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전능'한 피디는 자막으로 현실을 왜곡한다

  • 기자명 박현우
  • 기사승인 2018.12.03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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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콘텐츠들은 영화, 드라마, 예능 할 것 없이 연출 기법이 대동소이하다. 한국인들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집착하고 그것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타인이 자신의 말이나 행동의 의도를 왜곡해서 이해-오해하면 안된다는 강박이 있고, 어떤 행위를 하기 전부터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행위인지 먼저 따지고 사회에서 용납되지 못한다 생각하면 빠르게 접는다. 집단의 힘이 강하다보니 개인의 행위는 ‘예의'라는 이름으로 집단의 합의에 따라 침묵되거나 제재된다. 이런 경향은 콘텐츠 연출에서까지 영향을 미친다. 연출자들은 수많은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오해 받고 싶지 않아하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기 보다는, 다소 '설명충'스럽게 콘텐츠를 연출한다.

한국 예능은 일본 예능과 마찬가지로 온 화면이 자막으로 범벅된다. 누가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을 다양한 모양으로 화면에 띄운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라고 굳이 자막을 넣어 시청자들에게 한번 더 알려준다. 화면에 나오는 사람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PD들은 어떻게든 자막을 넣으려고 애를 쓴다. 조용하면 또 조용하다고 자막을 넣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은 PD가 선택한 사람의 말을 듣게, 아니 읽게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처럼 일종의 'PD픽'이 발생하는 것.

혹자는 자막을 넣는 것이 청각 장애인을 배려하는 거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청각 장애인을 배려하는 것라면 한국 예능 속 자막은 너무 제멋대로, PD 마음대로 투입된다. 어떤 인물의 말은 자막으로 나오는데 왜 어떤 이의 말은 자막으로 처리가 안되나? 장애인을 배려하는 거라면 모든 인물의 말이 하나의 원칙 하에 자막으로 처리되어야하고, 폰트는 어느 장면에서나 일정해야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막들은 먼 옛날의 “섹도시발”처럼 일정한 규칙이나 원칙의 지배에 놓이지 않고 제멋대로, 오색찬란하게, 시청자들을 정신없게 하는 방향으로 쓰인다.

전설의 '섹도시발' 자막.
'섹도시발' 자막은 다양한 예능에서 재연되고 이후 '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음악 사용법도 딱히 다르지 않다. 한국 예능은 음악을 쉴 틈 없이 써댄다. 전하고 싶은 어떤 감정선이 있으면 음악으로 시청자들에게 우겨넣는 식이다. 드라마나 영화라고 다를까?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음악이 언제 멈추는지 확인해보시라. 장담컨데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음악이 끝나면 가끔 음악이 없는 순간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드라마 PD들은 한 음악이 끝날 때쯤에 다른 곡을 삽입해서 새로운 감정선을 만들기에 그 빈틈은 없다시피 하다.

그 음악들은 대체로 감정선이 단순해서 연출자의 의도를 간파하는 것을 쉽게 만들어준다. 시청자들은 음악을 듣자마자 자기들이 슬퍼해야하는지, 기뻐해야되는지 빠르게 감을 잡는다. 미국 드라마 <The Good Wife>의 음악이나 <House Of Cards>, <Game Of Throne>, <Westworld>, <Walking Dead>의 그것들과 달리 뚜렷한 감정선을 담고 있고 때로는 유치뽕짝한 가사까지 담겨있어서 의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청각 장애인들을 배려하는 거라고 보기도 힘들다.

이런 연출법이 촌스럽다는 것은 취향의 문제고, 좋아하는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또, 이런 연출법은 그다지 고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에 양산형 한국 예능-드라마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어디에나 달라붙을 수 있다는 점에서 노동친화적이기도 하다(시간에 쫒겨 제작하기 때문에 이런 연출법이 개발되었을 거라는 가설도 가능하다). 다만, 이런 방식은 소비자들을 한 구석에 몰아넣어 다양한 해석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고 때로 이런 연출은 현실을 왜곡한다. 제작자가 자신의 의도를 어떻게든 주입시키려다보니 현실까지 편집하기에 이르는 거다.

한국 예능 <하트시그널>을 교보재로 삼아보자. 일단 이 예능은 대부분 한국 예능들이 그러하듯 일본에서 많은 ‘참고'를 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일본에서 제작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테라스 하우스>와 포맷이 상당히 유사하다. 일본의 게스트들이 머무르는 곳은 “테라스 하우스"고 한국의 게스트들이 머무르는 곳은 “시그널 하우스"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넓은 집에 모여서 썸 탄다는 설정이나 패널들이 나와서 게스트들의 행위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설정도 동일하다.

두 예능은 한 공간에 남녀로 이루어진 사람을 모은 뒤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한다. 그런데 중대한 차이가 하나 있다. 일본의 <테라스 하우스>는 사람들을 모아두고 정말 관찰만한다. 제작진들이 하는 거라고는 카메라가 설치된 공간을 주고, 컷편집을 하는 것 정도다. 말이 좋아 '테라스 하우스'지 그 곳은 사람들이 담겨있는 일종의 실험실이다. 시청자들에게는 제작진이 만든 실험의 참관인이 되어 관찰하는 역할이 부여된다.

제작진-실험자들은 공간의 자연스러움에 오염시키는 일절의 행위도 하지 않는다. 환경에 조작을 가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시청자들의 관심사에도 이렇다할 '뽕'을 주입하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을 보여주고 시청자들과 같은 입장인 패널-참관인들의 잡담을 보여주며 <테라스 하우스>를 끝낸다.

그런데 한국형 <테라스 하우스>인 <하트시그널>로 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제작진들은 게스트들에게 계속 이것저것을 시킨다. 밤마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주라고 하고, 데이트를 할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다. 그리고 프로그램 막바지에는 <짝>에서처럼 커플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연애할 생각이 없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도 일단 선택을 해야한다. 아니, 애초에 연애를 하려는 목적이 뚜렷한 사람들이 시그널 하우스에 입주할 수 있다.

패널들의 역할도 <하트시그널>로 오면 시청자들과 위상이 달라진다. 목소리만으로 진실과 거짓을 판명할 수 있다는 소리 전문가 배씨 아저씨처럼 유사과학자가 되어 게스트들의 행위와 말을 두고 되도않는 분석을 하고, 마지막에는 누가 누구에게 문자를 보냈는지 맞추는 게임을 한다.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은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 걸까?”라는 주제에 갇히게 된다.

<테라스 하우스>에서 연애는 수많은 관계 중 하나일 뿐이다. 데이트를 가고 말고는 개인들의 재량이고, 제작진들은 게스트들에게 데이트를 가라며 압력을 넣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은 남녀로 이루어진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역학관계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애초에 우리는 참관인이었으니까.

한국 콘텐츠가 현실을 왜곡한다고 하면서 <테라스 하우스>를 언급했다. 이 왜곡은 PD가 시청자들에게 영상이라는 데이터를 제공할 때 발생한다. 아래의 두 사진을 보자.

채널A <하트시그널>에서는 참가자들의 감정을 제작진이 제멋대로 추정해 자막으로 보여준다.

먼저 윗 사진을 보자. 두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보고 있다. 두 사람의 속마음이 어떤 지는 아무도 모른다. 본인들도 모를 거다. PD들은 하물며? 그런데 PD들은 과감히 하트 모양의 이미지를 추가해서 마치 저들이 누구가를 향해 꽁냥꽁냥한 마음이 있는 것처럼 연출했다. 두번째 사진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이 민망한지, 화가 난 건지는 본인만 알거나 본인도 모른다. 하지만 PD는 안다. 신내림이라도 받은 걸까? 신은 어떻게 아는 걸까?

이런 식의 연출은 비단 <하트 시그널>에만 쓰이는 게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연출은 수많은 한국 콘텐츠에서 반복된다. 카메라 앞의 인물의 말이나 표정, 행동은 PD들의 의도에 따라 제멋대로 재단된다. 하나의 콘텐츠가 과하게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 카메라 앞의 인물들이 틀에 맞게 갈려 나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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