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3·1운동은 주최측 협박에 의한 운동이었다?

  • 기자명 이승우 기자
  • 기사승인 2021.03.0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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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인 지난 3월 1일, 만화가 윤서인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삼일운동 주최자가 일제보다 더 잔혹무도했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의 자료들을 근거로 삼일운동이 이전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주최 측의 강제적인 압박에 의해 일어났음을 주장했다. 또한 3.1 운동이 "일본에게는 비폭력운동, 우리에게는 폭력운동"이었다면서 3.1 운동 주최 측의 폭력성을 강조했다. 해당 글은 게시 이후 큰 화제가 되었고, 현재 이 글은 삭제된 상태이다. 

 

3월 1일 자 윤서인 페이스북 갈무리

같은 날 오후 10시 07분, 윤서인은 자신의 글을 인용하여 '만행'으로 표현한 커뮤니티 글에 대해 "자신의 말에 근거만 쏙 빼고 욕하고 있다."면서 억울함을 드러냈다. "항상 이런 식이지 뭐"라며 자신을 비난하는 커뮤니티 글에 대해 조소 섞인 반응을 보였다. 

3월 1일 자 윤서인 페이스북 갈무리

그렇다면 윤서인이 제시한 근거만으로 3.1 운동이 소수 집단에 의해 강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뉴스톱은 1919년 3월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를 바탕으로 윤서인이 근거로 제시한 문건에 나온 협박 내용이 실제로 자행했는지 여부를 팩트체크했다.

 

◈ 3.1 운동은 폭력과 협박에 의한 강제 운동이었다? → 사실 아님

뉴스톱은 윤서인이 근거로 제시한 근거 중 <경통><대한독립 만만세 아니 부르려면 불을 조심하시오>란 제목의 격문을 검토했다. 1919년 3월 22일, 고양군 송포면장에게 송달된 <경통>에는 "만세를 부르지 아니하면 크나큰 변을 당할 터이니 잘 생각하시기를"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1919년 3월 26일, 고양군에 게시된 <대한독립 만만세 아니 부르려면 불을 조심하시오>는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방화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격문에 기술된 내용만 놓고 본다면, 윤서인의 주장대로 3.1 운동에서 울려 퍼진 만세합창이 소수 세력에 의해 강요된 것처럼 보였다. 

격문 <경통>, <대한독립 만만세 아니 부르려면 불을 조심하시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하지만 당시 고양군에는 '크나큰 변'도, 3.1 운동 주최자 측에 의한 '방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1919년 3월 27일, 고양군에는 독립유공자 '김종환(金宗煥)'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김종환은 35명의 주민과 함께 만세를 제창했고, 이들의 함성은 이웃 마을까지 퍼져나갔다. 1919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은 김종환이 다른 만세 제창자들과 "호응(呼應)"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호응은 "부름이나 호소 따위에 대답하거나 응함"이란 뜻으로, 강제적인 협박에 의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당시 고양군에서는 소수 집단의 겁박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호응에 의한 자발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 '김종환'과 그의 판결문 일부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 국가기록원)  
독립유공자 '김종환'과 그의 판결문 일부 (총 6페이지 중 4페이지). 판결문은 만세 운동이 '호응'하여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 국가기록원)  

반면 방화와 파괴는 3.1 운동 주최자 측이 아니라, 이를 진압하는 일제에 의해 벌어졌다. 1919년 3월 29일, 베세이 목사(F. G. Vesey)에 의해 기록된 <세브란스병원 한국인 부상자들의 증언>에는 당시 고양군에서 일제에 의해 자행된 폭력적인 시위 진압 상황이 담겨있다. 고양군 덕산(Duksan)의 '이돌사'(Ri Tol Sa)는 300여 명의 주민이 폭력은 사용하지 않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15명의 헌병들이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고, 1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말했다. 같은 지역의 '이개똥 (Ri Kia Tong)'도 일제의 탄압 행위에 관해 동일한 주장을 했고, 본인 역시 다리에 총상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3.1 독립운동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1919~1920) (1)> (총 202페이지 중 35페이지)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는 1919년 3월 29일 <요소사건의 후보>란 제목의 기사로 고양에서 일어난 시위 관련 소식을 내보냈다. 기사는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했다는 사실은 보도하지 않고 3월 21일 고양 일산에서 "군중이 면사무소를 습격"했다는 것과 3월 25일 밤 고양 덕이리에서 "약 30명의 군중이 모여 시위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처럼 일제의 탄압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3.1 운동의 폭력적인 부분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던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조차, 3.1 운동 주동자들이 민중을 협박하거나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보도는 남기지 않았다. 

1919년 3월 29일 자 매일신보 <요소 사건의 후보>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또한, 윤서인과 유튜브가 근거로 제시한 자료는 3.1 운동 전체 상황을 일반화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들이 출처로 제시한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사이트를 방문한 결과, 총 221건의 격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앞서 윤서인 등이 제시한 근거는 221건의 격문 중 10건에 불과했다. 즉, 윤서인의 주장은 부분으로 전체를 일반화하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자, 당시 격문 내용만 가지고 실제 일어난 사건은 검토하지 않은 불완전한 문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갈무리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갈무리

또한 "삼일운동 주최자가 일제보다 더 잔혹무도했다."는 윤서인의 주장은 문법적으로도 틀린 문장이다. "잔혹무도"라는 표현은 "잔학무도(殘虐無道)"의 잘못된 표현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잔혹무도" 검색결과
표준국어대사전 "잔혹무도" 검색결과

 


 

정리하자면, 윤서인이 근거로 제시한 자료에는 3.1 운동 주최자의 협박 내용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협박 내용처럼 시위 주최자 측에 의한 폭력과 방화는 자행되지 않았으며 시위 참가자들의 상호 호응과 주체적인 만세 합창에 의한 자발적 시위가 이루어졌다. 반면 폭력은 일제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자신들의 탄압행위를 정당화하고자 의도적으로 3.1 운동의 폭력성을 강조했던 매일신문도 3.1 운동 시위 집단 내부적으로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고는 보도하지 않았다. 격문에는 3.1 운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과격한 표현이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3.1 운동 주최자들이 일본순사보다 잔혹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즉, 3.1 운동이 주최세력의 폭력과 협박에 의한 강제 운동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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