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첫 가로쓰기는 한글 교과서...일간지는 호남신문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8.12.28 12: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 1897년 9월 28일자에 투고한 「국문론」에서 한글은 가로 써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지만, 당시까지의 관습이나 출판 사정에 따른 한계로 인해 정작 그의 저작 대부분은 세로쓰기로 간행되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말모이」 원고가 예외적으로 ‘가로쓰기’였던 것은 그것이 사전을 만들기 위한 원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시경의 마지막 저작인 『말의 소리』(1914) 끝머리에 실린 ‘우리글의 가로 쓰는 익힘’이란 글에서는 한글 자모가 마치 영어 알파벳처럼 자모가 분리되어 가로로 인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주시경이 주장한 ‘가로쓰기’가 단순히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로 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모를 떼어 써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주시경, 『말의 소리』 중. 출처: 이기문, 『주시경전집 下』, 아세아문화사.

주시경에서 비롯된 가로쓰기, 다시 말해 ‘가로풀어쓰기’는 제자인 김두봉과 최현배 등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최현배는 일제강점기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글 가로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주장하였다.

내가 우리 한글의 가로씨기를 처음으로 주장하기는 시방으로부터 25년 전이었다. 곧 서기 1922년 여름에, 일본 경도 유학생 하기 순회 강좌(그 강연 내용은 그때 동아일보 게재)에 참가하여, 각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이를 주장하는 동시에, 그 글자까지 보였더니...
- 최현배, 『글자의 혁명』, 조선교학도서주식회사, 1947.

 

위 글의 ‘가로씨기(가로쓰기)’ 역시 주시경이 주장한 한글 자모를 풀어서 가로로 쓰는 방식과 같다. 그러나 한글 자모를 풀어서 쓰자는 주장은 훈민정음 창제 이래 한글을 음절 단위로 써온 한국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급진적인 제안이었다. ‘가로풀어쓰기’를 당장에 실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했지만, 최현배를 비롯한 주시경 제자들이 중심이었던 조선어학회는 기관지 『한글』 창간호를 통해 ‘가로쓰기’부터 시작하였다.

 

 

사진에서 보듯이 『한글』 창간호는 가로쓰기로 만들어졌고, 마치 학회의 이상이라는 듯이 본문 상단의 제호는 가로풀어쓰기 방식에 따라 ‘ㅎㅏㄴㄱㅡㄹ’이라 적었다. 그런데 1934년 4월에 나온 『한글』 제11호부터는 한글 연구자들만의 공간에서 벗어나 대중들과 좀 더 가깝게 호흡하기 위해 전체적인 편집의 변화를 시도함과 동시에 세로쓰기를 채택했다가 1937년 제41호부터 다시 가로쓰기로 돌아갔다.

이처럼 조선어학회는 일제강점기에도 민족어를 보존하고 연구·보급 등에 전념하면서 기관지를 통해 가로쓰기를 선구적으로 실험하였으며, 해방 후 첫 한글 교과서 『한글 첫 걸음』(1945)을 가로쓰기로 편찬하였다. 본문 용지는 갱지였고, 판크기는 5×7판, 판짜기는 가로짜기, 분량은 50쪽이었다. 책 앞머리에 <주의> 1쪽이 달려 있고, 본문 49쪽은 모두 41개의 과목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어학회 지음, 『한글 첫 걸음』 18~19쪽.

 

 

해방 후 나온 첫 번째 한글 교과서에 가로쓰기가 채택된 것은 지은이가 조선어학회였기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설치된 미군정은 각 분야의 조선인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학무국장에 임명된 락카드 대위를 도우면서 최현배와 장지영이 교육 행정의 실무를 담당했고, 교육부문 자문기구로 설치된 조선교육심의회에는 안재홍·정인보·백낙준·김활란·김준연·이인기·유억겸·현상윤·장면·장덕수·장이욱·유진오·김성수·백남운·조병옥·박종홍·최현배·피천득·황신덕 등이 참여하였다. 조선교육심의회는 교육문제 전반에 걸친 안건들을 토의·심의하였는데, 1945년 12월 8일 열린 전체회의에서 ‘교과서 한자폐지안’을 가결하였고, 가로쓰기는 채택하지 않았다.

 

(二) 가로글씨(橫書)

1. 한글은 풀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순전한 가로글씨로 함이 자연적인 동시에 이상적임을 인증함.

2. 그러나 이 이상의 가로글씨를 당장에 완전히 시행하기는 어려우니까, 이 이상에 이르는 계단으로, 오늘의 맞춤법대로의 글을 여전히 쓰더라도, 그 글줄(書行)만은 가로(橫)로 하기로 함.

3. 첫째 항목(項目)에서 규정한 이상적 순전한 가로 글씨도 적당한 방법으로 조금씩 차차 가르쳐 가기로 함.

 

조선교육심의회는 가로풀어쓰기가 한글을 적는 이상적인 서법임을 인정하면서도 당장 시행이 어렵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글줄은 가로쓰기를 채택했다. 이후 국어 교과서는 물론 과학이나 가사 교과서 등도 가로쓰기 원칙에 따라 발행하였다. (아래 사진 자료: 서울교육박물관)

문교부, 1948년

  

신효선ㆍ이종서, 을유문하사, 1947

 

문교부, 1948년

이후 가로쓰기는 차츰차츰 일반도서에도 적용되었으며, 홍현보에 따르면, 최현배가 몸담고 있던 연세대학교 대학신문 『연세 춘추』(1958)가 가로쓰기로 발행되었고, 일간 신문의 경우는 1947년 8월 15일 『호남신문』이 처음으로 가로쓰기를 채택하였다. 타 신문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전통적인 세로쓰기를 고수하면서 부분적인 가로쓰기를 시도하다가, 『스포츠 서울』(1985)·『일간스포츠』(1990)·『스포츠 조선』(1990) 등이 가로쓰기를 단행하였다. 1988년 5월 15일 마침내 ‘한글전용·가로쓰기’ 신문인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고, 가로쓰기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대중화에 따른 미디어 환경 변화와 함께 널리 보급되었다.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의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랜 전통과 관습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다가올 시대에 대비하려면 그에 걸맞은 생각과 헌신적인 노력·투쟁 등을 요구한다. 가로쓰기의 역사는 주시경에서 비롯되었고, 조선어학회가 고인의 학설을 계승했다. 1947년 최현배는 『글자의 혁명』에서 가로쓰기의 좋은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세종 임금께서 세계에서 유례없는 과학적인 자모 문자를 만들어내어 놓으시고, 그 마춤법만은 상형문자인 한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은 실로 시대 안목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만약, 세종 임금께서 오늘에 다시 오신다면, 당연히, 가로씨기를 주장하실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이다...

세로글씨는 글줄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먼저 씬 글줄이 잘 보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먹이 손에 스치히어 문태어지기 쉽다...

가로씨기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것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이는 붓을 운동함을 따라, 종이 위에 들어나는 글씨의 모양이 온전히 분명히 잘 바히기 때문에, 작자를 잘 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눈이 수평으로 나란히 박혔으며, 한 낱의 눈은 또한 세로 째어지지 않고 가로 째어졌으니, 가로 보는 것이 세로 보는 것보다 시야도 넓으며 운동도 편리할 것이요...

가로글은 박기가 쉽다. 첫째, 활자의 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어진다. 오늘의 한글이 모두 스물 넉 자인즉, 활자의 종류도 스물 넷이면 고만일 것이다... 가로글씨라야 능히 타입우라떠(Typewriter), 리노따입(Linotype)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수 있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그런데, 과학 책들은 반드시 가로글로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로, 수학이 그러하고, 자연 과학 책들이 다 그러하고... 일본에서도 근년에 가로글의 책이 점점 많아 가며, 중국에서도 한자를 그대로 쓰면서도 역시 가로글로 한 책과 잡지들이 많아 가니, 이는 다 세계 문화의 대세의 그렇게 만든 바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땅위에 사는 우리 인류의 눈앞에 열힌 세계는 가로의 세계이다...

- 최현배, 『글자의 혁명』, 조선교학도서주식회사, 194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