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에서 벌어진 소녀 실종사건,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0.04.2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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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내일도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단 말인가?

폭탄 한 개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악인』, 『퍼레이드』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단편소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약속의 땅’은 사람들에게 차별받으며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방인, 고지(아야노 고)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악인』, 『퍼레이드』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단편소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약속의 땅’은 사람들에게 차별받으며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방인, 고지(아야노 고)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필자 자신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으로 지금까지 혜택을 보고 있는 번역 작가지만, 편집자들의 네이밍 감각에 감탄할 때가 많다.

예컨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독일어 원제는 『백장미(Die Weiße Rose)』이다. 작가인 잉게 숄이 자신의 두 동생, 죠피 숄과 한스 숄이 나치에 맞서 조직한 비밀결사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딱히 와 닿지 않는다. 원서가 출간된 지 14년 뒤 한국어판이 나올 당시 출판사가 붙인 제목이 훨씬 낫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특히나 인류사회가 직면한 재난의 국가별 희생자 수를 무슨 패럴림픽 메달순위처럼 떠들어대는 보도가 심심찮게 보이는 요즈음엔 더더욱.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약속의 땅>을 보는 내내, 필자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것도, 근 20년 전, 학위논문을 쓸 시간까지 깎아 먹어가며 탐독했던 이 책의 타이틀이다.

전주국제영화제를 필두로 하는 한국의 주요 국제영화제를 통해 역량을 인정받아온 거장, 제제 타카히사 감독은 세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약속의 땅’으로 감독데뷔 30주년을 맞았다.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를 필두로 하는 한국의 주요 국제영화제를 통해 역량을 인정받아온 거장, 제제 타카히사 감독은 세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약속의 땅’으로 감독데뷔 30주년을 맞았다.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악인』,『퍼레이드』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단편소설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약속의 땅>은 사람들에게 차별받으며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방인, 고지(아야노 고)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약속의 땅’에서 재활용품을 팔아 생계를 꾸리던 그는 어느 날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다. 마을에서 일어난 소녀 실종사건의 범인이라는 의심의 눈초리 때문이었다. 오해를 풀어보려는 어눌한 말투가 무색한 속도로 퍼져가던 증오. 그는 끝내 극단적 선택으로 삶을 마감한다. 중반부터는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실종사건 직전까지 현장에 함께 있었던 보오(스기사키 하나)와 그 일로 손녀를 잃은 할아버지(에모토 아키라), 상처의 슬픔을 딛고 겨우 새 삶을 시작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으로 파국을 맞게 되는 또 한명의 사내(사토 코이치).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 세상 어디에도 낙원은 없지만, 희망마저 포기한다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그간 한국의 주요 국제영화제를 통해 역량을 인정받아온 거장(전작인 <국화와 단두대>로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에서 브라이트이스트필름 어워드를 수상했다)이자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제제 타카히사 감독은 세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약속의 땅>으로 감독데뷔 30주년을 맞았다. 교토대학교 문학부 철학과 시절부터 비디오카메라로 독립영화를 제작해 온 그는 코리언뉴웨이브 영화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누누이 언급하는 한국영화 팬이기도 하다.

올해 환갑을 맞는 거장과 절망의 극한에서 마주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약속의 땅’의 이야기는 요시다 슈이치 『범죄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소설 중 두 편을 추려 재구성한 것. ‘갈림길’과 ‘한계 취락’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누군가를 잃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약속의 땅’의 이야기는 요시다 슈이치 『범죄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소설 중 두 편을 추려 재구성한 것. ‘갈림길’과 ‘한계 취락’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누군가를 잃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홍상현

데뷔 30주년을 맞는 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셨다. <국화와 단두대>에 이어 2년 연속 초청이라 더 감회가 깊으실 텐데.

제제 타카히사

너무 기쁘다. 한국 영화를 워낙 좋아할뿐더러 창작자로서 많은 자극을 받고 있다. 더욱이 부산은 한국영화의 메카 아닌가.

 

홍상현

워낙 다양한 장르의 필모그래피를 자랑하시지만 특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문 차일드>다. 연민을 자아내는 뱀파이어 주인공이 끝내 자살을 택하는 내용이었다. 6년 뒤에 나온 박찬욱 감독의 뱀파이어영화 <박쥐>를 연상시키는.

제제 타카히사

가장 수월하게 접할 수 있는 장르가 드라마. 반대로 제일 힘든 장르가 호러다. 언급하시는 작품도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무섭게 묘사되어야 할 괴물에게 감정 이입이 되더라, ‘괴물도 이렇게 고뇌하고 있구나’하고. (웃음) 그러니 관객 입장에서 무서울 리 있었겠나.

‘약속의 땅’이 끝나자마자 원작자인 요시다 슈이치는 제제 타카히사 감독에게 “그(고지로 분한 아야노 고)가 예수처럼 보인다”는 말을 건넸다고. 극중에서 고는 사람들의 미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다 끝내 스스로를 희생한다.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약속의 땅’이 끝나자마자 원작자인 요시다 슈이치는 제제 타카히사 감독에게 “그(고지로 분한 아야노 고)가 예수처럼 보인다”는 말을 건넸다고. 극중에서 고는 사람들의 미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다 끝내 스스로를 희생한다.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그래도 ‘정형성의 탈피’라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수월하게 접할 수 있었다”는 건, 역시 좋아하기 때문이겠지

제제 타카히사

그렇다. 하지만 선후가 있다. 우선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바로 그 ‘사람’을 그려내는 작업이 좋다.

 

홍상현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이번 초청작 <약속의 땅>까지 아우르는 공통점 하나가 발견된다. 대부분 지방의 중소도시가 무대라는 점.

제제 타카히사

제가 오이타 현 출신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고향마을은 고령화 비율이 50퍼센트를 넘어 조만간 공동생활 자체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이른바 ‘한계 취락' 이다. <약속의 땅>의 공간적 배경과도 닮았다. 한 20ㆍ30년 전부터 지방은 어디든 비슷해졌다. 사람들이 국도변의 대형 할인점을 찾게 되면서 역 앞의 가게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었다. 어디나 을씨년스런 풍경이 펼쳐지게 된 거다. 이러 주제를 다룬 영화를 찍고 싶다는 바람이 늘 있었다. 세상의 풍경은 얼핏 균질해 보이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보면 수많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영화적 서사를 구성하면서 제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일합작 영화 ‘케이티’에서 김갑수와 공연하기도 했던 사토 코이치는 ‘약속의 땅’에서 상처의 슬픔을 딛고 겨우 새 삶을 시작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으로 파국을 맞게 되는 사내의 모습을 특유의 중후한 연기로 그려낸다.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한일합작 영화 ‘케이티’에서 김갑수와 공연하기도 했던 사토 코이치는 ‘약속의 땅’에서 상처의 슬픔을 딛고 겨우 새 삶을 시작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으로 파국을 맞게 되는 사내의 모습을 특유의 중후한 연기로 그려낸다.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약속의 땅>의 원작자 요시다 슈이치는 『악인』, 『분노』등의 작품이 번역ㆍ출판되어 한국에도 팬이 많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원작이 제제 타카히사라는 거장을 만나 보다 특별해졌다고 생각한다.

제제 타카히사

“감사합니다.”(웃음) <약속의 땅>의 이야기는 요시다 슈이치 『범죄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소설 중 두 편을 추려 재구성한 것이다. 몇 가지 설정을 가져왔다. 일단 ‘갈림길’과 ‘한계 취락’이라는 상징적 공간이 그렇다. 거기 누군가를 잃고 남겨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 친구의 실종사건을 경험한 여성, 그때 사라진 손녀를 보내지 못하는 할아버지,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고지와 배우자를 잃고 부친마저 세상을 떠난 사내. 서로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장소와 감정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홍상현

몇 가지 설정만을 가져와 만들어낸, 전혀 새로운 이야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국화와 단두대>와 마찬가지로 비극적 연출이 돋보이는 한편, 인간의 추악함에 대한 통찰력에도 소름끼칠 만큼 공감했으니까. 이런 극단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작가로서의 에너지’는 어디서 오나.

제제 타카히사

사람에게는 양면이 있다. 흔히들 ‘좋은 면과 나쁜 면’이라고 부르는. 하지만 완전한 선인과 악인은 없으며, 둘 다 가지고 있으니 인간인 것이다. 제 필모그래피 중에 범죄사건을 다룬 작품들이 꽤 있는데 대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내용이다. 인간이 가진 넓은 진폭은 신기하고도 재미있다. 관객은 일상에서 흔히 접하기 힘든 감정에 움직인다. 이는 제가 평소 생각하는 영화적 재미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옴니버스영화 ‘10년’을 통해 한국 극장가에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던 스기사키 하나. 제제 타카히사 감독은 그에 대해 “부드럽고 앳되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무척 강단 있는 배우”라 평했다.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지난해 12월 개봉한 옴니버스영화 ‘10년’을 통해 한국 극장가에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던 스기사키 하나. 제제 타카히사 감독은 그에 대해 “부드럽고 앳되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무척 강단 있는 배우”라 평했다.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홍상현

<약속의 땅>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지극히 평화로워 보이는 커뮤니티에서 이질감을 느끼다 파멸하는 사람들.

제제 타카히사

남성들은 일견 여성들에 대해 상냥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을 몰아붙인다. 여성들은 힘겨워하며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물론 굴하지 않고 이겨내는 사람들도 있다. 저는 그런 캐릭터에 매력을 느낀다. 아울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지만 내면에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언제나 무언가를 찾고 있는 인물도 제 영화적 기호의 대상이다.

 

홍상현

<64 전후편> 등을 통해 한국 관객에게 얼굴이 알려진 아야노 고의 존재감이 돋보인다.

제제 타카히사

영화가 끝나자마자 원작자인 요시다 슈이치가 제게 겐넨 말이 “그가 예수처럼 보인다”였다. 일리 있다. 결말부에 면류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사람들의 미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다 끝내 스스로를 희생하니까. 인터뷰어께서도 모두의 삶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인물상에서 크리스트교의 구세주 같은 느낌을 받으셨나 보다.

몇 번의 플래시백 장면에 등장할 뿐이지만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임팩트를 남기는 이시바시 시즈카. 아니나 다를까 그가 분한 인물은 “이제는 멀리 있으니 세월의 때가 묻을 수도 없는. 천사와 같은 존재”이다.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몇 번의 플래시백 장면에 등장할 뿐이지만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임팩트를 남기는 이시바시 시즈카. 아니나 다를까 그가 분한 인물은 “이제는 멀리 있으니 세월의 때가 묻을 수도 없는. 천사와 같은 존재”이다.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홍상현

그렇다. 사라진 아이가 그에게 꽃으로 된 면류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감정이 북받쳐 올라올 정도니까.

히로인으로 분한 스기사키 하나의 연기도 <10년>에서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느낌이다.

제제 타카히사

배우에게 지나친 디테일을 요구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힘든 면도 있겠지만, 창의성을 발휘해 촬영에 임해주었다. 치열한 사고의 흔적이 영화에서 배어나오지 않나. 저는 이 지점에 큰 매력을 느낀다. 배역에 대한 해석과 연기자의 고뇌가 부딪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일면 다큐멘터리적인 특성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똑같은 신을 촬영하더라도 어제 찍은 촬영분과 오늘 찍은 촬영분이 같을 수는 없잖은가. 스기사키 씨는 부드럽고 앳되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무척 강단 있는 배우다. 고민거리를 던져 미안했지만 애초에 상정했던 목표 이상의 결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해주신데 감사한다.

 

홍상현

이시바시 시즈카가 분한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귀농해 새 인생을 시작하려는 사내가 순간순간 떠올리는, 죽은 아내.

제제 타카히사

특히 어떤 장면이 좋았나.

‘대배우’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은 관록의 에모토 아키라는 어느 날 일어난 실종사건으로 손녀를 잃은 할아버지를 연기했다. 그의 캐릭터는 ‘한계취락’이라는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대배우’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은 관록의 에모토 아키라는 어느 날 일어난 실종사건으로 손녀를 잃은 할아버지를 연기했다. 그의 캐릭터는 ‘한계취락’이라는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홍상현

차 안에서 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제제 타카히사

(미소) 아내가 말하지 않나. “개를 기르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빵집을 하시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어. 그리고 데려오려던 그 아이가 죽어버렸지. 애초에 당신이 키우려고 했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라고. 이 부분은 <약속의 땅>의 주제와도 맞물린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 회한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이시바시 씨 자신 세상에 대해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거니와 이 인물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제 나름의 의도가 있었다. 이제는 멀리 있으니 세월의 때가 묻을 수도 없는. 천사와 같은 존재.

 

홍상현

전반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결말부에 보오와 그 남자친구의 모습에 희망의 여지를 남겨둔 게 좋았다. 이는 <약속의 땅>이 전작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한데,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었나.

제제 타카히사

전후 민주주의 체제인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노라면, ‘실로 말도 안 되는 시대다’싶을 때가 있다. 젊은 날의 우리가 그린 미래가 과연 이런 것이었나 싶은 사람도 적지 않겠지. 하지만 다시 새로운 희망을 찾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막연한 낙관론이 아니다. 시련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우리가 지향해야할 미래가 있음을 알리는 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니까.

인류는 스스로의 판단에 근거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더러 오류도 범하지만 이내 바로잡을 수 있는 것 또한 그 때문이리라. 그렇게 사회적 거리두기가 공동체마저도 위협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우리를 엄습하는 오늘도 삶은 이어진다. 희망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좌로부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제제 타카히사 감독과 스기사키 하나, 아야노 고)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인류는 스스로의 판단에 근거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더러 오류도 범하지만 이내 바로잡을 수 있는 것 또한 그 때문이리라. 그렇게 사회적 거리두기가 공동체마저도 위협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우리를 엄습하는 오늘도 삶은 이어진다. 희망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좌로부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제제 타카히사 감독과 스기사키 하나, 아야노 고) 사진제공: 2019 ‘약속의 땅’ 제작위원회

“현대사회는 어떤 나라든 시대적 특성에 기인한 공통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은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고민해 해결점을 찾아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담은 작품이고요. 이번 작품의 결말이 전작들에 비해 밝아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차기작인 <>은 좀 더 그럴 겁니다. 사람과 사람의 유대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싶으니까요. 모두들 만만찮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때일수록 내일의 세계는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손을 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무척 소탈하고 편안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거장의 무게를 실감했던 대화.

작별인사를 나누기 전에 필자는 또 한 번 질문을 던졌다. “사라진 아이가 고지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는 신에서 내용을 짐작할 수 있지만, 끝까지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지는 않는 <약속의 땅>의 라스트가, 전형적인 결말이나마 확인한 뒤에야 홀가분하게 극장 문을 나설 수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제제 감독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관객의 몫을 남겨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긴, <약속의 땅>이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다 악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참회의 시퀀스’로 마무리되는 미스테리물의 장르규범에 충실한 영화였다면 필자에게 이토록 큰 울림을 남겨줄 수 있었을까.

인류는 스스로의 판단에 근거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더러 오류도 범하지만 이내 바로잡을 수 있는 것 또한 그 때문이리라. 그렇게 사회적 거리두기가 공동체마저도 위협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우리를 엄습하는 오늘도 삶은 이어진다. 희망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막연하나마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초청작이 주는 메시지를 곱씹던 필자가 찾아낸 희망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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