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1982년 한국시리즈, 열릴 수 없었던 경기였다?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20.10.1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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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초대 챔피언은 OB 베어스(현 두산)다.

원년 페넌트레이스는 팀당 40경기씩을 치르는 전·후기리그로 분할됐다. OB는 전기리그, 삼성은 후기리그 우승팀이었다. 한국시리즈에서 OB는 전력 열세라는 평가를 뒤집고 4승 1무 1패로 삼성을 꺾었다. 최종 6차전 9회초 터진 김유동의 스리런 홈런과 완투승을 거둔 에이스 박철순의 포효는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명장면이다.

그런데, 이 한국시리즈의 성립 여부에 대한 오래된 문제제기가 있다. 존경받는 야구기자인 고(故) 이종남은 1992년 5월 취재 경험담을 모은 <사람 좋으면 꼴찌>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 96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당초 성립되지 않았어야 할 82년 한국시리즈였다. 대회요강대로 했다면 의당 소멸됐어야 할 시리즈.

 

얘기는 82년 9월 29일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OB-삼성의 대구경기를 맞기 전까지 OB는 27승12패로 최종전을 맞고 있었고 26승12패인 삼성은 이날의 OB전을 포함해서 MBC전까지 두게임을 치르게 돼 있었다.

OB 박철순-삼성 권영호의 치열한 투수전으로 전개된 이날 대구경기는 김우열의 4회 솔로홈런을 7회말 삼성 김한근이 중월적시2루타로 상쇄, 1-1 동점을 만들었다. 이 스코어는 9회말까지 이어졌고 시간은 어느덧 새로운 이닝에 들어갈 수 없는 제한시간 10시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1982년 9월 29일 OB 대 삼성 경기 기록지.
1982년 9월 29일 OB 대 삼성 경기 기록지.
1982년 9월 29일 OB 대 삼성 경기 기록지.
1982년 9월 29일 OB 대 삼성 경기 기록지.

 

따라서 이 게임은 무승부로 처리되고 OB는 27승12패1무로 승률 .692를 기록함으로써 전기리그 우승에 이어 후기리그도 최소한 공동우승을 확보하는 순간이었다. 삼성은 MBC와의 최종전을 이겨야만 OB와 동률을 이뤄 우승결정전을 치를 수 있게 되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날 주심을 맡은 황석중씨는 대회요강에 따라 9회로 경기를 끊으려 했으나 현장감독관으로 나와 있던 이호헌 사무차장은 연장전으로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정규 9이닝을 마치는 것을 제외하고 10시 30분 이후에는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규정은 서울에만 적용되는 것일 뿐 지방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독단적인 유권해석에 따른 것이었다. 사실 삼성이 남은 MBC전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만큼 프로야구의 최대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한국시리즈가 첫해부터 소멸될 위기에 놓인 것을 의식한 것이었다.

어차피 한국시리즈를 치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판국이라면 이 게임에서 끝장을 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KBO는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경기속행을 지시했던 것이다. (박철순의 허리가 삐끗한 것이 바로 이 경기였다.) '탈법적'으로 거행된 연장전에서 삼성은 12회말 함학수가 3루쪽으로 행운의 끝내기 내야안타를 터뜨려 승부를 갈랐다. 삼성은 10월 2일 MBC전을 3-1 승리로 이끌어 마침내 후기리그 단독우승을 확정짓고 OB와 한국시리즈에서 맞서게 됐다.“

해당 경기가 무승부로 처리됐다면 두 팀의 성적은 27승 12패 1무로 같아진다. 책의 서술이 맞다면 삼성은 KBO의 ‘특혜’로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셈이 된다.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 OB 김유동의 만루홈런 장면.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 OB 김유동의 만루홈런 장면.

 

하지만 이 내용은 오류로 보인다.

우선, 경기 시간. “이 스코어는 9회말까지 이어졌고 시간은 어느덧 새로운 이닝에 들어갈 수 없는 제한시간 10시 30분을 넘기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이 경기 공식기록지에는 종료 시각이 22시 37분으로 기재돼 있다. 오후 10시 30분에 정확하게 9회말이 끝났다고 해도, 연장 10회부터 12회까지 7분 만에 진행됐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연장전에선 OB에서 타자 10명, 삼성에서 14명이 등장했다. 공수교대 시간 포함해 한 타석당 17.5초만 소요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역시 비현실적이다.

다음으로, “정규 9이닝을 마치는 것을 제외하고 10시 30분 이후에는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소개된 규정이다. 당시 대회요강에는 이런 규정이 없었다. KBO 관계자는 “오후 10시 30분 제한 규정은 1984년에 만들어져 2002년까지 운영됐다. 1982년과 1983년에는 규정에는 ‘연장전은 15회까지 치른다’고만 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류가 일어난 이유로는 야간경기가 원년 프로야구에서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프로야구 출범 시점에서 야간조명시설이 갖춰진 프로야구 구장은 서울운동장야구장(이후 동대문운동장야구장으로 개명)이 유일했다. 여기에 야간통행금지가 갓 해제된 시점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유화조치로 1945년 9월부터 시작된 통금은 1982년 1월 5일에야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됐다.

이런 사정으로 프로야구 개막전은 3월 27일 열렸지만 첫 야간경기는 5월 20일에 열렸다. 물론 구장은 조명탑이 있는 서울운동장이었다. 당시 홈 팀은 삼미, 원정 팀은 삼성이었다. 프로 원년에는 흥행 차원에서 비연고지 구장에서도 홈 경기가 일부 열렸다. 전기리그 내내 야간경기는 모두 8회에 불과했다. 물론 전 경기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두 번째 야간경기였던 5월 26일 해태-MBC전이 끝난 뒤 주요 일간지들에서 ‘새로운 스포츠 풍경’으로 비중있게 기사화했을 정도로 ‘밤을 잊은 야구장’은 생소했다.

후기리그에는 지방 구장에서도 야간경기가 열렸다.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부산 구덕야구장이 최초로 조명시설을 완비했다. 프로 원년 올스타전 1차전이 구덕구장에서 열린 이유 중 하나가 조명시설 완공 기념이었다. 이어 7월 2일 대구구장, 7월 26일 광주구장, 8월 4일 대전구장 순으로 조명시설이 갖춰졌다. 인천구장이 가장 늦어 9월 13일에야 첫 야간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서울에는 ‘로컬 룰’이 있었다. 동아일보 1983년 6월 4일자는 “서울시 조례에는 서울 야간경기는 9회까지 시간에 관계없이 경기를 마치고 밤 10시 이후에는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조명시설 관리가 이유였다. 하지만 서울 지역에 한정됐고, KBO의 규칙은 아니었다. 같은 신문 1982년 5월 27일자 기사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야구장에선 밤 10시 7분께 9회 동점이 되자 본부석에서 '시간에 관계없이 15회까지 연장전에 들어가겠다‘고 알리자 관중들은 밤늦은 줄도 모르고 계속 관전을 하게 됐다며 환성을 터뜨렸다."

 

조례와는 별개로 현장에선 경기감독관의 재량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감독관은 경기운영에 관한 권한을 KBO 총재로부터 위임받는다.

1982년 9월 29일 대구구장 경기 주심을 맡았던 황석중 전 KBO 심판위원은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는 “9회말이 끝난 뒤 본부석을 찾아 이호헌 차장에게 경기 속행 여부에 대한 문의를 했다. 당시 규정상으론 연장전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워낙 중요한 경기였기 때문에 확인을 거쳤다. 이호헌 차장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연장전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황 전 위원이 이 경기를 기억하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이종남 기자의 서술대로 이 경기에서 OB 에이스 박철순은 허리를 다쳤다. 한국시리즈에선 진통제 주사를 맞고 공을 던졌고, 다음 시즌엔 4경기만 던질 수 있었다. 이후 다시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해 긴 재활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불사조’다.

부상은 8회말에 찾아왔다. 선두 타자 허규옥이 볼넷으로 출루하자 다음 타자인 3번 오대석이 번트를 댔다. 번트 수비 도중 허리를 삐끗했다. 황 전 위원은 “타구가 3루 파울 라인 가까이로 흘렀다. 박철순이 타구를 잡은 뒤 몸을 틀어 1루에 송구했다. 몸에 무리가 가기 쉬운 플레이였다. 송구 뒤 박철순이 허리를 부여잡았던 장면이 떠오른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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