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쪽이 '이수역 폭행' 본질을 가리고 있나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11.1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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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거기서 ‘본질’을 캐치해 내는 것이 중요한데 현상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아서 사태의 ‘본질’을 흐리기 일쑤다. 현상에 빠져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 눈뜬 봉사와 다를 바 없다는 극언은 그래서 나올 것이다. 그런데 가끔 본질을 명확히(?) 파악하고서 그 본질을 만방에 설파하려는 사람들이 잘못된 ‘매개’, 즉 근거로 현상과 본질을 연결하려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수역 사건.

이수역 사건의 현상과 본질은?

갑자기 ‘이수역(驛)’이 엄청나게 떴다. 사실은 이수역이 아니라 이수역 주변의 술집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언 ‘이수역 집단 폭행 사건’으로 불리며 30만 명의 구름 같은 청와대 청원자를 낳고 이어 거의 모든 인터넷 게시판과 SNS를 전쟁터로 만들고 여성의 모욕죄 처벌 청원까지 등장하게 한 이 사건의 내용을 구구절절 복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11월 15일, MBC 시선집중에 등장한 녹색당 신지예 공동운영위원장과 이준석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정의당 김종민 서울시당 위원장의 토론을 들으면서 나는 이 지긋지긋한 ‘본질’과 ‘현상’의 어긋남을 다시 목도하는 당혹감에 휩싸이게 됐다.

우선 나는 몇 가지의 ‘본질’에 동의한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맞아야 한다.”는 명제는 단호하게 글렀다. 그 주어가 ‘남자’여도 마찬가지고 ‘여자’여도 같다. 이수역의 여성들이 무슨 말을 했든 그들이 폭력으로 응징 받아서는 안된다. 그들이 남자들의 ‘작은 고추'가 아니라 남자들의 부모를 욕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조롱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폭력으로 응징하면 범죄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또 신지예 위원장이 말하듯 “이 사건의 경위와는 상관없이 터져 나오고 있는 여성 집단에 대한 공격은 지양돼야” 하며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들에게 엄청나게 폭력적인 사회임을 확고하게 긍정한다. 여성들이 행한 미러링에 동의할 마음은 없으나 그 미러링 자체가 여성들에 대해 폭력적인 우리 사회의 본질의 반영이라고 믿는다. 아울러 “여성들이 공포감을 느끼고 일정하게 자신들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해야 된다는 수준까지 가는가”(김종민 위원장)에 대한 문제의식은 지극히 정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수역 집단폭행 사건’은 과연 이 본질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현상일까? 30만 대군을 불러일으켰던 청와대의 청원 내용대로라면 당연히 그러하다. “내가 머리가 짧고 노메이크업을 했기 때문에 맞았다 혹은 폭행을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신지예 위원장), 그리고 “가해자는 그런 피해자의 목을 조르며 협박하였고, 폭행당한 피해자는 두개골이 보일 정도로 머리가 찢어졌다”면 말이다. 난감한 것은 이 가정법이 상당 부분 확인이 안됐다는 것이다. 남자들의 일방적 증언이 아니라 목격자들과 주점의 종업원의 증언, CCTV까지도 그 주장이 사실과 어긋나 있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머리가 짧고 노메이크업했다.”고 시비가 걸린 게 아니라 가해자로 지목된 남자들이 아닌 다른 커플과의 언쟁에서 촉발됐고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들이 신체접촉을 먼저하고 이에 남성이 여성의 모자챙을 친 것이 술집 안에서의 상황이다. 자리를 피하는 남자들을 잡은 것도 여자들이고 밖으로 나가는 계단 입구를 막아선 것도 여자들이다. 폭행이 있었다면 승강이 와중에 ‘걷어차서’ 계단을 굴러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는 것인데 그마저 주장은 엇갈리고 있다. 여성측이 SBS에 편집해서 보낸 당시 동영상을 보면 남성측에서 여성을 조롱하는 발언을 했고, 남성이 여성을 발로 걷어찬 걸 인정한 듯한 발언도 나오지만 영상만으로는 진위 파악이 어렵다. 결국 현재로서는 경찰 수사를 기다려봐야 하는 입장이다. 지금 상황에서 일방적이고 무자비한 남성의 여성 혐오 폭행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많은 가정법이 필요하지 않은가.

어떤 이는 이렇게 비꼬고 있다. “한국 남자들이 '여자가 먼저 욕을 한다면 때릴 수 있지'라고 너도나도 자수하는 어떤 상황”이라고. 강조해 말하거니와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야만이다. 그렇다면 사건의 팩트와 맥락에 대한 규명도 없이, 그에 대한 진상 확인도 없이, “경찰이 정식 수사에 들어가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술이 이뤄지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 (신지예 위원장의 말) 사건 당사자의 ‘청원’ 하나로, 대한민국에서 하룻밤에 수백 건도 넘게 발생하는 술자리 시비에 휘말려 버린 남자 세 명이 ‘무자비한 여성 증오 범죄 가해자’로 전락하는 것은 과연 정의롭고 공의로운가. 심지어 범죄를 지켜보았다는 이유로 사건이 벌어진 주점에까지 요령부득의 항의가 이어져 업무가 마비되는 상황은 과연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우리의 ‘본질적’ 한계를 무너뜨리는 데에 도움이 될까, 아니면 그 반대에 이로울까. “어쨌건 여자가 남자들 여럿하고 승강이 벌이다가 머리가 깨졌잖아! 그럼 폭력이 있었던 거잖아.”라고 단정하는 용기는 “가정폭력이 있었건 없었건 여자가 남자를 찔렀잖아!”라고 일갈하던 폭력으로부터 그렇게 많이 벗어나 있을까?

‘본질’을 강조하려고 엉뚱한 증거를 들이밀어 그 본질마저도 위태롭게 만든 사건은 한국사회에서 늘상 있던 일이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오류와 실수쯤은 덮어도 되고, 온갖 가정법을 동원해서라도 지배자의 폭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시절 말이다. 이를 뭐라고 부를까.. ‘지혜로운 바보’라고나 할까.

이해찬, 엉뚱한 사진을 5.18 학살증거라 주장하다 '역풍'

1988년 12월 7일. 초겨울의 여의도는 뜨거웠다. 5공화국의 비리와 광주항쟁의 책임을 따지는 국회 청문회가 한참 진행중 이었던 것이다. 제1 야당인 평화민주당의 선봉장은 팔팔한 서른 일곱 나이의 젊은 초선의원 이해찬이었다. 예리한 눈매만큼이나 칼날같은 논리와 언변으로 증인들을 몰아붙이던 이해찬 의원은 분노 그득한 목소리와 함께 사진 한 장을 내놓았다. 땅에 널부러진 시신들 주변에 총을 든 공수부대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이같이 애국시민을 죽이고 웃는 모습으로 기념사진까지 찍을 수 있습니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어금니를 깨물 일이었다.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저럴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청문회 생중계를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는 전혀 다른 이유로 어금니를 갈아 붙이는 사람이 있었다. 당시 나이 마흔 여덟 살의 윤명한 상사 등 공수부대원들이었다. “저건 1980년 광주가 아니라 1969년 대흑산도라고. 거기서 무장공비들을 소탕한 뒤에 찍은 사진이란 말이야!”

 

그들은 자신들이 떡 하니 나온 사진을 들고 국회로 달려왔다.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진 건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이었다. 청문회에 참석하고 있던 민정당 정창화 의원은 의사진행발언을 얻어 사진 앞에서 비분강개하고 있던 사람들의 턱에 강한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진을 가지고 광주 민주화운동의 아픔을 심화시키고 지역감정을 조장했을 뿐 아니라 군의 사기를 저하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실제 사진의 출연자들이 나타났으니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여기서 이해찬 의원은 매우 궁색한 해명을 한다.

1988년 12월 7일 국회 청문회에서 이해찬 평화민주당 의원이 1969년 흑산도 무장공비를 소탕한 사진을 들고 1980년 광주민주화항재 사진이라고 주장하자 민정당 정창화 의원이 이를 반박했다. 사진은 이를 보도한 당시 경향신문 지면.

“이 사진은 「월간중앙」 88년 3월호 「사진으로 본 광주사태」라는 특집에 실린 것으로 미처 확인하지 않은 채 증거로 제시한 것은 사실이나 이 책임은 오보를 한 「월간중앙」에 있으며 의도적으로 광주 진상조사를 왜곡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중앙일보 1988년 12월 8일) 중앙일보는 1면에 사과문을 냈다. 민정당은 더욱 기세등등했고 국방부도 떠들 기세였다. 이에 이해찬은 한 발 더 물러서야 했다. “지금까지 제출된 다른 증거에 대해서도 철저한 진상규명을 하자는 데 찬성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지금까지 제출된 다른 증거들의 신뢰도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는 뜻이다. 워낙 광주항쟁이 거대한 사건이었고 그에 따른 증거들이 차고 넘쳐서 망정이지, 만약 바로 그 직전에 일어났던 부마항쟁처럼 사진이나 영상 자료가 드물기라도 했다면 제출된 전체 자료의 증거 능력에 이의가 제기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행히 6월 항쟁 다음 해에다가 여소야대 국회라는 시공간적 특성상 위원장 명의로 된 사과 정도로 무마할 수 있었지 말이다.

 

물론 사안의 본질은 광주항쟁 당시 저질러진 국가적 범죄다. 아홉 살 어린이부터 장애인까지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쏘아 죽이고 찔러 죽이고 헬기에서 기총까지 쏘아대고 심지어 여성들을 성폭행하는 등 외국 점령군만도 못한 악행을 저지른 ‘대한민국 국군’의 흑역사를 밝히고 그 수괴들을 규명, 처벌하는 일이었다. 이 ‘본질’이 월간지 사진을 별다른 검증 없이 청문회의 증거로 삼고, 그걸 확대해 흔들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부르짖은 정의로운 국회의원이라는 ‘현상’에 의해 심각하게 흔들렸던 것이다.

 

'이철규 의문사'를 고문에 의한 죽음으로 몰아붙인 운동권

1989년 5월, 서울 시내 중심가는 무척 소란스러웠다. "이 처참한 죽음이 어찌 익사란 말인가"를 주먹만한 활자로 인쇄한 포스터들이 곳곳에서 나부끼는 가운데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이철규를 살려내라”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포스터의 중앙에는 고 이철규씨 (조선대학교 82학번)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경찰 수배를 받고 있던 그는 광주 인근 저수지 주변에서 경찰에게 쫓기다 실종됐고 1주일 뒤 저수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시신은 참혹했다. 그 참혹함은 익사체가 아니라 고문의 흔적이라고 ‘믿어졌고’, 전기고문으로 지져 버린 후 물 속에 던져 버렸다는 ‘썰’이 강력히 유포됐다. 포스터는 그 결과였다. “이것이 어찌 익사란 말인가.” 시신은 그저 말이 필요없는 증거였다. 이철규를 살려내라. 고문살인 규탄한다.

그렇게 곳곳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던 즈음, 한 달변의 학생이 열변을 토하며 동참을 호소했다. 그런데 누군가 손을 들고 질문을 던져 왔다.

"학생들 물에 빠져 죽은 시체 봤어?" 물론 아무도 없었겠지만 말 잘하는 학생이 호기있게 대답을 했다. “봤습니다.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보다 더 태연했다. “한 보름 썩었다가 떠올라 봐. 이렇게 돼.” 학생들이 웅성거렸지만 시비는 계속됐다. “죽은 학생이 경찰에 잡힌 데가 시신이 발견된 저수지라면서? 학생들 같으면 잡아가서 고문해서 죽여서 하필이면 애를 잡은 그 저수지에 다시 던져 놓겠나? 잘 떠오르라고 돌멩이 하나 안 매달고?”

시신이 사흘 이상 방치되어 부패하면 얼굴이 검게 변하고 눈이 튀어 나온다. <수사실무 기반 법의학 교육자료 개발에 관한 연구> 중. 출처: 온나라 정책연구

상당히 합리적인 반박에 학생들은 말문이 막혔다. 역시 반격에 나선건 예의 달변의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반격의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사태의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의학적(?) 문제제기에 학생들은 말문이 막혀 갔다. 

맞았다. 물론 사태의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자기네 학교 교지에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고 이철규는 조선대학교 교지 편집장이었다) 본질은 3백만원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독재 정권의 망동이었고, 공안당국을 조성해 가며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이들을 ‘발본색원’하려던 국가의 폭압이었다. 그러나 이 본질을 폭로하기 위해 학생들은 지극히 비본질적인 '현상‘을 들이밀었다. 즉 참혹한 ’비주얼‘을 무기로 한 사람이 ’고문당해 죽었다‘는 서사를 담아 시민들에게 들이댔던 것이다. 본질이 뭔지 헛갈린 채, 스스로의 정당한 주장까지도 괜스런 포장지에 우겨넣어 버린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것을 심각한 악습이라고 생각한다. "내 말이 틀리냐?"고 물을 줄은 알면서 "내 말이 어떻게 들리냐?"에 대한 관심은 지지리도 없었던 시대가 남긴 흔적기관이라고 여긴다. "본질은 그게 아니야. 본질을 보라‘는 말이 때로는 유용한 죽비이나 가끔은 무책임한 게으름이 될 때가 적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한 효순이 미선이의 참혹한 시신, 내장이 다 튀어나온 그 목불인견의 사진을 초등학교 애들에게 보여주고 사건의 ’본질‘을 가르치려던 시도를 다시 들먹일 것도 없이.

'증오에 대한 증오' 미러링은 본질 파악을 어렵게 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본질과 현상이 일치하면 과학적 고찰은 필요 없을 것이다.” 루카치는 이 말을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상’들을 핵심 내지 ‘본질’과 연결시켜 주고, 본질을 파악하도록 해 주는 매개를 찾는 일이다.” 그리고 카렐 코지크는 <구체성의 변증법>에서 본질과 현상의 개념을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현상은 본질과 근본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본질 또한 현상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가진 실재인 것도 아니다...... 실재는 현상과 본질의 통일이다. 만약 둘 중에서 어느 한쪽이 분리되어 그것이 진짜 ‘실재’라고 간주된다면 그것이 본질이건 현상이건 마찬가지로 비실재적일 것이다.”

위의 말들을 초벌구이해 보면 대충 이런 내용이 될 것이다. 대개 본질과 현상은 일치하지 않으나 분리되지도 않는다. 본질은 현상을 통해 드러나며 현상은 본질을 표현하지만 둘은 즐겨 어긋난다. 둘은 변증법적 결합을 통해 '실재‘를 이루지만 어느 한쪽만으로는 실재를 완성할 수 없다. 따라서 현상과 본질 사이의 매개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현상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눈뜬 봉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김남주,〈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시와 혁명》)

다시 이수역 사건으로 돌아오자. 우리 사회에 만장한 야만에 맞선다는 것은 그 야만을 ‘미러링’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증오 (이번 이수역 여성들도 서슴없이 성적 소수자 혐오를 발산한다)에 저항한다는 것은 ‘증오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키는 일이 아닐 것이다. 정말이지 본질은 ‘그게 아니지’ 않겠는가. 위에 길게 언급했던 우리 사회의 ‘본질적 문제’들에 다시 한 번 공감한다. 그 본질적 한계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상’들을 핵심 내지 ‘본질’과 연결시켜 주고, 본질을 파악하도록 해 주는 매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본질과 근본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현상”을 발견하고 “현상만 보지 않고 그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요즘 들어 툭하면 살벌한 전선으로 갈라지는 우리나라가 나는 무섭다.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잔인하다."고 했던 우사(尤史) 김규식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한국인들끼리의 증오가 어떤 일을 낳았는지 한국 현대사가 넉넉하고도 풍요롭게 펼쳐 보여 주고 있는데 어찌 요즘의 세월이 무감하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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