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동아 100년] '자발적 폐간' 조선일보, 복간때 어떤 사과도 안해

  • 기자명 자유언론실천재단
  • 기사승인 2020.04.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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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재단은 20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100년에 맞춰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내용을 뉴스톱에 칼럼으로 기고합니다.

31. 동아일보 복간, 친일부역 사죄는 없었다…친일 덮기 위해 반공 앞세워 한민당 창당

동아는 1940년 8월 11일 일제의 전시체제에 따라 폐간당한지 5년 4개월만인 1945년 12월 1일자로 복간호를 냈다. 11월 23일 복간한 조선일보보다 8일 늦었다. 동아는 12월 12일자 중간사(重刊辭)에서 1920년 창간 당시의 3대 사시 1) 민족의 표현기관 2)민족주의 3)문화주의를 그대로 이어간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제 치하에서의 친일, 황군찬양, 독립운동 비 하-비난 등 부끄러운 과거에는 반성 한마디 없이 침묵했다.

조선 민족은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일제에 ‘자치를 청원해서 영원히 식민지로 살아남아 야 한다’고 주장한 사설, 1930년대 일제의 중국침략전쟁 시기에 그를 찬양 한 무수한 사설,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일본 노예제국을 찬양한 기사와 사설 등에 대해 한마디 사죄도 반성도 없는 이른바 중간사(重刊辭)를 냈다. 이 신문이 그 뒤로도 이 민족의 내일에 어떤 패악을 저지를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다시 거짓과 배신이 잇따르리라는 전주곡이었다.

동아일보는 광복 후에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등 자사 경영진을 주축으로 내세워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했다. 한민당의 유일한 명분은 반공이었다. 친일의 오욕을 덮기 위한 반공이었다.

 

조선일보 1945년 11월 23일 복간호 일부.
조선일보 1945년 11월 23일 복간호 일부.

 

32. 일제하 반민족행위에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은 조선일보 속간사

1945년 11월 23일 조선일보 복간호가 발행되었다. 조선일보는 속간사에서 “총독부의 횡포 무쌍한 탄압에 의하여 눈물을 머금고 강제폐간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나 1940년 8월 10일자 1면에 사설로 실린 ‘폐간사’에서 는 ”조선일보는 신문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고 머리에서 밝혔다. 저항의 폐간이 아니라 순응의 폐간이란 점은 이후 조선일보 사장이던 방응모가 경영하면서 친일에 적극적이었던 ‘조광’의 행적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조선일보는 속간사에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살아 있는 신’으로 대접받던 ‘천황폐하’에게 극도의 아부와 찬양을 한 일과 중국침략전쟁을 비롯한 동아시아 ‘정복’을 정당화 했던 친일사실에 대해 먼저 민족 앞에 참회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으나, 단지 신문의 재발행이 늦어지게 된 점을 ‘3천만 동포앞에 깊이 사과’했을 뿐이다. 속간사는 폐간 이전의 사시(社是)인 ‘정의 옹호’, ‘문화건설’, ‘산업발전’, ‘불편부당’을 그대로 이어가겠다고 함으로써 새로운 독립국가 아래서의 자주적 국가건설에 걸맞는 사시보다는 이전 식 민지강점기 아래서의 가치관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조선일보의 본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정의옹호’와 ‘불편부당’ 이란 사시는 해방이후에도 끊임없이 수구(守舊)를 옹호하고 진보 세력에 대해 음해와 공격을 계속함으로써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오늘날까지 보여주고 있다.

또한 조선일보는 속간사에서 조선일보가 ‘군정청의 우호적 지지와 이해있는 알선에 의해서’ 속간된다고 밝힘으로써 앞으로의 행보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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