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 칼럼] 6월 민주항쟁은 배반당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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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칼럼] 6월 민주항쟁은 배반당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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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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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머리에

해마다 6월 민주항쟁이 가까워지면 원고 써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글 내용이 언제나 재탕 삼탕에 그치는 게 아닐까 스스로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되도록 자세를 가다듬고 마음을 단정히 하려고 노력한다.

1960년 4월혁명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권을 세웠을 때,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를 경험했던 우리 국민은 이제 분단도 전쟁도 독재도 한꺼번에 넘어설 것 같은 기쁨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그 혁명의 주체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혁명의 전리품은 그 의미를 해석할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정파 분쟁에 골몰하고 있던 민주당에게 돌아갔다. 신•구파로 갈리어 싸우다가 집권 한 해도 넘기기 전에 5.16쿠데타 군부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줬다. 야당지로 알려져 왔던 동아일보는 군사쿠데타 하루 뒤 논설에서 “군사혁명은 구국을 위해 가능한 유일한 길—이 엄숙한 시기에 온 국민이 혁명완수를 위해 총진군해야 한다. 실로 위대한 건설에 일치단결하여 총진군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1961년 5월 17일자 사설)

5.16쿠데타 이후 온갖 독재와 부정부패의 군사통치를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극복할 계제에 이르렀을 때 4월 혁명 당시의 바로 그 민주당 세력은 적전분열을 일으켜 군사독재 세력에게 정권을 연장시켜 주었다. 해방 이래 분단체제를 유지하려던 내외의 기득권 세력이 6월 민주항쟁의 정치적 동력의 지원을 받는 민주당 세력이 집권했을 경우, 아직 시민운동이 광범한 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시민들의 민주의식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던 1960년대 초기와는 달리 냉전 기득권에게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필자는 봤다. 그런 이유로 김대중-김영삼 양 세력에 대한 분열공작과 지역주의 조장, 심지어 민주화운동 세력의 분열까지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필자는 1987년 7월 초순의 대대적인 정치범 석방조치에서 제외되어 감옥에 갇혀서 민주세력의 분열과 대선패배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정치적 분별력이 든 나이에 두 차례 같은 정치세력이 군사독재 세력에게 자신들의 분열 때문에 국민의 투쟁으로 얻은 민주주의 권력을 빼앗기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1987년 이후 33년이 흐른 2020년은 전혀 다른 정치지형이 전개되고 있다. 극우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야당은 존속 여부를 걱정해야 할 한계에 부닥쳐있다. 중도개혁 세력으로 간주되는 여당은 180석의 의석을 차지한 거대세력으로 비대해졌다. 200석이 필요한 개헌을 제외하고는 무슨 의안이든지 통과시킬 수 있는 정치적 힘을 가지게 되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전개된 한국의 정치발전은 세계가 주목하는 역동성을 보여 주었다.

87년 6월 민주항쟁 서울시청 광장 집회
87년 6월 민주항쟁 서울시청 광장 집회

 

2.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의의

비록 김대중-김영삼 세력의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전두환 신군부세력의 잔명을 유지시켜주고 말았지만 6월 민주항쟁은 한국의 민주항쟁으로서뿐 아니라 세계사적 민주항쟁으로서 의미를 부여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국내의 민주항쟁의 의미에서도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곳곳에 뿌리내린 군정의 폐해를 제거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두환 5공 세력의 2인자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1988년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호남), 김영삼(경남), 김종필(충청)의 3金 지역주의 정당들이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냈다. 3김의 야당의 주도로 만들어낸 국회 청문회가 군사독재의 폐해 일부를 걷어내자 각 분야에서 민주적 요구가 분출했다.

1988년에 열린 서울올림픽은 민주화와 산업화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민주 한국을 세계에 부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냉전시대의 소련과 미국의 대결로 분열의 상처를 남겼던 모스크바 올림픽과 LA 올림픽과는 대조적으로 전 세계가 하나로 뭉친 서울올림픽은 세계를 하나로 묶는 축제가 될 수 있었다. 직후에 전개된 세계사적 전환은 서울올림픽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물론 미국과 소련의 정상이 핵무기 감축협상에 잇따라 성공함으로써 동서냉전의 종식 분위기도 고조시켰다. 1989~90년의 독일통일, 소련방 해체와 동구권의 체제전환, 다시 말해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가 일어났고 중국은 등소평에 의한 개혁개방이 선포되었다. 87년의 6월 민주항쟁과 88년의 서울올림픽이라는 세기적 이미지를 등에 업은 한국의 대기업들은 탈냉전-평화공존의 흐름을 타고 러시아로 중국으로, 동유럽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감히 넘겨다보기도 두려웠던 미국으로까지 거대한 진출의 길을 열었다. 분단과 강대국들의 벽에 갇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던 한국인이 기업으로, 스포츠와 예술로 벽들을 넘기 시작했다.

 

3. 냉전 틀에 6월 민주항쟁 가두려던 보수-극우의 실패

88 서울올림픽을 전 세계의 찬사 속에 치러내고 독일통일을 지켜보고 소련방의 해체와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를 확인하게 된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냉전주의자들은 다시 정책을 바꿨다.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 베트남에서도 공산권 붕괴가 있을 것으로, 있어야 할 것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한국의 보수냉전세력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선언(남북공존의 공식화), 각급 남북회담의 개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한반도비핵화선언 합의 등 남북관계의 접근을 실현시키고 중국 및 신생 러시아공화국과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성립시키면서도 6월 민주항쟁으로 합의되었던 군사독재체제의 점진적 해소와는 정반대의 노선을 채택했다. 그것이 1990년의 3당(민정, 통일민주, 민주공화)합당, 보수대통합을 통한 거대보수여당인 민주자유당의 결성이었다.

1961년 박정희의 군부쿠데타와 1980년 전두환의 5.18 광주학살을 통한 분단독재체제의 기득권을 재현하려는 보수대통합은 탈냉전, 평화공존의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것이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과 수교하여 결과적으로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는 흐름에 역류하여 미국과 일본은 북한을 외교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봉쇄하려 했다. 당시 한국에 등장한 보수대연합은 미국과 일본의 대북 봉쇄-붕괴 정책에 동조했을 뿐 아니라 선도하고 있었다. 동유럽의 체제변혁에 방어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던 동아시아의 중국 북한 베트남도 천안문 사태를 주시하면서 대응했다. 1993년의 제네바 미북 핵협상의 중단과 그에 대응하는 북한의 핵보유 추진 강행은 그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4년 한반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의 주선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자 남한과 북한, 북한과 미-일이 관계개선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관심이 집중됐다. 정상회담 직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은 운명의 여신이 한반도를 차갑게 외면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긴장이 고조되었다. 상황악화를 막기 위해 국회 질의에서 필자를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조문 혹은 조문사절의 파견 용의를 정부당국에 제기했지만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오히려 대북 적대감을 드러냈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이른바 ‘조문파동’만 일으켰다. 비록 보수대연합을 통해 집권했지만 스스로 개혁보수세력으로 자임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대북 강경정책을 고수한 것은 탈냉전-평화공존의 세계사적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과 수교했는데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적대시하여 봉쇄와 제재를 강화하는 것보다도 한국이 한발 앞서 나간 것은 아이러니였다. 북한은 봉쇄와 제재를 이겨내기 위해 기아와 죽음을 무릅쓴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고 핵실험도 이어갔다. 한반도는 탈냉전-평화공존의 예외지대로 남아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의 시대정신은 배반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한 시민정신은 꾸준히 성장하여 두 차례 민주정권이 들어섰고 한반도 평화공존과 복지사회를 향한 제2기 시민정치운동도 준비되고 있었다.

6월항쟁을 촉발시킨 이부영의 옥중 비밀서신
6월항쟁을 촉발시킨 이부영의 옥중 비밀서신

 

 

4. 박종철군의 죽음 등 수많은 희생은 헛되었는가—마무리에 대신하여

필자는 70년대 유신체제의 해직언론인이었다. 군사독재가 계속되는 한, 언론인으로 다시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절감했다. 이를 끝내기 위한 민주화운동에 투신해야 했다. 여러 재야민주화운동단체를 결성하고 참여했다. 1985년부터 직선제 헌법 쟁취운동을 전개했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야당인 신한민주당이 직선제 개헌쟁취 공동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 체포됐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박종철 서울대생의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조작축소된 사실을 취재하여 감옥 밖으로 알렸다. 감옥 안의 제약받는 조건 속에서 취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패하여 발각되었을 경우도 각오해야 했다. 필자는 현직이 아닌 해직기자였지만 기자로서의 소임을 감당했고 역사적 특종을 한 셈이었다. 위험이 따르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민주 교도관들에게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박종철군 25주기 추도식에 함께 참석하여 진실을 밝히는 안유 전 보안계장과 한재동 전 교도관
박종철군 25주기 추도식에 함께 참석하여 진실을 밝히는 안유 전 보안계장과 한재동 전 교도관

 

 

박종철군, 이한열군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과 민주인사들의 죽음과 투옥 그리고 투쟁이 있었기에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6.29 직선제 선언을 이끌어냈다. 1960년의 4월혁명의 경우에도 학생들과 시민들이 투쟁하고 희생하여 안겨준 민주권력을 민주당이 분열하여 싸우다가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게 빼앗겼다. 1987년도 다시 분열하여 선거를 통해 군사독재 잔여세력에게 공여했다. 88 서울올림픽과 함께 탈냉전 평화공존 시대에 한국에 정통성 있는 민간민주정권이 수립되었을 경우를 상상해봤다. 그 역사적 파장은 세계적이었을 것이다. 남북관계와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급변했을 것이고 경제적 진출도 경이적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당시 민주정부가 들어서지 못한 것에 밤잠을 설친다.

그 이후 두 차례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다시 두 차례 극우 보수정권이 들어섰지만 2016~17년의 촛불시민운동은 한국 시민의식을 세계시민의 선두에 올려놓았다. 2020년의 코로나19 감염병 위기를 그 시민의식으로 넘어서는 장관을 세계시민들 앞에 보여 주었다. 공동체를 위한 작은 헌신의 집합, 그 위대한 성과를 경험한 한국 시민들의 떠들썩하지 않은 자긍심은 2020년의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변함없을 것 같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고르게 다졌다. 그리고 이긴 자에게도 말한다. 그대들도 오만한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가차 없이 또 바꿀 것이라고.

그 모든 바탕에는 1987년 민주항쟁의 미완성이 완성을 향해 밀고 가려는 동력이 있음을 잊지 않는다. 지금도 그 동력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필자 이부영 약력: 1942년 9월 26일 서울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졸, 14, 15, 16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의장(전),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현),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현),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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