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이야기] ① 고선지는 왜 '서역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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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이야기] ① 고선지는 왜 '서역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나
  • 안정준
  • 승인 2020.06.08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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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준의 고대사 이야기] 제국과 운명을 함께 한 이방인, 고선지 ①

7세기 말, 당나라 수도 장안의 궁궐 옆 고급 연회장에서 한바탕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측천무후 황제의 총애를 받던 장동휴(張同休)라는 자가 조정의 여러 고관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자리였다. 아름다운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고관대작들의 옆에는 기생들이 붙어서 술시중을 들었다. 다들 한창 술이 돌아 흥이 났을 때, 누군가가 양재사라는 관리의 얼굴을 가리키며, “공의 얼굴은 꼭 고구려 사람을 닮았구려!”하며 놀려댔다. 그러자 술이 잔뜩 오른 양재사는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주변에서 종이를 찾아내 자신의 두건 양 옆에 길게 오려 붙이고, 붉은 도포()를 가져와서 뒤집어 입었다. 고구려인의 의관을 어설프게 흉내 낸 것이었다. 곧이어 그는 마치 진짜 고구려에서 온 사람인양 두 손을 뒤로 뿌리고 허리를 틀어 구부리면서 과장된 몸짓으로 고구려의 전통춤을 추기 시작했다. 양재사의 기이한 춤사위를 본 관료들과 술시중을 들던 여자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서 배를 잡고 나뒹굴었다.

-『신당서』 권109 양재사전 기록을 토대로 서술

그림 1.
그림 1.

 

영원한 이방인의 굴레

위 기록은 서기 700년 무렵에 당나라 장안에서 벌어진 한 연회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구려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짧은 기록이지만,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생각했던 고구려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다른 문화권 주민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과 차별의식이 만연했던 그 잔인한 세상 속에서 망국의 주민으로서 끌려와 살아야 했던 고구려백제 유민들의 인생이 결코 녹록치 않았다는 사실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8세기에 당에서 고구려 출신의 번장으로서 가장 화려한 이력을 써내려갔던, 고선지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고선지에 대한 논자들의 평가는 극단적이다. 한편에서는 고구려의 후예이자 천재적인 전략가로서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무장으로서 크게 활약했던 인물로 칭송한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한없이 자상했고 아낌없이 베푸는 인물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반면에 고선지는 탐욕스럽게 재물을 취했고, 항복한 나라의 국왕과 주민을 잔인하게 죽게 만든 파렴치한 인물이었다는 평도 존재한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 ‘우리 민족이니 우수한 혈통이니 하는 주관을 배제한 채 냉철하게 그의 궤적을 뒤쫓다보면, 한편으로는 더없이 인간적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꽤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기까지 했던 그의 이중적인 생애가 드러난다.

그는 양재사의 한바탕 춤판이 있었던 서기 700년 무렵에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그가 죽은 뒤에 가문도 지리멸렬해져서 선대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정리해 둔 후손들이 없었던 것 같다. 그의 부인과 아들이 있었던 것 같으나 현재 그들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고선지는 75512월에 대략 50대 중반의 나이로 사망했으니, 대략 서기 700년경에 태어났다고 봐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직후에 많은 고구려 주민들을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고선지의 선조도 이때 함께 끌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고선지를 고구려의 후예로 기억하지만,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고구려가 망한 지 30여 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고선지는 생전에 한 번도 고구려 땅을 밟아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당나라 땅에서 고구려라는 낙인을 몸에 지니고 태어났을 뿐이었다.

 

그림 2.
그림 2.

 

고선지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인 고사계의 부임지를 따라 이리저리 거주지를 옮겨 다니며 지냈다. 처음에 당나라의 북동부 지역인 밀운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이후 하서군을 거쳐 북서쪽의 국경 끝인 안서도호부에 정착하게 됐다. 고선지가 거주했던 지역은 대부분 당의 척박한 변경의 군사지대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세계제국 당의 번화한 모습을 목격했고, 그곳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동경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고구려에서 성장했던 아버지로부터 종종 고구려에 대한 얘기를 듣긴 했겠지만, 이미 망한 나라가 다시 부활할 수도 없었고, 그 지역으로 다시 돌아갈 일도 없었다. 고선지에게 있어서 성공이란 곧 세계제국 당나라에서의 출세를 의미했다.

고선지는 결코 일반 평민계급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에서 무장으로 활약하여 정4품의 사진장군제위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지금으로 치면 대략 준장(원스타)내지 소장(투스타) 정도에 해당하니 이방인으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당은 다른 한족왕조들에 비해 이민족 출신을 변방의 무관으로 많이 등용했다. 출중한 능력이 있는 인물들에게 군사적으로 복무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당의 이러한 정책 덕에 고구려백제 유민 가운데 일부는 당나라 조정에서 관직을 받고 변경의 전선에 나가서 토번돌궐 등을 상대로 맹활약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린 고선지에게 선택권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을 타고 변경의 군사업무에만 종사해야했던 거친 환경 속에서, 고선지가 한족 출신의 귀한 자제들과 학문으로 대등하게 경쟁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설사 재능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능력을 제대로 입증할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일찌감치 책읽기를 포기했다.

안서도호부에는 강제 이주된 고구려 주민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사막과 초원으로 이루어진 척박한 땅을 농지로 일구면서 농한기에는 군사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했다. 온갖 차별 속에 힘겹게 생을 영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사계고선지 부자 역시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당나라에서 어떤 대우를 받게 될 지를 실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능한 군인이었던 아비 고사계는 어린 고선지를 데리고 새로운 발령지인 안서도호부로 이주했다. 이곳은 청해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쭉 뻗은 실크로드의 주요 관문으로서 당이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무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군사거점이었다. 당은 동서무역의 이득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의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야했기 때문에 이곳은 언제나 삼엄한 군사적 긴장상태가 유지되었다.

고선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군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고선지는 용모가 잘 생겼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전하는데, 아버지인 고사계는 매번 아들의 유약하고 느림을 걱정했다고 전한다. 일견 모순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아마도 고사계가 아들에 대한 기대치를 높게 설정하고 아주 혹독하게 조련시켰음을 보여주는 문구일 것이다.

고사계는 자신이 전장에 나갈 때 아직 성년이 되지도 않은 고선지를 자주 데리고 다녔다.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정식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부여한 채 대동한 것이었다. 다소 무리해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미리 공을 세우게 해서 앞으로의 출세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자식을 외국학교에 보내 체류시키면서 언어연수를 시키는 등 소위 스펙을 쌓게 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들을 가리켜 극성부모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있지만, 고선지는 미성년기부터 사실상 목숨을 내놓고 전장에서 스펙을 쌓았으니, 이 집안 사람들은 더욱 지독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전쟁터에서 성장한 고선지는 음보’(蔭補: 아버지가 높은 관직에 있을 경우 자식에게도 관직을 주는 제도)를 통해 20여 세의 젊은 나이에 유격장군이라는 지위에 올랐다. 비록 밑바닥부터 올라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준비된 무장이었던 고선지는 736년경부터 여러 절도사의 휘하에서 무장으로 활약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740년경이었다. 당시 천산산맥 서쪽에 달해라는 투르크 계통의 부족이 당에 대항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황제였던 현종은 안서도호부의 책임자인 부몽영찰이라는 인물에게 즉시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부몽영찰은 진압 작전을 직접 수행하지 않고, 휘하의 고선지를 호출해서 정벌을 맡겼다. 실패하면 부몽영찰 본인의 책임도 적지 않았을 텐데, 그만큼 고선지의 역량을 믿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때 불과 2천명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단독 지휘에 나섰던 고선지는 완벽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능령(綾嶺)이라는 곳에서 소수의 기병으로 적의 배후와 측면을 기습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달해 부족의 군대를 전멸시키고 그들의 말까지 모두 빼앗아왔다. 사실상 반란세력을 완전히 궤멸시킨 고선지의 공적은 중앙 조정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그의 벼슬은 안서도호부의 제2인자인 부도호라는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펼쳐질 화려한 공적과 출세가도의 첫 단추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서역 정벌의 시작

중국은 이미 한나라 때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교섭을 해왔다. 이 교역로는 중국 중원에서 시작해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파미르 고원-중앙아시아 초원-이란 고원-지중해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동양과 서양을 경제문화적으로 잇는 일종의 고속도로로서 중국산 비단칠기도자기 등의 물품과 양잠화약제지 기술 등이 서방으로 넘어간 중요한 루트이기도 했다.

다만 실크로드 운영에는 몇 가지 난관이 있었다. 우선 면적이 37에 달하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평균높이가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파미르 고원 지대가 가로막고 있어서 관리와 군대를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사막초원산지 등으로 둘러싸인 이 길의 주변에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복속시켜야만 상인들의 원활한 왕래가 가능했으며, 문제가 생겼을 때 파견된 군대의 보급과 안전이 확보될 수 있었다. 그런데 흉노토번과 같은 거대 유목국가나 사라센 등의 아랍왕조가 실크로드의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켜서 주요 길목을 장악해버릴 경우, 중국왕조에 막대한 이익을 보장했던 이 고속도로는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다.

 

그림 3.
그림 3.

 

740년경의 당나라도 이 실크로드의 운영 과정에서 큰 어려움에 봉착해있었다. 당시 티베트 지방에서 흥기하여 당의 서부 변경을 압박하던 토번(吐蕃)이라는 막강한 세력이 중앙아시아 각지로 세력을 뻗치면서 당의 서역 통로를 죄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파미르 고원에는 20여 개의 작은 나라들이 산재해 있었는데, 토번은 이 가운데 실크로드의 핵심루트에 있는 소발률국(小勃律國)의 왕에게 토번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게 하여 혼인동맹을 맺는 등, 서북 방면의 20여 국을 복속시켜서 당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물론 당나라도 악화되는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현종은 736년부터 747년까지 3차례에 걸쳐 서북변의 여러 절도사들을 차례로 보내어 실크로드의 핵심요지인 소발률국 인근을 공략하게 했다. 그 원정을 수행했던 이들 중에는 고선지의 상관이었던 부몽영찰도 있었다. 그러나 당군은 번번이 그들을 막아선 토번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당군이 패배한 원인은 전략 부재도 원인이었지만, 사막과 산지로 이루어진 먼 원정길의 도중에 나타난 토번군의 기습을 당해내기가 상당히 어려웠던 사정도 있었다.

 

그림 4.
그림 4.

 

그러나 즉위 후 당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던 현종은 서역 제국에 대한 통치권을 토번에게 호락호락 넘길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는 토번이 서역의 여러 나라들로 이동하는 주요 통로인 연운보라는 지역을 곧장 공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연운보는 파미르 고원의 남단으로 현재 파키스탄 동쪽의 사르하드(Sarhad)라는 곳에 해당한다. 토번이 서역으로 가는 루트를 빼앗아서 상황을 단숨에 반전시키겠다는 대담한 계획이 수립된 것이다.

물론 쉬운 작전이 아니었다. 먼 원정길에 많은 군대를 데려가기 어려운데다, 도착하더라도 토번군이 연운보의 요새를 장기간 지키면서 농성할 경우 중도에 보급이 차단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는 중앙 조정의 장수를 갑자기 내보내긴 어려웠다. 실크로드 주변의 지형과 주변국들과의 오랜 교분이 있는 자, 그리고 힘든 원정길에 군사들을 확실히 장악하고 적진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자가 필요했다.

당 조정의 논의 과정에서 누구의 추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예전에 달해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전공이 있었던 고선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현종이 이 젊은 장수에게 행영절도사라는 관직을 주어 서역 원정군의 총지휘를 맡긴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조처였다. 다들 놀람과 우려가 반반 섞인 얼굴로 고선지를 바라봤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한, 패기 넘치는 장수이긴 하나, 과연 이런 대규모 원정을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고선지를 아끼던 상관인 부몽영찰도 자신의 부하장수를 콕 집어 서역 원정의 총책임자로 임명한 데 대해 내심 상당한 불만을 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본인도 앞서 서역 정벌을 갔다가 크게 실패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내놓고 반발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림 5.
그림 5.

 

7473, 고선지는 원정군 총 1만명을 배정받았다. 보병과 기병을 합친 숫자였다. 그런데 이 군대를 이끌고 주요 루트였던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단으로 뻗어있는 길로 나아갔다간 길목을 막고 있는 토번군의 기습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당군이 정예라고는 하나 도중에 수차례 기습을 막는데 전력을 소모한다면, 연운보 요새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1만여 명의 토번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때 고선지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작전을 구상해냈다. 바로 1만명의 군대를 데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단에 있는 험준한 천산산맥을 통과하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림 6.
그림 6.

 

그해 3월 하순에 고선지가 이끄는 1만명의 부대는 안서도호부의 서쪽 끝인 쿠차를 출발하여 100여 일의 대장정을 떠났다. 적국과 멀리 떨어진 북쪽 길로 이동했으므로 행군을 들킬 염려는 없었으나, 1만의 군사와 식량무기를 잔뜩 실은 1만 필의 말들이 메마른 사막 북부와 얼음이 얼어붙은 산악지대를 넘으며 10일 혹은 20일씩 행군해야했다. 어떤 날은 지형이 너무 험준해서 불과 10밖에 진군하지 못한 날도 있었다. 고선지가 병사들을 어떻게 독려해가며 이곳을 통과하게 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안서도호부를 출발한 고선지의 군대는 100여 일후 우방국인 오식닉국(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도착했다. 3개월이 넘는 동안의 긴 행군에 완전히 지쳐있던 병사들은 여기서 며칠간의 휴식을 취했다. 이렇게 오식닉국에서 병사들의 전열을 정비한 고선지는 이윽고 군대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 파미르고원의 험한 산세 속에 있는 연운보를 향해 곧장 진격했다.

 

그림 7.
그림 7.

 

높은 언덕 위에 만들어진 천혜의 요새 연운보에는 토번군 1만 이상 주둔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적군의 주요 차단선을 피해 1만명의 군대를 온전히 연운보로 옮겨온 고선지는 이제 자신의 용병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눈발이 날리는 산지와 살얼음이 떠있는 강들을 건너며 3천여 리를 행군해왔던 당군에게 이 요새의 공략은 차라리 쉬운 임무인지도 몰랐다. 고선지는 아침 일찍 파륵천이라는 강을 순식간에 건너서 연운보 요새를 기어올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당나라 대군의 모습에 기가 질린 토번군은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불과 4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은 최소 5천명 이상의 토번군을 죽이고 1천명의 포로와 군마 1천필을 빼앗았다. 획득한 군수 물자와 병기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대승이었다.

고선지가 연운보를 장악하면서 토번이 서북으로 진출해 서역제국과 제휴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되었다. 730년대 중반부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번 당을 괴롭히며 서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토번의 우위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여기서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2부에서 계속)

안정준   kyuri21@naver.com  최근글보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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