도병원에서도 쓰러지고 대응체계 마비로 시체들도 방치되는 상황이라는 병원소식 사망자 계속늘어가는중 2차 돌연변이까지 보이는 상황

일주일내 상하이까지 통제불능 될 전망 실제 현지 상황은 대재앙 중국당국에서 통제불능한 상황 언론에 숨기는중

우한지역 상류층 주민 6100여명 인천공항 입국 전세계로 출국행렬 해열제 7-8알 섭취후 공항검열 통과

중국 시내는 현재 마트 약국 물건이 동이난 상황 중국언론은 억제중”

김형민   contact@newstof.com    최근글보기
필명 산하로 알려져 있다. 글을 맛깔나게 써서 팬이 많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1995년부터 방송 프로듀서로 일하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다수의 매체에 역사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10여권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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