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봉'은 게이샤 데뷔를 뜻하는 잇뽕(一本)에서 유래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8.11.2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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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유행했던 ‘따봉’이란 말이 있었다. 따봉은 1990년(?) 롯데 델몬트에서 출시한 주스의 이름으로, 오렌지의 명산지라는 브라질 현지에서 촬영한 텔레비전 광고가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면서 삽시간에 유행어가 되었다.

“브라질에서는 정말 좋은 오렌지를 찾았을 때, 델몬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따봉!”

 

이밖에 과즙음료 시장에서는 최근 롯데 델몬트의 따봉 광고 구호가 풍미하고 있다. 경쟁 업체인 해태 썬키스트와 같이 해외 현지 촬영을 통해 신뢰성을 높이는 것에 주력해 만든 이 광고물은 남녀노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 광고로서 빅히트를 한 반면 그 효과가 제품에 이어지지 않아 또 하나의 화제를 뿌리고 있다.

 

‘따봉’은 이수만 씨의 엄지척과 함께 ‘최고’의 의미로 강조되었지만, 포르투갈어 ‘따봉(tá bom)’은 ‘좋다, 괜찮다’ 정도의 뜻이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지만 당시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말의 거부감(?) 없이 애용하던 전 국민의 유행어였다. ‘따봉’이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어였기 때문이다.

 

“자기야, 이 옷 어때?”

“따봉!”

“김치찌개 맛있어?”

“따봉!”

“나 뱃살 좀 빠진 것 같지 않아?”

“따봉!”

 

그러나 최근 들어 연예 뉴스에서 부쩍 눈에 띠는 ‘입봉’은 ‘따봉’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도대체 ‘입봉’은 무슨 말일까?

김민호 감독은 "나는 첫 영화는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에서 연출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강우석 감독을 보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꿨다. 이후 7~8년간 시나리오 쓰면서 포기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마동석이 잡아줘 여기까지 왔다"고 뭉클한 소회를 전했다.

 

7~8년간 시나리오 쓰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마동석이 잡아 줘서 여기까지 왔고, 드디어 ‘입봉’을 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다음 기사도 같은 의미로 ‘입봉’을 쓰고 있다.

추상미 감독은 10월 15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감독 추상미) 시사회 후 간담회를 통해 "20년 동안 배우로 활동하다가 이제 막 감독으로 입봉한 추상미다"고 소개했다.

배우 추상미 씨가 첫 영화를 만들어 신인 감독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추 씨는 스스로 “20년 동안 배우로 활동하다가 이제 막 감동으로 입봉한 추상미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런 식으로 ‘입봉’은 널리 유통(?)되고 있다. 다음은 ‘입봉’에 대한 네이버 지식in의 질의응답 내용이다.

 

새로운 낱말, 생소한 단어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하다. 그런데 정작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누구보다 먼저 찾고 해설해야 할 기자들은 검증은커녕 기초적인 질문조차 하지 않고 ‘입봉’이란 말을 남발하며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추상미 씨는 어찌하여 ‘입봉’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을까? 추 씨가 영화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인가? 나는 젊은 시절 방송국에 들어가서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도대체 무슨 소린가 했지만, 영화계나 방송국에서 조감독이나 조연출을 오래하다가 감독, 피디가 될 때, ‘입봉한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한 간지를 비롯해 니주, 니마이, 삼마이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본어 잔재를 마치 그 바닥의 전문용어인양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계야 특별히 무슨 캠페인 같은 것을 하지는 않지만, 방송국에서는 일상생활에서나 당구장, 공사현장 등에서 일본말을 쓰지 말자는 캠페인을 자주 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 뒤로 호박씨 까는 짓 아닌가!

정재환 저서 <시바이는 이제 그만>

1999년 12월에 – 역시 나는 게으르다 -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픈 마음에 「시바이는 이제 그만」이란 방송 제작 현장에서 사용하는 일본어 잔재 순화집을 냈었다. 다음은 그 머리말이다.

 

날마다 오도시를 생각하며 시바이를 연구하고 겐또를 굴리고 니주를 깔고 제아무리 간지를 살려도 고작 삼마이 신세를 면할 수 없는 것이 현재 우리 방송인들의 말글살이입니다.

방송사 안에 웬 일본말이 그리 많은지, 바깥사람들이 알면 대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말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일본말 찌꺼기를 걷어치우자면서 정작 우리 방송인들은 왜 모범을 보이지 않는 걸까요? 과연 우리에게 우리말을 사랑하자고, 바른말 고운 말을 쓰자고, 시ㆍ청취자들을 계몽할 자격이 있는 걸까요?

 

이 작은 책자를 3,000부(?) 찍어 배포했는데, 방송아카데미 같은 곳에서 방송국에서 일하려면 알아야 하는 일본어를 가르친다면서 교재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할 말을 잃었었다. 34쪽에 ‘입봉’이 있다.

[입봉]

‘이 아무개 PD가 입봉을 한다고?’

一本(いっぽん) : 책 한 권, 나무 한 그루.

(해설) 속어로 ‘일정한 기준에 달한 술집기생’을 뜻합니다.

요컨대 견습 기생에서 손님을 제대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데,

방송사에서는 조연출가가 연출가로 올라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맡게

될 때 이 말을 씁니다.

---> 조자떼기(조연출의 ‘조’ 자를 뗀다는 의미. 발음은 조짜떼기).

~ 김 아무개 조 자 뗐어? 도대체 너는 조자떼기가 언제야?

 

순화 대상 용어로 올린 ‘입봉’의 일본어 발음은 ‘잇봉(いっ‐ぽん)’에 가깝다. 일본어 잇봉(一本)에는 ‘나무 한 그루’, ‘한 권의 책’ 같은 뜻도 있으나, 위와 같이 우리나라 방송과 영화계에서 유통되는 맥락과 같은 의미는 다음과 같다.

いっ‐ぽん【一本】

5 それ一つだけで独立しうる状態であること。特に、一人前になった芸者。→半玉(はんぎょく).

그것 하나만으로도 독립할 수 있는 상태. 특히 제 몫을 할 수 있는 게이샤. →半玉(はんぎょく): 한교쿠, 반대말. 아직 배우는 시기에 있는 어린 기생.

コトバンク(코토반쿠ㆍ아사히신문 사전서비스)

 

일본의 ‘게이샤’라고 하면 그냥 기생 정도로 생각하지만, 제대로 된 게이샤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정식 게이샤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엄격하고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손가락에 피가 날 때까지 일본악기 샤미센을 연주해야 하고, 목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노래 연습을 한다.

뿐만 아니라 다도, 전통무용, 일본의 전통가요, 서예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렇듯 엄격한 교육과 고통스러운 수련을 통해 하나의 진정한 게이샤가 탄생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을 잇뽕(一本)이라고 한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 포스터

이와 같은 게이샤 업계의 용어를 해방 후에도 우리 영화나 연극, 방송계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오고 있다. 과거에는 이들 분야에서 사용하는 일본어 용어(일본어 잔재)는 철저하게 그들만의 울타리 안에서만 유통되었고, 특히 방송에서 일본어는 금기어였다. 하지만 채널이 많아지고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담벼락은 무너지고, 일본어 잔재는 신조어나 인터넷용어로 변신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해방 이후 들어온 가라오케·이지메·쓰나미·오타쿠 같은 현대 일본어와 달리 ‘입봉’은 조선어 말살을 목표로 했던 일제의 동화정책에 따라 조선인들에게 사용을 강요했던 일본어 잔재 중 하나다. 1999년 순화집을 낼 때에는 장난기가 발동해 ‘조자떼기’를 제안했었지만, 그냥 “입봉작 → 데뷔작 / 드디어 입봉했다 → 드디어 감독(피디)됐다”처럼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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