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의 '호적수'였던 베트남 축구의 부활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12.17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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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전철 타고 오는데 젊은이들 몇몇이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팀이 동남아시아 국가대항전이라 할 스즈키컵 결승에 진출한 것을 화제에 올렸다. 그런데 대화 도중에 축구 후진국들의 수준 낮은 축구 운운하는 걸 두고 쓴 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월드컵 몇 번 나갔다고 축구 ‘선진국’도 아닌데다가 기실 우리 축구 역사는 거의 ‘동남아시아 축구사’에 집어넣어도 될 정도로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엮인’ 역사가 많기 때문이다. 메르데카배니 킹스컵이니 하는 대회에서나 한국은 기를 펼 수 있었고 한국이 주최한 ‘박스컵’, 즉 박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의 단골 출전 멤버들도 동남아시아 팀들이었다. 그만큼 동남아시아 팀들은 우리의 호적수였고 라이벌이었고 발목브레이커였다. 물론 그 젊은이들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긴 하겠지만.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1956년 열렸던 제 1회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한 바 있는데 이때 참가한 네 나라 가운데 한 나라가 베트남이었다. 물론 ‘자유 베트남’, 즉 남베트남이겠지만. 한국은 베트남을 5대 3으로 꺾었고 이스라엘과 홍콩마저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 초대 아시안컵 트로피가 행방불명돼 오랫 동안 온갖 곳을 뒤지고 털어낸 끝에 태릉선수촌에서 찾아낸 역사가 있다.) 이후로도 베트남은 한국의 호적수였다. 3년 뒤 메르데카배 축구 대회에서는 베트남 축구팀이 3대 2로 한국을 눌렀다. 그 후로 베트남이 한국을 이기기까지는 44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우습게 볼만한 팀은 아니었다.

1971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박정희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이를테면 1964년 동경 올림픽 아시아 예선. 베트남팀은 아시아 예선 최약체로 치부됐고 한국은 최종 예선 상대로 이스라엘을 꼽고 있었다. 심지어 바로 전 해, 베트남 축구연맹은 이스라엘에 이길 가능성이 없어서 예선 출전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시아 축구 연맹 내에서 중동 파워가 부상하면서 아시아에서 축출됐지만 유럽식 축구를 구사하던 아시아 최강팀이었다. 어찌어찌 출전 포기를 번복하긴 했으나 베트남이 이스라엘을, 그것도 원정 경기에서 이기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베트남은 텔아비브에서 열린 어웨이 경기에서 이스라엘을 완파하고 한국팀을 바짝 긴장시킨다. 비록 한국의 벽을 넘어서진 못했지만 말이다.

 

1967년 11월 열린 남베트남 건국 기념 친선 축구대회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역사적, 시대적 감정을 매우 솔직하게 토로하게 된다.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연인원 5만명의 한국군이 월남에서 작전 중이던 즈음이었다. 이런 ‘군사동맹국’ 축구팀이 친선 경기에 출전했건만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팀에 보내는 시선은 지극히 차가웠다. 한국팀이 치른 모든 경기에서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의 상대팀을 열렬히 응원했다. 급기야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결승전에서는 3만 명의 관중이 운집하여 열광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부르짖는 황망한 상황이 벌어진다. “5만 장병이 피땀으로 이룩하고 있는 한월(韓越 )친선에 구멍이 난 느낌”이 들만큼. (매일경제 1967년 11월 15일자, 한국준우승) . 수비의 주력이었던 김호 (1994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 등 주전 선수 4명이 부상당한 형편의 악전고투 끝에 한국팀은 호주에 3대2로 석패한다. 베트남 신문에 따르면 “베트남 관중들이 응원하지 않았다면 호주팀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정도로 베트남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이겨라.”를 외쳤다. 사실상 “한국 져라”였다. 선수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야유가, 한국 응원단에는 오물통이 날아갔다. 이에 열통이 터졌던지 한국 축구팀은 시상식에 불참해 버렸는데 이후 베트남 언론은 대놓고 ‘혐한’ 감정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주월 한국 대사는 이 경기에서 어떤 따끔한 교훈을 새기고 그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이 좋고 아량있고 우호적이라면 왜 월남인이 한국인들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 한국인이 무전취식을 하고 태권으로 사람을 치고 거칠기 짝이 없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은 전 월남에 걸쳐 자행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인을 싫어한다. 유감천만이다.” (동아일보 1967년 12월 2일, '월남지에 비친 악화된 대한감정' 기사 중 월남신문 티아 상지(紙) 사설 일부) . 당시 기자들도 이 축구 경기를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기자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면서 이 ‘반한감정’의 이유를 찾고 있다. 월남 주재 기자들의 좌담회 발언 내용을 보면 오늘날의 ‘보수’들이 펄쩍 뛸 내용도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월남지에 비친 악화된 대한감정' 1969년 12월 2일자 동아일보 캡처.

“대부분의 서민층들은 월남전은 월남의 전쟁이 아니고 미국의 전쟁으로 단지 미국이 월남땅에서 하는 전쟁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따라서 그들은 한국군이 자신들을 돕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미국의 전쟁에 한국도 가세하고 있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어요.” (동아일보 1967년 12월 12일, '미움이 쌓이는 친선의 가교, 월남의 대한감정을 해부한다' 기사 중) 라는 증언은 핵심을 꿰뚫고 있지 않은가. 혹시 이 좌담 이후 담당 기자가 국내 호출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춧가루 탄 물 좀 코로 들이키지 않았을까 걱정될 만큼. 그 외에도, 좌담 내용을 보면 당시 대거 진출한 한국인 ‘기술자’ 등 민간 인력들도 대단한 민폐들을 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보다 잘 살면 얼마나 더 잘살았다고 돈을 마구 뿌리며 베트남 나이트클럽을 누비고 다닌 무용담(?)이며 권총 쏘며 행패 부리다가 베트남 경찰에게 잡혀간 이야기며, 베트남 동물원에서 술에 취해 한국 노래를 부르며 깽판을 치는 사례까지 온갖 ‘돈지랄’과 ‘갑질’을 벌이는 풍경이 좌담회 기사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당연히 미국의 앞잡이에다가 자신들의 전쟁판에 끼어들어 돈만 쏙 빨아들여가는 얄미운 경제 동물로 한국인을 바라보았고 축구 경기를 맞아 그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다.

어쩌면 한국 선수들과 한국 응원단이 그 이상의 일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베트남 사람들의 축구 열기는 베트남 축구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기 때문이다. 1972년 호주팀이 사이공을 방문하여 사이공 선발팀과 대결을 펼쳐 2대0으로 승리했는데 흥분한 베트남 관중들이 경기장에 난입, 호주 선수들을 두들겨 패 버렸다. 베트남 해방 이전이나 이후나 그 기질은 마찬가지여서 1995년 동남아시아 축구경기대회 결승전에서 태국에게 4대0으로 만판 깨진 다음 사이공에서는 돌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폭동이 벌어져 경찰관 수십 명이 다치는 참사 (베트남 분위기상 난동자들은 더 다쳤겠지만)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실에서 국가로 존재하던 남베트남과 한국이 마지막으로 맞붙었던 건 1975년 3월 19일, 월맹군 탱크가 남베트남 정부청사 철문을 부수고 붉은 바탕에 노란 별이 그려진 북베트남 깃발을 휘두르기 약 40일 전이었다. 노란 바탕에 붉은 선 세 개가 그어진 남베트남 국기를 단 베트남팀은 차범근 등 한국 축구의 ‘황금 세대’가 주축이 된 한국팀을 맞아 선전했으나 1대0으로 패한다. 그 남베트남팀은 1975년 5월 개최될 예정이던 박정희 대통령배 국제 축구대회에 출전 예정이었다. 그러나 4월 30일 남베트남의 국가적 명맥이 끊기고 남베트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박대통령배 국제 축구 대회 출전팀은 급거 변경돼야 했다. 그 해는 광복 30주년이었고, ‘박스컵’도 5회로 꺾어지는 해여서 10개국을 초청한 최대 규모로 마련될 예정이었는데 두 나라가 펑크가 났다, 베트남 외에도 1975년 4월 17일 크메르(캄보디아) 역시 공산화됐던 것이다. 

베트남 공산화(라고 쓰고 베트남 해방이라고 읽는다) 이후 베트남이 한국과 축구 대결은 90년대 이후로 넘어와서나 가능했다. 동남아에서 꽤 행세하는 킹스컵 축구대회에 베트남이 참가 신청을 한 건 해방 이후 13년이나 흐른 뒤인 1988년이었다. 즉 그 이전에는 동남아시아에서도 별 교류가 없었던 셈. 현실 사회주의 몰락 후 베트남은 한국과 교류의 물꼬를 텄고 축구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수준 차이가 있었다. 1994년 제 1회 베트남 독립기념국제축구대회에 주택은행팀이 출전했고 주택은행은 베트남 1진, 2진팀을 모두 격파, 우승했고 다음 해에 또 우승, 2연패를 달성했다. 이어 1996년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호치민으로 이름을 바꾼 옛 사이공에서 베트남 대표팀을 4대0으로 격파했다. 어차피 기억 속에 희미했던 베트남 축구팀은 한국팀의 승점 자판기 정도로 규정된다.

그런데 2003년. 2002년의 꿈같은 4강 신화 이후, 내친김에 아시안컵마저 거머쥐겠노라 기세등등하던 한국축구팀은 오만에서 아시안컵 2차 예선을 치른다. 첫 상대가 베트남이었다. 베트남과 한국 사이에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과 베트남 정도의 전력 차이가 있어 보였다. 더하여 베트남은 아시안컵은 포기하고 동남아시아대회에 집중하기 위해 23세 이하 선수들로만 구성돼 있었고 1차예선에서는 한국팀에 자그마치 5대0으로 코가 깨진 팀이었다. 월드컵 4강에 빛나는 한국 대표팀이 세계적 명장(?) 움베르토 코엘류의 지휘 하에 한 번 더 ‘한 수 지도’하면 되는 경기였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의 미국처럼 베트남 골문에 맹폭을 퍼부었다. 슈팅만 열 여섯 개. 그러나 골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의 최우수선수가 된 베트남 골키퍼는 신들린 듯 한국팀의 슛을 막아 냈다. 땅굴을 파고 미군 폭격을 이겨냈던 베트콩처럼 견고한 수비를 자랑하던 베트남은 회심의 역습 주먹을 내밀었고 그것이 냉큼 한국 골네트를 가르고 말았다. 1대 0. 무려 44년만에 한국팀이 베트남에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베트남 선수들은 미친 듯이 환호했고 베트남 코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해방 전쟁 승리 이후 최대의 기쁨이다.” ‘따이한’ (베트남인들이 한국을 부른 호칭)들은 그렇게 또 한 번 베트남에게 믿을 수 없는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었다. (한국은 이틀뒤 오만에게도 1대3으로 패배해, 소위 '오만쇼크'에 빠지게 된다)

베트남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태극기를 두르고 다녔다. 박항서 감독의 입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로부터 또 15년이 흘렀고 2018년 한국인 감독 박항서가 이끄는 베트남팀은 동남아시아의 월드컵이라 할 스즈키 컵에서 감격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무려 1950년대부터 끈질기게 아시아 무대에서 뭔가 해 보려고 노력했고 축구 열기만큼은 어느 나라 못지않았던 베트남에게 2018년은 가히 최고의 한 해였고, 한국인 박항서 감독은 그 중심에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결승전을 지켜보노라니 관중석 곳곳에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와 함께 태극기가 나부끼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때 인정사정 돌보지 않는 적성국의 상징들이 아니었던가. 두 깃발이 저렇게 열렬히 만나서 뜨겁게 나부끼는 모습은 역사만이 창출해 낼 수 있는 드라마였다. 역사는 그렇게 어이없도록 극적인 반전과 허망할만큼 기구한 스토리를 즐겨 내놓는다. 축구 하나만 돌이켜도 이렇게 구구절절인데 또 다른 사연들은 얼마나 번다하고 복잡하며 다채로울 것인가. 아픔 많고 슬픔 많고, 그러면서도 인연이 범상치 않았던 두 나라, 한국과 베트남간의 우의가 다시는 깨지는 일 없기를, 그리고 서로를 좋은 나라로, 어진 사람들로 알며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 본다. 2018 스즈키컵 베트남 우승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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