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동아 100년] '태생적 친일신문' 조선·동아의 탄생

  • 기자명 자유언론실천재단
  • 기사승인 2020.02.2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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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재단은 20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100년에 맞춰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내용을 뉴스톱에 칼럼으로 기고합니다.

1920년 3월 5일자 조선일보 창간호는 일부 지면만 전재히고 있으며 3월 9일 지령 3호가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1920년 3월 5일자 조선일보 창간호는 일부 지면만 전재히고 있으며 3월 9일 지령 3호가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01. ‘태생적 친일신문조선일보

조선일보는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20년 3월 5일 창간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에 견디다 못한 우리 국민 약 2백만 명이 총궐기한 사건이었다. 이에 놀란 일제 총독부는 방침을 바꾸어 무단 통치를 더 이상 고집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문화통치로 방침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한 비밀결사와 지하신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활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제는 한말에 활발하게 애국운동을 벌이던 여러 민간 신문들을 모조리 폐간시켜버렸는데, 3.1운동을 계기로 이런 민간 지하신문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하여 그 수가 50여 종에 이르렀으며, 나중엔 온 치안력을 동원해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전국이 지하신문의 발행지요 배포지대가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자 일제당국은 이런 저항운동을 회유하여 식민지체제 내로 유도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문화통치요 식민지동화정책이었다. 날로 심화돼가는 식민지 수탈로 악화돼가는 민심을 회유하고 민족해방투쟁의식을 마비시키거나 오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정책을 선전할 필요를 느껴 조선인신문을 허가하게 된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서 친일 경제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주도아래 예종석, 조진태, 민영기 등 친일행위로 돈을 번 자들이 조선일보를 만들고 경영했다. 그러다가 1921년 4월 8일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 송병준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1924년 9월 13일 민족주의자 신석우가 경영권을 인수한 후엔 이상재, 안재홍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경영과 편집을 맡으면서 민족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물러난 뒤 1920년대 후기부터는 일본제국주의 정책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조선일보는 일제가 제시한 문화주의, 산업 주의, 교육진흥, 실력양성주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랐다. 이는 일제가 무장항일운동 같은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온건한 타협노선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는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조차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1930년대 초부터 일제의 검열당국과 ‘밀월관계’를 계속하면서 점점 더 일제에 협력해 갔는데, 1933년 3월 방응모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한 후부터는 그 친일행태가 더욱 노골적인 것으로 되어갔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부터는 더욱 열렬하게 일본제국주의를 지원하여 조선 민중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모는 반민족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호.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호.

02. 일제의 문화정치와 동아의 문화주의

1919년 제3대 조선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문화정치’라는 새 간판을 들고 나왔다. 3ㆍ1독립운동에서 표출된 우리 민족의 항일의지에 놀란 일제는, 조선 강점 이후 지속해온 무단통치만으로는 더 이상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 문화정치라는 유화책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한마디로 문화정치는 3ㆍ1독립운동 이후 한껏 고양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약화시키고, 실력양성주의라는 체제 내 개량주의로 끌고 가려는 교활한 식민지 통치정책이었다. 일제의 민간신문 발행 허가는 이러한 문화정치의 핵심 사업이었으며, 동아ㆍ조선의 창간은 그 문화정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선총독부의 야심작이었다.

창간 초부터 이들 두 신문은, 간혹 총독부의 눈에 거슬리는 기사와 논설을 싣기도 하였으나, 우리 민중의 항일의지를 꺾고 우리 민중을 ‘생활에 충실’한 소시민으로 안주시키려는 총독부의 ‘문화정치’ 의도를 충실히 대변했다. 

특히 동아일보는 ‘문화주의’를 세 가지 사시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는데, 그 문화주의의 핵심이 “민족적으로 생활 충실을 기도하는 것”이라고 밝혀 동아의 문화주의가 총독부 문화정치의 목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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