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오'와 '구국공훈'을 단칼에 분리할 수 있을까

[김형민의 역사체크] 현충원 '친일파 파묘 논란' 이종찬, 김석원, 백선엽의 삶

  • 기사입력 2020.06.06 07:30
  • 최종수정 2020.06.08 10:13
  • 기자명 김형민

현충일이다. 조기를 내걸고 경건히 하루를 보내야 하는 날이다. 군부독재가 지배하던 어린 시절, ‘태극기를 걸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반작용인지 시위 현장에서 태극기를 들었던 경우를 제외하면 국기에 대한 예의가 각별한 편이 아니다.

하지만 또 한켠으로는 국기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도 스며든다. 국가의 상징이라서가 아니라 국기에 서린 역사를 돌아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옷깃이 여며지는 것이다. 저 깃발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눈물과 땀을 쏟아붓고 자신의 일생과 영달은 물론 가족들의 안위까지 포기하며 싸우다 죽어갔던가, 세상 어느 나라든 역사에 굴곡이 없는 나라가 없고 그 굴곡에 맺힌 희생이 없는 나라가 없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들을 기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호국영령’(護國英靈)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으랴.

이번 코로나 사태 때 우리가 저만치 올려다봤던 나라들, ‘선진국’이라 폼 잡던 나라들의 뜻밖의 민낯을 봤다. 정부가 나서서 공항에서 다른 나라의 마스크를 날치기하고 일반 국민들은 마스크가 없어서 천쪼가리를 찢어 쓰는 촌극이 ‘선진국’에서 펼쳐질 줄이야 뉘 알았으랴. 이즈음 K방역으로 이름을 드높인 한국 정부에게 또 한 번 크게 박수를 쳐 주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바로 6.25 참전국 16개국과 기타 의료 지원국 등에 보은(報恩)의 마스크를 보낸 것이다.

‘대한민국’이 살아남은 이유는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 주었기 때문이며 다시 한 번 감사한다는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고마운가. 내가 김정은같은 자의 치하에서 눈물 질질 짜면서 만세를 부르는 나라에서 살고 있지 않은 것이 그들 덕분인데.

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룬 ‘호국영령’에는 두 부류의 큰 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지칠 줄 모르고 투쟁하며 끝내 해방을 일궈낸 독립운동가들 (독립운동가들이 뭘했냐고 따지는 이들만큼 무식한 자들도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침략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규군, 그리고 그들을 도와 ‘지원군’으로 압록강을 건너왔던 중공군들에 맞서 싸워 끝내 이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이다.

독립운동의 목표는 같았으되 과정은 같지 않았고 싸움의 방식도 차이가 있었으며 독립한 나라에 대한 희망도 저마다 달랐다. 좌와 우가 있었고 무장과 외교가 있었으며 해외와 국내가 있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했다는 자체로, 그 엄혹한 시기 결단을 내려 일신을 역사의 제단에 바쳤던 모든 이들은 존경과 존중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설사 독립 이후에 벌어진 좌우익의 상쟁과 전면전과 그 후에 둘러쳐진 철벽의 남과 북 사이에서 어떤 전선에 서 있었든, 독립운동의 공적은 인정받고 기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 없이 어찌 우리가 있겠는가.

언젠가 ‘진보’ 출신 국회의원이 “김일성의 외삼촌도 독립운동을 인정할 것인가?”라고 얼뜬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당연하다. 해방도 안보고 죽었던 그(강진석)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여동생 강반석의 아들이 공산국가의 수령이 될 줄 알고 독립운동을 했겠는가. 의열단의 이름 하나로 김원봉은 그 동상이 수십 개 세워져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가 북한에 가서 뭘 했든 상관없다. 일제 하 가장 치열하게 투쟁했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게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없었을진대, 그들이 짐작도 못한 미래 때문에 그들의 역사가 지워져서는 안될 것이다. 독립운동의 공적과 그들의 지난한 역사는 끝까지 밝히고 선양하여 몇 대의 후손에게라도 보상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사람들도 그 공훈이 정확하게 인정되고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면 그들을 기리고 존중하는 데 아낌이 있어서는 곤란하고, 그들의 공과는 엄정히 평가하되 그들의 공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난리가 날 수도 있는 한 마디를 던져 본다. 그들이 “친일파였다고 하더라도”

국립묘지에서 아무개 아무개들을 ‘파묘’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높다. 군인권센터의 성명 중 일부.

“현충원에는 대한민국이 아닌 일본제국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부역한 군인들이 56명이나 묻혀 시민들의 참배를 받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32명, 국립대전현충원에 24명이 있다. 이들은 광기 어린 일본제국의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전쟁 범죄에 가담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5조에 따라 국제 평화의 유지를 위해 노력하며, 침략전쟁을 부인한다. 헌법에 반하는 삶을 살아온 이들이 현충원에 묻혀 추앙받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일단 사실이 아닌 것부터. 그들이 국립묘지에 묻힌 이유는 ‘침략전쟁에 부역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만약 파묘하자는 사람들이 문제의 인물들이 전쟁 때 도망가 있었거나 공훈을 가로챘거나 적과 내통했다는 증거를 가져온다면 나부터 곡괭이를 들겠다. 그게 아니라면 ‘대한민국이 아닌’이라는 표현은 틀렸다. 더하여 묻겠다. 친일파의 정의를 잘 모르겠으나 친일파라고 치고, 그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다면, 앞에서 언급한 바 우리 정부가 수십년 뒤에도 마스크를 보내 드린 참전국 군인들만큼의 경의의 대상이 돼서는 안되는가? 친일은 그 혐의대로 규명하되 대한민국의 ‘호국영령’이 되면 안되는 것인가?

독립운동 당시부터 좌우익은 확연히 나뉘어 있었다. 서로 죽고 죽이기까지 할만큼 살벌하기도 했다. 독실한 기독교 우익 장준하가 보기에 천하의 김원봉은 여인계 써서 젊은 청년들 꼬시려 드는 천박한 양아치였다. 김원봉이 실제로 그랬다기보다는 장준하의 편견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좌익들에게 김구는 몇 번의 성공적인 테러를 펼친 테러리스트에 완강한 우익 꼴통일 수도 있었다. 분단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가시화된 것은 맞지만 우리 안의 분단도 상당했다는 뜻이다. 더하여 하나의 큰 착각.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들은 그렇게 물과 불 같고 두부로 딱 잘라서 갈라세울 수 있는 집단이었을까? 특히 ‘대한민국’에서?

이종찬 장군
이종찬 장군

이종찬 장군은 분명한 ‘친일파’ 출신일 것이다. 해방 당시 일본군 소좌였다. 일제 35년 내내 조선인 중에는 둘 밖에 안 나온 고급 훈장 수훈자였다. 그의 할아버지 이하영은 대한제국의 대신으로 일제에서 자작(子爵)이라는 귀족 칭호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친일파 중의 친일파’가 맞겠다. 미군에 억류됐다가 해방 다음 해에야 귀국한 그는 귀국 후 한동안 미군정이 세운 조선 경비대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일제에 부역한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자숙하고 반성하면서 야인(野人: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으로 살겠다. 그는 반민특위에도 자진해 출석하여 자신의 ‘죄상’을 진솔하게 토로했다. 반민특위 조사관들도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과 작위 세습을 거부한 점 등을 들어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그렇게 3년을 낭인으로 보낸 뒤에야 이종찬은 대한민국 군대에 투신한다.

정규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됐을 때, 이종찬 당시 육군 참모총장은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을 제치고 일면식도 없으며 군 내부에서 소외되던 광복군 출신 안춘생 장군을 육사 교장으로 임명했다. 그의 말이다. “초대 육군사관학교장은 대한민국의 얼굴인데, 당연히 광복군 출신이 교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다 안춘생 장군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이니까요. 나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이 한 명만 배출되어도 육군사관학교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는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5.26 부산 정치 파동 같은 황망한 정치적 음모를 준비하면서 병력을 빼돌려 부산에 투입하라는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한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때 이승만은 참모차장에게 이종찬을 포살하라는 망발까지 했다. 그 이후로도 그의 행적에는 기려야 할 것들이 많다. 이른바 친일파들이 이종찬의 반의반만이라도 반성하고 자신의 과거를 명예로이 씻었더라면 우리 역사에 이런 참담한 논쟁 자체가 없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 정도의 사람을 ‘친일파’로 몰아부쳐 그 뼛가루를 묘지에서 파내야 ‘민족정기’가 바로 서는가.

김석원 장군
김석원 장군

김석원 소장 같은 이는 조금 더 논란이 될 수 있겠다. 위에서 말한 바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받은 최고 훈장의 주인공 둘 중의 한 명이다. 그 스스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 생각”할만큼 친일 행적은 ‘빼박’이다. 그런데 그는 6.25 때 불리한 전황에서 가장 용감히 싸운 군인 중 하나임도 분명하다. 백선엽의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바 백선엽의 휘하 장교들이 “김석원 장군 밑에서 싸우게 해 달라.”고 호소해서 보내 줬다고 할 정도의 맹장이었다. 긴 칼 휘두르며 내달리는 일본군스러운 모습은 좀 민망했지만, 그는 인민군에 맞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영화 <포화 속으로>의 배경이 된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학생, 어머니에게 보내는 절절한 편지로 유명한 그는 1950년 7월 20일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20일 목요일 쾌청한 날씨다. 대구역에 나갔다가 학도병 모집 벽보를 보았다. “가자! 김석원 장군 휘하로!” 이 귀절이 나를 뜨겁게 했다. 김신부님께 상의했다. 조국이 위난에 처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쫓겨만 다녀서야 될까. 나는 결심했다.“ ‘김석원’의 이름이 그렇게 쓰였다. 이 학도병은 친일파였을까, 김석원의 행적을 몰라서,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그 휘하에서 목숨을 걸고자 나섰을까. 우리는 이 학도병 이우근을 ‘민족의식 없는 얼간이’로 치부할 수 있을까.

군인권센터 성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은 그 뿌리를 광복군에 두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정작 창군의 주역으로 현충원에 모셔놓고 떠받드는 대상은 대부분 친일파들이다. 임관을 앞둔 사관생도들은 현충원을 방문하여 호국영령을 참배한다. 국군을 이끌어 갈 이들이 침략전쟁에 가담하여 부귀영화를 탐한 이들에게 왜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그 기상은 추상 같고 의로움은 하늘을 찌르긴 한다. 그런데 기상과 의로움으로 휘두른 칼로 역사를 말끔하게 일도양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그 뿌리를 광복군에 두고 있다고 자부하는 건 맞는데 동시에 그 광복군들은 일본군 출신, 만주군 출신, 학병 출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인민군에 맞서 싸웠단 말이다. 그 관계를 친일파와 광복군으로 양단할 수 있겠는가? 무슨 재주로?

백선엽 장군
백선엽 장군

요즘 논란이 되는 백선엽을 발탁한 것은 조선 경비대 통위부장이자 광복군 출신 유동열이었다. 김창룡 같은 일제 밀정 출신으로 빨갱이라면 붉은 치마만 봐도 미쳤던 인간백정이 국립묘지에 있는 건 유감이긴 한데, 그 능력(?)을 사서 군내 좌익 프락치 적발에 투입한 것은 다름아닌 광복군 출신 이성가 장군이었다. 윤봉길 의거의 산파였다고 할 김홍일 장군. 더할나위 없는 독립운동가 출신이며 인민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하여 대한민국을 살린 김홍일은 역시 거물급 친일파 출신 군인으로 꼽히는 이응준의 절친이었다. 일제 강점기 김홍일이 중국으로 망명한 뒤 그 소식을 국내의 가족들에게 전달했던 것이 이응준이기도 했다.

6.25가 발발했을 당시 서부전선을 지키던 1사단 12연대장은 전성호 대령. 북로군정서 교관 출신의 노장이었다. 그는 몰려오는 인민군 탱크들에 맞서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고 사단장 백선엽의 명령으로 후송된다. 두어 달 후 전성호 대령은 영화 <장사리>의 배경이 된 장사상륙작전의 지휘관으로 투입됐다가 전사한다. 당시 국군 1사단을 공격한 건 인민군 1사단과 6사단. 6사단장은 팔로군 출신 방호산이라는 사람이었다. 전성호와 방호산은 같은 함경북도가 고향이며 만주에서 생활했으니 아는 사이일 수도 있었다. (나이 차이는 많지만) 전성호는 백선엽과 방호산 어느 쪽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우리 편’이라고 여겼을까.

더하여 질문을 던져 보자. 육형제가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혼자 살아돌아왔던 성재 이시영, 당시 대한민국 부통령은 백선엽이나 김석원 등을 “언젠가는 처단해야 할 민족 반역자”로 여겼을까?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청산리 전투의 영웅은 이종찬을 ‘일제의 주구’로 여겨 요즘의 민족주의자들처럼 이를 갈았을까? 전시연합대학 재학 중인 대학생 (즉 병역을 면한)들에게 “우리가 이 성대한 식전(式典)을 거행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3.8선 이북 전선에서는 우리 국군 장병 몇 백, 몇 천 명이 총칼에 선혈을 뿌리고 사장(沙場)에 백골을 묻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열변을 토한 심산 김창숙이 ‘군내의 친일파’들에 대해 피를 토하며 분노했을까? 그들이 국립묘지 근처도 못갈 역적들이라고 여겼을까? 솔직히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왕이 된다.”는 예언이 서려 있던 고르디우스의 매듭. 알렉산더는 이걸 낑낑대고 푸는 대신 칼로 잘라 버렸다. 어찌 보면 시원한 해결이고 ‘아시아의 왕’이야 누가 되든 말든 관계없으나 역사라는 이름의 매듭을 단칼에 자르는 것은 매우 미련하고 우매하다는 형용사를 모면하기 어렵다. 역사를 바라보며 뜨거워질 수도 있고 감격에 찰 수도 있으며 끓어오르는 분노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뜨거움과 감격과 분노는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오히려 망치기 쉬우며, 역사 아닌 것을 역사라고 착각하게 만들기 쉽다. 역사를 도식화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질문이 길었다. 결국 나의 질문은 다음의 두 가지로 수렴된다. “친일파를 일도양단 규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친일파였다고 치고, 그들이 대한민국의 건국과 생존에 공을 세웠다면 국립묘지에 묻힐 자격조차 상실되는 것이 맞는가?”

김형민   contact@newstof.com    최근글보기
필명 산하로 알려져 있다. 글을 맛깔나게 써서 팬이 많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1995년부터 방송 프로듀서로 일하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다수의 매체에 역사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10여권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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