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동아 100년] 제주 4.3항쟁을 폭동으로 보도한 동아

  • 기자명 자유언론실천재단
  • 기사승인 2020.04.06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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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재단은 20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100년에 맞춰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내용을 뉴스톱에 칼럼으로 기고합니다.

 

35. 대구 10월항쟁을 ‘소동’으로 보도한 동아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식량난, 일제출신 경찰에 대한 반감으로 항쟁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10월 3일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대구 중심으로 파업단 소동 / 경찰서 습격 점거 / 경북 일대에 삼엄한 계엄령’ 제목의 사건 경위를 보도했다. 대구 일원에서는 4월부터 대기근이 시작된 데다 콜레라마저 창궐, 1천여 명이 사망하고 6월에는 수해까지 발생했는데도 미 군정은 시민들이 쌀 배급을 요구하자 외면하는 등 무책임한 태도를 보여 분노를 샀다. 10월 1일 파업노동자들과 부녀자들이 시위를 시작하고 경찰과 충돌했는데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시위 군중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동아일보는 대구 민중의 봉기원인이 식량난과 미군정의 무책임한 대응, 시위군중에 대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과 발포, 특히 친일 경찰에 대한 민중의 증오였다는 사실은 전혀 보도하지 않은 채 미군정의 명령에 따르는 경찰 사망자 등 공직자의 피해에만 초점을 맞췄다. 10월 5일자 2면 ‘경관 사망자 53명 / 폭민(暴民) 중 피검은 202명 / 통영, 마산 등지에도 또 소동’

10월 6일자 2면 머리기사 역시 철저히 미군정의 관점을 대변했다. ‘전율할 영남소동의 그 후 소식 / 영동경찰서를 습격 / 대구에서의 탈옥자 1 백여 명 / 소살(燒殺) 직전에 경관 구출 / 봉기된 영남 일대의 소동 경위’ 등으로 제목을 달았다.

 

1948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 제주 4.3사건을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1948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 제주 4.3사건을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36. 제주 4.3항쟁을 ‘폭동’으로 보도한 동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경 제주도에서 뒷날 ‘4.3 항쟁’이라고 불리게 될 사건이 터졌다. 발단은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장에서 벌어진 주민 시위사건에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고 8명이 중경상을 입은 데서 시작됐다.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는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 경관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원 2명이 사망했다. 4.3항쟁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되기까지 6년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되면서 민간과 경찰-군대 양측에 3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사흘 뒤인 4월 6일자 2면 하단에 ‘4일 제주도서 / 총선거 반대 폭동 / 사상자 12명 발생’으로 단지 몇 줄을 보도했다. 동아는 7일자에도 현장취재 기사는 전혀 없이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발표한 ‘제주폭동 사건의 진상’을 그대로 실었다.

‘제주도 폭동 사건 / 인명 사상 53명 / 방화, 통신 절단 / 조 경무부장 진상 발표’

동아일보는 4월 17일자에 ‘제주 폭동’기사 ‘제주도에 무장한 폭도 / 게릴라전 전개 / 경찰은 교통 차단코 만전의 포진’을 2면 머리에 올렸다. 그 기사도 현지 취재가 아니라 ‘출처 불명’의 내용뿐이었다.

남한 단독총선거를 사흘 앞둔 5월 7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제주도 폭동 현지 답사’라는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피의 제장(祭場)으로 변모한 / 남해의 고도 제주 / 평화스런 낙토에 파괴책동의 선풍’이 그 기사의 제목 이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연대장 송요찬)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 계획’을 채택했다”고 쓰고 있다.

4.3 항쟁은 남조선 단독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 제주도 지부의 무장폭동으로 촉발된 것이 사실이지만 미군정이 동원한 경찰, 군대, 서북청년단 등이 무고한 양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자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분노한 지역민들이 저항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민중항쟁이 되었다.

1948년 10월 22일 ‘여순 사건’을 첫 보도한 동아일보의 제목은 ‘일부 군부대 반란 소요 / 공산계열과 극우분자도 책동 / 반군이 여수-순천 점령 / 양민과 경관을 학살 / 21일 이후 점차로 진정 / 광주 남원선 이남에 / 반도를 포위 소탕 / 이 국방부장관 전투경과 발표 / 가증(可憎), 14연대장 등 흉모(凶謀)’였다. 10월 15일 육군사령부가 14연대 1개 대대를 폭동이 계속되고 있는 제주도 파견을 명령했다. 여순 사건을 주동한 14연대의 김지회와 지창수 등이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무고한 양민들을 살상하라는 의도로 해석했다. 그들은 제주진압군으로 가는 길보다는 ‘봉기’ 또는 ‘반란’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경찰보다 차별받고 있다고 억울해했고 반감이 강했다.

10월 24일자부터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보성-광양에 반군 6백 / 여수-순천은 완전 탈회(奪回) / 항공대, 함정도 긴밀 행동 중’ ‘반군은 지리멸렬 / 포로 6백/계속 투항 중 / 총참모장 담’ ‘반란군에 고함 / 국방장관이 투항 엄명’은 국방부 발표를 그대로 인용했다. 여순 사건이 터진 지 열흘이 가까워지도록 국방부를 비롯한 ‘당국’의 발표만 받아쓰던 동아일보는 10월 20일자 2면 머리기사에 현지파견 기자의 기사를 실었다. ‘대중 그 속에 적이 있다 / 명기(銘記)하라 참화의 결과 / 시산(屍 山)의 순천, 반군의 행패 전모 / 순천에서 본사 특파원’ 기자는 현지의 대동청년단장, 순천군수, 순천읍장 등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순천에서 벌어진 격전의 ‘실상’을 전함으로써 취재가 편향적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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