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동아 100년] 진압군 학살은 외면한 조선의 '여순사건 보도'

  • 기자명 자유언론실천재단
  • 기사승인 2020.04.0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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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재단은 20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100년에 맞춰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내용을 뉴스톱에 칼럼으로 기고합니다.

 

37. 제주 4.3 사건 진압 ‘태도의 온당함’을 주장한 조선일보

제주 4.3사건에 관해 군정청의 발표만을 전재하던 조선일보는 4.3사건이 일어난 지 2개월 2일 만인 6월 5일에 되어서야 처음으로 사건에 관한 사설을 내보냈다. 이 사설에서는 4.3사건이 크게 확대된 주원인을 제주도민의 특수한 ‘척분관계’에서 찾고 있으며 진압군인 육해경비대가 “동족상잔의 애사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은인자중” 하면서 “사살주의”가 아니라 “생금위주”를 원칙으로 삼았다고 “태도의 온당함“ 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후의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펴낸 진상보고서의 결론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조선일보 1948년 10월 28일 '반란의 속보를 듣고'
조선일보 1948년 10월 28일 '반란의 속보를 듣고'

 

38. 진압군의 ‘학살’과 인권유린 외면한 조선일보의 여순사건 보도

정부 수립 두 달 남짓 만인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서 남녘을 피로 물들이는 사건이 터졌다.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의 남로당 소속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 등은 제주도에 가서 ‘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이행하는 대신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반란군은 여수에서 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여 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 위원장, 경찰서 후원회장 등 우익계 사람들과 그 가족 70여명을 살해했다. 10월 22일까지 전남의 7개 군 전체와 3개 군의 일부가 반란군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정부는 22일 여수와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조선일보의 10월 22일자 2면 머리기사는 “국군 일부 전남서 반란 / 좌익과 합세 2천여 명 / 치안은 불원간 회복을 확신 / 반란사건 전모 이 총리가 발표”였다. 이범석 총리의 ‘발표’에는 구체적인 동기가 드러나 있지 않다. 조선일보는 다른 언론사와 달리 10월 20일 현지에 기자를 파견해 10월 29일자 기사를 쓰는 등 가장 적극적인 보도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보도했다는 사회부 유건호 기자의 현장 기록은 동족 상잔의 원인과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으며 “빤쓰만 입은 채로” 수색을 당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기술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지면에 “중학생도 합류 / 경찰관은 거의 다 피살”, “15명 총살 집행 / 전 읍민이 모인 국민교정서” “전북에까지 소요 파급 / 국군의 포위 진압은 시간문제”라는 기사도 있었지만 대체로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반란 진압에 초점을 맞 춘 내용들이었다.

10월 28일자에서 ‘여순 사건’에 관한 사설을 처음으로 올렸다. 이 사설은 순천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실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잔학의도가 지나치고 살상수가 너무나 큰’ 원인을 ‘반군이 점령 직후 저항력이 약한 경관 또는 우익단체 등 다수의 민중을 학살한’ 데 있다고 단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순사건’ 이래의 전문가들이 연구 발표한 자료나 외국인 기자의 보도는 반란군과 동조자들의 살육이나 ‘인민 재판’에 비해 진압군의 ‘학살’과 인권유린이 훨씬 가혹했음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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