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이야기] ② 고선지의 '과욕‘이 부른 참사, '탈라스 전투'의 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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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이야기] ② 고선지의 '과욕‘이 부른 참사, '탈라스 전투'의 대패
  • 안정준
  • 승인 2020.06.09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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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준의 고대사 이야기] 제국과 운명을 함께 한 이방인, 고선지 ②

 

● 힌두쿠시를 넘어서 만들어낸 신화 

고선지가 연운보에서 곧장 소발률국의 수도를 향해 진격할 것을 공언했을 때,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특히 조정에서 현종이 파견한 술사 한리빙과 환관 변령성도 두려워서 가려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고구려 출신 장수인 고선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중앙에서 내려 보낸 이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00일 동안의 고단한 행군과 연운보에서 치른 살벌한 전투에도 이미 기가 질려있었는데, 지금까지 행군해 온 길보다 더 험한 파미르 고원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서 적국 깊숙이 들어간다는 계획에 넌더리가 났던 것이다.

고선지는 감시자들을 굳이 억지로 끌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한리빙과 변령성 그리고 그동안의 행군과 전투로 인해 다치거나 쇠약해진 병력 3천을 연운보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약 7천여의 군대를 이끌고 토번의 주요 동맹국이자 실크로드의 핵심 지역인 소발률국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때 고선지가 선택한 루트는 또다시 적국인 토번과 소발률국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바로 힌두쿠시 산맥에 위치한 탄구령을 넘기로 한 것이다. 이곳은 항상 얼음으로 덮여 있는데다 종종 눈보라가 몰아치고 산소가 희박한 고지대였다. 3일 동안 행군하여 최고 높이 해발 4,575m 고도의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겨우겨우 올라갔으나 눈앞에는 여전히 눈 덮인 가파른 하행길이 40리(15.7㎞)나 펼쳐져있었다. 앞선 병사와 말들이 발을 헛딛고 하나둘씩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더 이상의 행군을 거부했다.

 

“장군께서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더 이상 못 내려갑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구경해본 적이 없는 눈 덮인 절벽들을 기어오른 장병들의 원성이 터져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렇게 고생고생해서 소발률국에 도착한다고 해도 과연 토번과 연합한 그들이 호락호락 항복해올지 여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선지의 엄중한 군율 적용만으로 통제가 되지 않던 그때,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바로 소발률국의 주민 20여 명이 고선지의 부대가 있는 곳에 나타난 것이다.

 

소발률국 주민: “우리는 아노월성(阿弩越城: 소발률국의 수도)에서 왔습니다. 우리 주민들은 모두 장군이 어서 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일부러 멀리까지 마중을 나온 것입니다.”

고선지: “그런가. 혹시 토번 군대가 그곳에 와 있지는 않은가?”

소발률국 주민: “토번과 우리를 잇는 유일한 길인 사이하강의 등나무 다리는 저희가 이미 끊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저항 같은 건 없을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연극이었다. 탄구령을 오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의 원성과 불만을 목격한 고선지는 미리 자신의 심복 병사 20명을 몰래 본대보다 앞서서 보낸 뒤 소발률국 사람처럼 위장하게 하고 나타나게 했던 것이다. 고선지가 기뻐하는 척하면서 진군 명령을 내리자 사기가 오른 병사들이 환호하면서 드디어 눈 덮인 내리막길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다시 사흘에 걸쳐 탄구령 계곡을 계속 내려가자 인더스강이 굽이치며 흐르는 장관이 펼쳐졌다. 그리고 곧 고선지의 군대는 소발률국의 국왕이 있는 수도 아노월성에 다다랐다.

당시 소발률국은 이웃한 토번과 혼인동맹을 맺고 당에 저항하던 상태였다. 고선지는 먼저 왕궁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했지만, 왕과 왕비, 여러 수령들은 토번의 힘만 믿고서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소발률국은 험준한 산지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인접국인 토번과의 사이는 길기트강(인더스강의 지류)이 흐르고 있었다. 중간에 강이 흐르는 양 옆 절벽은 화살이 날아가 닿을 정도의 거리였는데, 그곳에 등나무 덩굴 교량이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이 다리는 수도 아노월성의 남쪽 19㎞ 지점에 있었고, 토번이 보낸 구원군이 유일한 통로인 그 다리를 건너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림 1.
그림 1.

 

고선지는 친 토번 세력인 수령 5~6명을 붙잡아 목을 벤 다음, 긴급히 부하들에게 토번과의 유일한 통로였던 등나무다리로 달려가 그것을 끊어버리도록 지시했다. 당군과 토번군이 남북에서 서로 이 다리를 향해 달려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토번의 구원군이 다리 맞은편에 막 도착했을 때, 그들은 등나무다리의 한쪽 끝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고선지의 당군이 한발 빨랐던 것이다.

당군이 등나무 다리를 끊은 순간 승패는 결정되었다. 다리를 다시 만드는 것은 1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이는 곧 토번과 서역 국가들을 잇는 통로가 최소 1년간 완전히 차단된 것을 의미했다. 교량을 끊은 고선지는 이제 느긋하게 산속에 숨어있는 소발률국의 왕과 왕비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동맹국 토번의 구원이라는 마지막 희망이 무너진 이들은 순순히 나와서 투항했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이 크게 성공함에 따라 이전에 등을 돌렸던 서역 20여 개국뿐만 아니라, 서방의 총 72개국이 당을 두려워하여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그동안 당의 서역 원정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이처럼 휘하 병력들의 피해가 거의 없이 토번을 단숨에 위압하고 지금의 파키스탄 북부 지역과 아프가니스칸 일대에 대한 영향력까지 확보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고선지는 소발률국에 3천의 군사를 남겨두었고, 왕과 왕비를 사로잡아 당당하게 귀환길에 올랐다.

 

● 출신의 한계, 그리고 조급한 출세욕

고선지가 군대를 이끌고 귀환하여 안서도호부에 도착했을 때, 놀랍게도 그의 군대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원정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사령부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고선지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에서 잔뜩 가라앉은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상관인 부몽영찰의 집무실문을 열고 들어선 고선지에게 날아든 것은 거친 욕설과 고함, 삿대질이었다.

 

부몽영찰: “이 개 창자를 먹을 고구려 놈아, 이 개똥을 핥아먹을 고구려 놈아! 누가 너한테 우전사 자리를 얻게 상주해 주었느냐?”

 

고선지는 상관의 무지막지한 욕설을 듣고 깜짝 놀랐지만, 금세 이유를 알아채고는 공손하게 “중승(부몽영찰)이십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부몽영찰의 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몽영찰: “누가 너한테 안서부도호사 자리를 얻게 해주었느냐?”

고선지: “중승이십니다.”

부몽영찰: “누가 너에게 안서도지병마사라는 높은 자리를 얻게 해주었느냐?”

고선지: “중승이십니다.”

부몽영찰: “너 같이 천한 고구려 놈이 그 직책들을 전부 얻을 수 있게 된 건 바로 나의 추천 때문이 아니냐.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처분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조정에 승전 보고를 올린단 말이냐! 너같이 배은망덕한 놈은 바로 목을 쳐야된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욕지거리를 한 부몽영찰은 고선지가 조정에 올린 승전보를 직접 작성했던 유선이라는 인물을 향해서도, “네놈이 승첩의 글을 그렇게 잘 짓는다고 들었다!”하고 빈정거렸다. 고선지의 옆에 서 있던 유선 역시 고개를 수그리며 자신의 죄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고선지는 원칙적으로 직속상관인 부몽영찰에게 가장 먼저 전황과 승전 내용을 보고해야했다. 그가 상관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조정에 승전 보고를 했던 것은 아마도 조정으로부터의 포상과 승진에 대한 욕구가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고구려 출신인 자신의 공적을 다른 상급자에게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부몽영찰은 과거에 고선지와 동일한 임무를 띠고 서역 원정에 나섰으나 크게 실패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조정에서 아예 안서도호부의 총책임자인 자신을 배제하고 부하인 고선지에게 서역 원정군의 총수권을 내어준 탓에, 자신은 멀찌감치서 구경만 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선지가 자신에게 보고하는 절차마저 무시했다면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

다만 부몽영찰은 고선지가 세운 예상치 못한 엄청난 공적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가 예전에 고선지를 신임하고 여기저기 추천했을 당시에는 자신의 지위를 넘볼 만큼 빠르게 치고 올라올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가 승장인 고선지에게 내뱉은 신경질적이고 가학적인 언사들은 이러한 복잡한 심사들이 얽혀있었다.

고선지가 부몽영찰로부터 월권을 이유로 심한 문책을 당하고 있던 그때, 원정을 따라다니며 고선지의 감시자 역할을 했던 환관 변령성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황제 현종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냈다.

 

“부몽영찰이 승장인 고선지를 작은 핑계를 들어 공연히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고선지는 특별한 공로를 세우고도 이제 자기 목숨을 걱정해야만 하는 실정이옵니다. 전공을 세운 충신을 이렇게 대우한다면, 훗날 누가 조정을 위해서 애쓰려고 하겠습니까?”

 

변령성이 어떤 의도로 고선지를 두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정 과정에서 고선지의 능력을 눈여겨봤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러한 보고를 들은 현종은 곧바로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고선지에게 부몽영찰의 안서 사진절도사 지위를 대신하게 하라!”

 

현종은 고선지가 원정에서 돌아온 지 석 달 뒤인 747년 12월, 그를 부몽영찰이 맡고 있던 안서절도사로 임명했다.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부몽영찰은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고 말았다. 또한 현종은 고선지에게 홍려경과 어사중승이라는 자리를 주어서 중국과 서역을 오가는 사신의 관장 임무까지 맡겼으며, 수도 장안에 있는 두 채의 저택도 하사했다. 서역 원정에 모든 걸 걸었던 고선지는 원정 과정, 그리고 당에 돌아온 직후에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맞기도 했지만 결국 원하던 것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그는 총 2만 4,000명의 강군을 거느리고 당의 서역 여러 왕조들에 대한 정책을 총괄하는 안서도호부의 최고책임자 지위에 오른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출신으로서 성공신화를 써내려간 고선지였지만, 황제의 총애가 깊어지고 높은 관직에 오를수록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늘 곱지만은 않았다. 특히 이민족 출신이라는 이력은 그가 안서에서 말단장수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차별과 질시를 받았던 주된 요인이었다. 한족 출신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이민족 출신 장수들도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안서 도호부에는 고선지가 하급 무장일 때부터 그를 얕잡아보거나 무시했던 관리들이 많았다. 당시 정천리․필사첨․왕도 같은 자들은 부몽영찰이 절도사로 있던 시기에도 걸핏하면 고선지를 뒤에서 헐뜯거나 모함하기도 했다.

고선지는 안서의 최고위직인 절도사 자리에 오른 직후 이들을 불러다가, “네놈은 생긴 건 남자다운데 마음속은 어째 꼭 아낙네와 같은가!”라고 다그치거나, “이 오랑캐 놈아, 내가 성 동쪽의 넓은 토지를 너에게 빼앗긴 적 있는데 생각나느냐!”라며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고선지는 이들을 따끔하게 혼내기는 했지만, 결국 그들을 용서하고 본래의 직무를 그대로 담당하게 했다. 이는 일면 고선지의 시원시원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 내의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자들을 현실적으로 배제할 수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고구려 출신인 그를 경계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려있었다. 그들을 모두 내쫓는다면 조직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지휘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선지는 집안의 재물을 주변에 베풀기를 좋아해서 사람들이 요구하면 내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 기록만보면 고선지가 재물이나 금전에 초연하고 그저 사람사귀기를 좋아했던 성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의 전후 행적을 보면 원정한 도시를 약탈하고 전리품을 챙기는데 집착하는 이중적인 모습도 함께 보인다. 이러한 모습들은 아마도 당에서 관인으로 활동했던 고선지 나름의 처세 방식에 따른 행동들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당시 고선지 같은 변방의 이민족 출신 장수는 단지 유능하다는 것만으로는 당 조정으로부터 인정받고 승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상부에 자신의 우수한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조직을 효율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 때문에 고선지는 이미 안서도호부의 하급 장수이던 시절부터 자신을 싫어하거나 직무에 비협조적이었던 한족 관료들에게 금품과 재물을 바치기도 했다. 심지어 고선지에게 집요하게 재물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환관 변령성은 자신이 조정에 올린 보고 덕분에 고선지가 절도사로 승진한 것을 목도하게 되자, 그에게 계속해서 금품과 전리품을 더 요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고선지는 그렇게 환심을 얻은 관리들과 함께 시끄럽게 웃고 떠들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어딘가 허전했을 것이다. 뒤돌아서면 자신의 출신을 비웃고 무시하기 일쑤인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믿고 자기 빈자리를 내맡길만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고선지가 하위 무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그를 충심으로 모셨던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봉상청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영특한 기질을 갖췄으나, 집안이 본래 가난했고 외모가 볼품없어서 서른이 넘도록 벼슬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고선지를 알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가 아직 하급장교로 활동할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갖춘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채고는 여러 차례 편지를 써서 그의 겸종(시중드는 사람)이 되기를 청했다.

그렇게 고선지의 앞에 나타난 봉상청은 삐쩍 여윈 몸에 눈은 사시였고, 다리가 짧아 절뚝거리는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고선지는 처음에 그의 보잘 것 없는 몰골에 실망해서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상청은 고선지에게 계속 편지를 쓰고 찾아다니며 자신을 받아줄 것을 주청했다.

 

고선지: “나는 겸종이 이미 충분하다. 어찌하여 귀찮게 자꾸 찾아오는가?”

봉상청: “저는 장군 밑에서 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소개도 없이 여길 혼자 찾아왔습니다. 어찌 이다지 심하게 박대하십니까. 혹시 제 외모 때문입니까. 장군께서 만약 사람을 두루 취하신다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생김새로 사람을 차별하신다면 정작 뛰어난 사람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봉상청은 이렇게 대꾸하며 고선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집문 앞에 십 수일동안 떠나지 않았다. 이에 고선지는 마지못해 그를 수하로 거두었다. 어딘가 어수룩하고 주변에 냉대에 익숙해져있던 이 한인 출신의 책사가 하필 이민족 출신의 용장인 고선지를 눈여겨보고 그에게 자기 운명을 걸었던 장면은 참으로 드라마틱한 면이 있다. 비록 서로 출신은 다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사회적 차별의 대상이었던 두 사람이 서로 뭉치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고선지가 봉상청의 진면목을 알아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고선지가 부몽영찰의 명령을 받아서 달해 부족의 반란을 평정하러 출정했을 당시, 상부에 보고서를 올릴 일이 생겼다. 이때 봉상청은 군대의 주둔지와 물이 있는 곳, 적의 형세, 이길 수 있는 계책 등을 보고서로 상세히 작성해서 올렸는데, 그 내용이 아주 치밀했으며 고선지가 생각했던 내용을 완벽하게 담고 있었다. 수하의 비서나 부하직원이 상급자의 의도와 속내를 모두 파악하고서 그에 맞는 대응을 미리 준비해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재주에 크게 놀란 고선지는 봉상청을 매우 총애하게 되었다. 훗날 고선지 자신이 안서절도사로 승진한 뒤에 수도 장안으로 보고하러 갈 때마다 안서도호부의 최고책임자로 봉상청을 대신 세웠을 정도였다. 훗날 이 두 사람은 비극적인 최후의 순간도 함께하게 된다.

 

● 과욕이 불러온 결정적인 패배

고선지는 안서도호부의 절도사로 임명된 후에도 수년간에 걸쳐 서쪽의 이슬람 세력인 사라센 제국의 동쪽 진출을 막고, 토번이 파미르고원 일대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주력했다. 고선지는 750년에 대대적인 2차 서역 원정에 출정했다. 이때 목표가 된 지역은 소발률국보다 더 서쪽에 있는 파미르고원 서쪽의 돌기시와 석국이었다.

 

이번 원정의 배경에는 토번이 아닌, 이슬람 세력의 진출이 있었다. 고선지가 아직 1차 원정을 나서기 전에 이슬람의 군대가 중앙아시아로 쳐들어와 그곳의 여러 국가들을 군사적으로 압박했던 적이 있었다. 이때 궁지에 몰린 왕들이 당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당이 파미르 고원 인근의 토번 세력을 틀어막기도 급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현종 황제는 이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파미르고원 서쪽의 석국과 돌기시 등의 국가들이 당과 관계를 단절하고 이슬람 세력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747년에 고선지는 연운보의 토번을 누르고 소발률국을 복속시켰으며, 얼마 후 또다시 파미르 고원 서쪽의 이슬람에 복속한 석국과 돌기시 등의 세력들을 정벌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던 것이다. 고선지의 자신감에 매료된 당 현종은 고선지의 2차 출정을 허락했다.

고선지의 석국 정벌은 75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약 2개월간 이어졌다. 이전에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했던 1차 정벌 때와는 다르게 천산산맥을 넘어 지금의 타슈켄트 지역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일찌감치 돌기시를 정복한 당나라 군대가 석국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궁지에 몰린 석국 왕 거비시는 일찌감치 전투를 포기하고 고선지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만약 여기서 고선지가 석국의 항복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들의 정권을 유지해주는 선에서 그쳤다면 훗날 별탈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선지는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었던 석국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는 평화적으로 항복해온 국왕 거비시를 체포하여 자신의 군대로 압송했다. 또한 군대를 풀어 석국의 왕궁과 수도 일대를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이때 고선지는 슬슬(瑟瑟·청금석)이라는 희귀한 보석 10여 가마와 낙타 5~6마리에 가득 실린 황금, 그리고 좋은 말 등 왕궁의 귀중품들을 잔뜩 챙겼다. 게다가 힘들게 끌고 가봐야 별 효용이 없는 노약자 포로들을 살해하고, 젊은이들은 모두 노예로 삼았다. 중국 측 기록에서조차 이러한 고선지를 두고 “성품이 탐욕스러웠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결코 고선지가 재물에 초연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는 이렇게 탈취한 노예와 재물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렸다고 한다. 이렇게 재물로 출세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가는 그의 처세방식은 성공가도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나, 재물이 끝도 없이 생성되는 건 아니므로 결국 또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석국에 대한 파렴치한 약탈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방식이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의 이런저런 요구들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앞서 고선지의 출세를 도왔던 환관 변령성의 경우 고선지의 원정에 사사건건 참견하거나 뇌물을 요구했던 것 같다. 나중에 고선지가 그의 무리한 요구들을 거절하자, 변령성은 깊은 앙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고선지는 750년까지 이어진 2차례 원정을 대대적인 승전으로 이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이 서역의 여러 나라와 실크로드 인근의 여러 세력들을 장악함에 따라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당과 이슬람 세력을 저울질하던 국가들은 당으로 조공을 바치는 사절들을 보내왔다. 이들의 행렬은 모두 고선지가 있는 안서도호부에서 가장 먼저 수렴되었다. 고선지는 사실상 중앙아시아 지역의 총독이나 다름없었으며 당의 실크로드 교역은 최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 수도 장안은 더욱 번영했으며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고선지가 대외원정 과정에서 저지른 만행들은 그저 조용히 잊힐 수 있는 과오가 아니었다. 고선지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온 석국 왕 거비시는 수도 장안으로 압송되어 현종에게 바쳐졌는데, 현종은 석국왕을 용서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처형해버리고 말았다. 고선지의 잇따른 활약에 고무된 당 제국의 오만이 작용한 것이다. 항복한 국왕을 끌고 가서 죽였다는 소문은 곧바로 서역의 여러 나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석국 현지 주민들의 반발과 분노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으며, 이웃한 서역 여러 나라들도 분노가 폭발했다.

특히 고선지가 석국을 정복했을 때, 석국의 왕자가 요행히도 도망쳐 나왔다. 그는 서역의 여러 나라들을 상대로 고선지가 항복한 나라를 기만하고 약탈하는 폭거를 저질렀음을 토로했다. 이렇게 반당 세력을 결성하던 석국의 왕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은 중앙아시아의 패권에 관심이 많았던 이슬람세력 압바스 왕조였다. 압바스 왕조는 당 세력을 축출하자는 요청에 호응하여 지야드 이븐 살리흐라는 장군에게 3만명의 군대를 주어 출정시켰다. 고선지가 석국에서 자행한 파렴치한 행위에 불만을 품었던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여기 합세하면서 반당 연합군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고선지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급히 한족병사 1만과 천산 방면에 거주하던 케를룩이라는 유목부족의 군대 2만 등을 규합하여 대략 3만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기록에 따라 고선지 군대의 총병력을 7만으로 기록한 것도 있다. 어느 쪽이 맞든 간에 이전의 1,2차 원정 때 데려갔던 1~2만 수준의 원정군과 비교할 때 꽤나 대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751년 음력 7월, 그 유명한 탈라스 회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쟁은 당나라와 이슬람 세력이 격돌한 최초의 전투였으며,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양측이 모든 것을 걸고 맞붙은 한판이었다.

전투는 현재 카자흐스탄 가장 남쪽에 있는 타라즈 부근의 아틀라흐라는 곳에서 벌어졌다. 전투는 닷새 동안 벌어졌는데, 양측이 치열하게 대치하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즈음, 당군과 연합해있던 케를룩이라는 부족이 난데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려 2만이나 되는 케를룩의 군대가 갑자기 후방을 치자, 고선지의 본대는 순식간에 전열이 흐트러져 버렸다. 여기에 지야드 이븐 살리흐가 이끄는 반당 연합군이 협공하고 들어오자 승부의 추가 결정적으로 기울고 말았다.

다시 전열을 갖춘 당군이 며칠 동안 끈질기게 버티면서 이슬람 연합군에 큰 피해를 안겼으나, 전세는 점점 더 불리해지고 있었다. 이에 고선지는 닷새째 되는 날 남은 군대를 이끌고 새벽에 몰래 철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좁은 산길을 지나가야 했고, 앞서 철군했던 다른 부족의 군대와 말, 낙타 등과 뒤엉키고 말았다. 결국 퇴각하던 당군은 부대별로 서로 연락이 끊어진 상태에서 대부분 쫓아온 아랍군에 의해 붙잡히거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고선지도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빠져나온 대참패였다.

고선지가 이 전쟁에서 펼쳤던 작전과 관련해 여러 가지 논평이 있지만, 일단 3만 이상의 대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상당히 멀리까지 진격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전의 1,2차 원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적의 진영 깊숙이 파고들어가 중심부를 타격하는 방식을 고집했다. 이것은 적의 힘이 온전히 결집되기 전에 빠르게 타격하는 기습전법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상대가 상당한 세력을 모은 뒤에 치르는 대규모 회전에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주변국들의 당에 대한 충성심에 균열이 생긴 상황이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될 수도 있었다.

특히 고선지가 과거에 석국 원정과정에서 무리한 정벌과 약탈 행위를 했기 때문에 서역 여러 나라들이 등을 돌렸던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당에 수십 년간 충성해오던 케를룩의 군대가 전투 도중에 갑자기 이슬람 쪽으로 돌아선 것 역시 미리 계획된 반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선지의 성공에 대한 조급함과 과도한 욕심이 불러온 실패였다. 그의 천재적인 군사적 능력도 스스로의 인간적인 한계를 온전히 덮지는 못했던 것이다.

탈라스 전투 이후 한족왕조는 다시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주변의 여러 세력들이 모두 이슬람 세력으로 돌아서면서 그들의 종교․문화도 역시 이슬람의 영향 속에서 전개되었다. 탈라스 전투가 동서 문명의 교류사의 중요한 일대 사건으로서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고선지가 만약 탈라스에서 지지 않았다면, 서역과 중앙아시아 일대의 많은 나라들의 모습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3부에서 계속)

안정준   kyuri21@naver.com  최근글보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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