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일본에 있는 왕인(王仁) 묘는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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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체크] 일본에 있는 왕인(王仁) 묘는 가짜다
  • 김현경
  • 승인 2020.10.07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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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경의 역사체크] 왕인의 묘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

지난 3월에 출간된 바베 다카히로(馬部隆弘)의 책 <쓰바이 문서: 일본 최대급의 가짜 문서>3개월 여만에 5쇄를 결정하며 일본의 여러 독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쓰바이 문서란 쓰바이 마사타카(椿井政隆, 1770~1837)라는 인물이 18~19세기에 위조해낸 엄청난 양의 문서들을 가리키며, 바베 씨는 십여 년간 쓰바이 마사타카와 위작 문서들을 추적하여 문서가 만들어진 수법과 목적, 그리고 문서가 분포하는 범위와 지역 사회에 대한 영향을 분석해 왔다.

역사학에서는 가짜 문서를 제외하고 진품인 문서만으로 과거의 역사상을 복원해야 하며, 쓰바이 문서도 그런 점에서 위작임이 분명해진 사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지금까지도 쓰바이 문서 중의 일부를 인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데 활용하고 있으며, 지역 사회에서도 쓰바이 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지역의 역사를 설명하기도 한다고 바베 씨는 밝힌다.

그러면 쓰바이 문서가 사람들이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고문서 전공자가 보면 누구라도 위작된 것임을 알아볼 정도로 허술하게 만들어졌다. 심지어 쓰바이가 위작한 문서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어떤 문서가 쓰바이 문서인지 아닌지도 구분해낼 수 있다. 하지만 쓰바이 문서에서 조작한 내용들은 지역의 신사와 사찰, 마을의 유지들과 관련된 것이었고, 19세기 이후에는 그러한 내용이 담긴 문서들이 마을과 가문의 역사를 말해주는 고문서로 인식되어 활용된다. 연구자들 중에도 그 문서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적 기관에서 편찬한 역사서에도 소개되자, 결국 그 문서는 신빙성과 권위를 획득하여 일반 시민들도 수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일본에서 일본인이 또 역사를 왜곡했다고 당연하게 여기거나,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쓰바이 문서는 뜻밖의 지점에서 우리나라와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일본에 있는 왕인(王仁) 묘는 진짜인가

고대 한일관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왕인(王仁, 일본어 발음은 와니’)의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왕인은 백제에서 일본으로 논어와 천자문을 가져온 인물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어 백제와 고대 일본의 교류를 상징하는 존재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런 왕인의 것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위치해 있다. 이 무덤은 아무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높이 1미터 정도의 자연석으로, 고대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약소해 보인다. (그림 1 관련 유튜브 참조)

그림 1. 왕인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작은 바위. 뒤에 서 있는 ‘박사왕인지묘’ 비석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그림 1. 왕인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작은 바위. 뒤에 서 있는 ‘박사왕인지묘’ 비석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원래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오니바카즉 귀신무덤이라고 불렀고, 여기에 대고 기도하면 치통이나 학질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바위의 이름인 오니가 왕인의 일본어 발음인 와니와 연결되어 와니바카즉 왕인의 무덤이라고 하는 설이 17세기 후반에 제기되었다. 유학자 나비카 세이쇼(竝河誠所, 1668~1738)는 교토, 오사카, 나라 등 기내(畿內) 다섯 지역에 관한 지방지인 <일본여지통지 기내부>, 줄여서 <오기내지(五畿內志)>1734년에 편찬하였는데, 나비카는 <오기내지>에서 [오니=와니]설을 채택하여 이 바위가 원래는 왕인(와니)의 무덤인데 그 말이 변해서 오니가 되었다고 소개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비카는 바위가 있는 지역의 영주에게 왕인의 묘에 비석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박사왕인지묘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바위 뒤에 세워지게 되었다.

오니바카를 왕인의 무덤으로 보는 주장은 와니오니라는 두 단어의 발음의 유사성에서 비롯된 견강부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비카가 나름의 사료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 설을 옳다고 판단하고 소개했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 사료는 바로 1616년에 작성되었다고 하는 <왕인분묘내조기(王仁墳廟來朝紀)>라는 문서이다. 이에 따르면 한나라 고제(高帝)의 후예라고 하는 왕구(王狗)는 각지를 전전하다 백제에 이르렀는데, 백제국 박사 왕인은 바로 왕구의 손자였다고 한다. 백제의 구소왕(久素王)은 왕인을 일본으로 보내 내조(來朝)하였고, 왕인은 일본 왕자들의 스승이 되어 학문을 익히게 하며 일본 유학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왕인이 죽자 그의 후손인 가와치노후미(河內文) 가문이 시조 왕인의 무덤을 가와치(지금의 오사카부 일대)에 조성하였고, 이것이 오니의 무덤으로 와전되었다고 문서에는 적혀 있다.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왕인의 후예라고 하는 니시무라(西村) 가문 출신이자 와다데라(和田寺)라는 절의 주지승이었던 도슌(道俊)이라는 사람이라고 하며 왕인 후손들의 계보까지 첨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비카가 이 문서를 읽었다는 사료 근거는 전혀 없다고 바베 씨는 말한다. 또한 위의 문서는 와다데라 절에 전해져 오던 것이 아니며, 근대에 들어 같은 지역 주민이 입수한 물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쓰바이 마사타카가 작성한 계보도 중에도 니시무라 가문의 것도 있는데 여기에 <왕인분묘내조기>의 저자인 도슌의 이름도 나온다. 쓰바이는 유력 농민 집안을 유서 깊은 가문처럼 꾸미기 위하여 각종 계보도와 문서들을 제작하였고, 지역 사회에 알려져 있는 소재들을 활용해 자신이 구축한 인물 관계와 정보를 뒷받침할 만한 문서들을 양산해 냈다. 도슌과 니시무라 가문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거나 조작된 존재이며, 나비카가 소개했지만 근거가 부족했던 왕인 무덤의 존재는 허구의 세계를 보충하기 위한 재료로 활용된 것이다.

 

왕인 묘로 전해지는 왕인 묘의 실체

오니바카를 왕인 무덤이라고 소개한 나비카의 <오기내지>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의문과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비판을 막기 위해 쓰바이 마사타카가 <왕인분묘내조기>와 같은 기록을 위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설에 근거가 있다고 믿게끔 만든 것이다. 1827년에는 마을의 한 유지가 황족 가문과 협력하여 바위 옆에 박사 왕인의 무덤이라는 또다른 기념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단순한 설로 끝나게 되면 상관없지만 비석으로 새겨져 기록으로 남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므로, 의사 미우라 란판(三浦蘭阪, 1765~1844)<오기내지>의 오류를 비판하였지만 힘을 얻지는 못하였다. 결국 사람들은 <오기내지>의 서술과 이를 뒷받침해주는 쓰바이 문서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비록 ()’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하지만 마치 실제 무덤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만 왕인의 무덤은 한국병합 이후 다시 주목을 받게 되어, 1927년에는 아시아주의 운동가 우치다 료헤이를 주축으로 한 왕인신사 봉찬회가 결성되었고, 1938년에는 오사카부의 사적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바베 씨는 당시의 신문 등을 보아도 내선융화와 거국일치의 캠페인에 왕인이 적극적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왕인 무덤은 1993년에는 문화재 보호 조례에 의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 왕인 묘에 대해서는 히라카타시에서 단독 안내문을 인터넷 상에 게재한 바 있으나, 바베 씨의 책 <쓰바이 문서>가 화제가 된 탓인지 해당 글은 삭제되었고, 현재는 히라카타시내의 문화재라는 페이지에 좀더 간략화된 글이 게재되어 있다. 다행히 바베 씨의 책과 삭제 이전에 저장된 페이지에서 과거 글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자가 낳은 일한 역사교류의 거점

 

4세기 말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한자와 유교를 전해주었다고 하는 왕인의 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긴야촌 와다데라의 승려 도슌이 <왕인분묘내조기>에서 후지사카촌의 오니바카는 와니바카(왕인 묘)라는 말이 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교토의 유학자 나비카 세이쇼가 이 문서를 바탕으로 왕인 박사의 묘로서 숭배하도록 해당 지역의 영주에게 진언하여 교호 16(1731)박사왕인지묘라고 새긴 묘석을 세운 것이 그 시작이며, 1938년에 오사카부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시는 왕인 박사의 탄생지로 여겨지는 한국 영암군과 20년 이상에 걸쳐 시민 차원에서 교류를 하였습니다. 지역의 시민 그룹이 중심이 되어 왕인 무덤 주변의 청소와 축제 개최, 교류에 힘을 쏟는 일 외에도 해당 지역의 스가하라히가시 소학교에서는 영암군의 초등학교와 벽신문을 교환해 왔습니다. 이러한 사업이 결실을 맺어 2008년에는 시와 영암군과의 우호도시 제휴가 실현되어, 역사 문화를 중심으로 교류를 심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수학여행 학생들이 찾아오는 등 전() 왕인 묘는 일한교류의 거점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림2. 왕인의 묘
그림2. 왕인의 묘

오사카 관광국 공식 홈페이지에도 백제 출신의 위대한 학문의 시조 왕인이 잠든 곳이라고 하는 등, 인터넷 상에는 여전히 왕인의 무덤으로 소개되고 있다.

 

식민통치 합리화로 이용되는 왕인 묘

한편, ‘한국에서 수학여행 학생들이 찾아온다고 한 것처럼 이 무덤의 존재는 한국에도 익히 알려져 있다. 물론 왕인 무덤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으로 문제가 제기되었고, 사적 지정 자체가 당시 일본 정부의 식민통치 합리화라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사카 히라카타시에 있는 왕인 박사 무덤> 오마이뉴스 기사와 같이, 왕인의 것으로 전해지는 무덤 자체에 대한 의문이나 비판을 제기하지 않으면서 왕인 무덤을 소개하는 기행문이 더 많이 보인다. 왕인 탄생지와 무덤 소재지라는 인연으로 인해 히라카타시와 영암군이 우호도시 체결을 하고 교류를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선 인용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2006년에는 왕인 무덤 앞에 전라남도에서 가져온 자재를 사용하여 백제문이라는 한국풍의 문도 세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덤 남쪽에는 한국풍 휴게소가 세워져 있으며, 주변에는 무궁화가 심어져 있다고 한다.

바베 씨는 쓰바이 문서가 이제는 국제적인 문제에도 연관되기에 이르렀다고 평하고 있다. 왕인 무덤으로 전해지는 저 바위가 한국과 일본의 우호를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잡고 만 것처럼 말이다. 바위가 왕인 무덤이 아니라고 해서 그 바위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현대 한일 교류의 역사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다만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려고 하면 이미 끼워 놓은 다른 단추들을 다 풀고 옷매무새를 다듬는 일이 얼마나 힘들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왕인 무덤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작업은 단순히 오해를 수정하는 일에 그치지 않으며, 우리가 어떠한 역사적 기억이나 흔적과 어떤 자세로 마주해야 할지를 가르쳐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작업에는 국경을 초월한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참고문헌>

馬部隆弘, 僞文書からみる畿內國境地域史, 史敏 2, 2005

馬部隆弘, 『椿井文書: 日本最大級の偽文書』, 中央公論新社, 2020

김현경   hyunk02.htp@gmail.com  최근글보기
일본 고대사 및 중세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신분과 계층, 혈통과 세습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대학원과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고, 교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어소시에이트 펠로우로 일하고 있다. 논문으로 <원 근신(院近臣)과 귀족사회의 신분질서: 실무관료계 근신을 중심으로>(<일본역사연구> 46,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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