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마을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기록하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1.04.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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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한복이는 그런 말 할 만 했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었으니까. 돌판의 질기고 못생긴 무꽁댕이 같았던 그, 밟히고 또 밟히는 길가의 잡초같이 자란 한복이, 그에게도 수십성상의 세월이 실려 이제는 제법, 몸집은 작으나마 의젓하고 사려 깊은 현자 같은 눈빛을 볼 수 있었다.

“나를 키운 거는 바람이고 빗물이고 마을사람이다.”

― 『토지』 5부 2권 5장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하여” 중에서

「노사리: 순간의 영원」은 ‘어느 날 오래전 헤어진 손자를 자처하며 시골마을의 할머니(하라 치사코 분, 왼쪽) 앞에 나타난 전화입금사기범(후지와라 키세츠 분, 오른쪽)이 오히려 할머니의 진짜 가족이 되어버린다’는 판타지적인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C)2020 Kitashirakawaha
「노사리: 순간의 영원」은 ‘어느 날 오래전 헤어진 손자를 자처하며 시골마을의 할머니(하라 치사코 분, 왼쪽) 앞에 나타난 전화입금사기범(후지와라 키세츠 분, 오른쪽)이 오히려 할머니의 진짜 가족이 되어버린다’는 판타지적인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C)2020 Kitashirakawaha

서재에서 박경리 대하소설의 한 구절을 찾아본 것은, 이후에 나온 수많은 글에 차용된 저 장의 제목 때문만은 아니다.

부모를 잃고 외가에서마저 학대를 당하다 맨발로 도망쳤던 상처가 있지만, 어질고 경위 바른 이로 성장한 김한복이 떠올라서였다. 소상팔경의 하나인 평사낙안(平沙落雁) 같은 경치라하여 평사리로 불리게 된 섬진강변 마을에서 김한복은 바람의, 빗물의, 두만네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그에게 시간이란 단순히 ‘시각과 시각사이의 간격’이 아니었으리라. 은원의 실타래가 얽힌 가혹한 운명조차 기꺼이 받아들이는 강인함을 배우고, 그리움이 쌓이며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긍휼함 또한 느꼈을 테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야마모토 타츠야 감독은 김한복의 삶에 대한 필자의 내재적 분석을 무척 잘 이해할 만한 사람이다. 무명의 오픈경기 복서들을 6년에 걸쳐 취재한 다큐멘터리영화 <짐(Gym)>으로 데뷔한 그는 미수(米壽)를 넘긴 조모의 자택을 다룬 차기작 <옛집>으로 스페인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최우수감독상을 받았다.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극영화 데뷔작 <카미하테 스토어>의 무대인 빵집은 폐가를 개수해 만들었다. 이번 부천국제영화제 초청작 <노사리: 순간의 영원>에서는 인구 7만 4천의 작은 지방도시에 찾아갔다.

인기 방송작가이자 프로젝트의 제안자 코야마 쿤도 프로듀서의 고향이기도한 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구마모토 현 아마쿠사 시. 하지만 의미를 알고 나면 영화의 원제로 쓴 “노사리의 섬”이 더 잘 어울린다. 지역의 방언인 “노사리”에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지금 나의 모든 처지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니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고 우연일까 필연일까. 16세기 중엽 포교가 이루어진 뒤 금교령이 반포된 17세기 초부터 19세기 중엽 “후미에(막부가 예수나 성모마리아가 새겨진 성상을 밟게 해 신도를 색출해내던 방법. ※ 주)”가 폐지되기까지 25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이곳은 종교탄압과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 받았다.

이 로케이션은, 전화입금사기범인 주인공(후지와라 키세츠 분)이 오래전 헤어진 손자를 자처하며 쇠락한 상점가의 악기점주 할머니(하라 치사코 분)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고, 히로인인 키요라(스기하라 아미 분)를 비롯한 청년들과 상점가의 옛 모습을 담은 8밀리 영상ㆍ사진을 모아 상영회를 준비한다는 판타지 같은 설정과 맞물리면서 시너지효과를 발휘한다.

<노사리: 순간의 영원>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이 있다. 바로 스태프와 캐스트 외에도 아마쿠사 지역 주민들이 또 하나의 주체로 참여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야마모토 타츠야 감독은 미수(米壽)를 넘긴 조모의 자택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옛집」으로 스페인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최우수감독상을 받았다. 「노사리: 순간의 영원」는 그가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카미하테 스토어」이후 8년만에 내놓은 두 번째 극영화다. (C)2020 Kitashirakawaha
야마모토 타츠야 감독은 미수(米壽)를 넘긴 조모의 자택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옛집」으로 스페인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최우수감독상을 받았다. 「노사리: 순간의 영원」는 그가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카미하테 스토어」 이후 8년만에 내놓은 두 번째 극영화다. (C)2020 Kitashirakawaha

홍상현

<카미하테 스토어> 이후 8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었셨습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노사리: 순간의 영원>의 원안을 생각한 게 <카미하테 스토어>가 개봉했을 당시였어요. 저 같은 인디필름메이커는 기획, 제작비 확보, 시나리오 집필, 스태프 구성, 캐스팅, 로케지 결정과 협조요청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직접 해결해야 하는지라 전작을 만들 때도 시간이 많이 걸렸지요. 그런데 이렇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작품을 초청해주셔서 고생을 보상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상현

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계시지만 언젠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시리라는 생각은 못하셨을 것 같은데요. (웃음) 평소 한국영화에 대한 인상은 어떠신가요.

야마모토 타츠야

다른 곳도 아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제 작품을 초청해 주신 건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제 영화 어딘가에 논리로써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함이 있다는 의미일 거라고 받아들였지요.

그리고 한국영화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말씀드리면, 일단 국책으로서 영화진흥을 도모하고 있는 점, 영화제작현장의 노동환경이 일본에 비해 제대로 정비되어 있는 점, 세계를 영화의 ‘시장’으로 의식하고 있는 점 등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에 비영어권 영화로써 모국어를 사용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사실(<기생충>) 등, 영화가 어엿한 하나의 ‘산업’으로 정비되어 국제적으로 시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게 특기할 만하고요. 한국에서 온 학생들이 일본의 촬영시스템과의 차이점을 잘 이야기해 줘요. 예컨대 일본에서는 촬영을 할 때 ‘단계’의 형태로, 우선은 장면 전체에서 배우의 움직임을 확인하면서 촬영의 플래닝(planing)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한국에는 없는 과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영화제작의 방법론에서 나타나는 두 나라의 차이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홍상현

좋아하시는 한국영화의 작품이나 감독, 배우 등이 있으신가요.

야마모토 타츠야

이창동 감독은 예전에 제가 근무하는 교토예술대학에서 교편을 잡으셨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영화작가입니다. 제 다큐멘터리영화 <옛집>을 극찬해주셔서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밖에 봉준호 감독, 양익준 감독 등으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홍상현

먼저 필모그래피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첫 영화는 오픈경기 복서, 즉, 무명의 스포츠선수들을 무려 6년 동안이나 취재한 다큐멘터리(<짐>)였고, 다음 작품은 구순의 할머님이 평생을 보내신 낡은 집을 다룬 작품(<옛집>)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공통점 하나가 발견되는데요. 추억의 유물이 되어버린 프로복싱이나, 철거를 앞두고 있는 조모의 집이라는. 이른바 ‘사라져가는 대상에 주목하는’ 시선입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저는 늘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있는 아이였습니다. 이건 지금도 변함이 없지요. 또, 예컨대 주변 아이들이 ‘다음 주에 있을 축제가 기대된다’고 생각할 때도, 저는 왠지 축제 이후를 상상하며‘축제가 끝나고 나면 쓸끌하겠네’하고 생각하는 편이었지요. 즐겁기보다는 쓸쓸한, 기쁘기보다는 안타까운 심정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겁니다. 이렇다 보니 언제나 흥미를 느끼는 건 승자가 아니라 패자(<짐>), 번영이 아니라 쇠퇴하는 장소(<옛집>)였어요. 왜냐고 물으신다면 명확하게 답하기 힘들지만, 죽음을 의식하고 어렴풋이 한발 한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기록’을 주요한 표현수단으로 삼는 영화를 선택한 것도, 죽음에 항거하는 제 나름의 방식이 ‘영화’라는 ‘손톱자국’을 세상에 남기려 했던 겁니다.

손자를 가장해 찾아온 전화입금사기범을 아무렇지 않게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아마쿠사의 할머니는 그 자체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지금 나의 모든 처지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니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노사리’의 사상을 상징하는 시대의 유산과도 같은 존재다. (C)2020 Kitashirakawaha
손자를 가장해 찾아온 전화입금사기범을 아무렇지 않게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아마쿠사의 할머니는 그 자체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지금 나의 모든 처지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니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노사리’의 사상을 상징하는 시대의 유산과도 같은 존재다. (C)2020 Kitashirakawaha

홍상현

이 이야기는 이후에 제작하신 극영화에서도 공통의 경향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예컨대 첫 극영화인 <카미하테 스토어>는 이른바 “자살의 명소”라 불리는 절벽 인근의 작은 빵집, <노사리: 순간의 영원>에는 한때의 영화가 전설처럼 전해지는 황량한 시골 상점가의 악기점이 무대거든요. 게다가 두 곳 모두 실제로 존재하는 지역에 있고요. 다만 이 소재에 굳이 픽션을 더해 드라마로 만들어 내게 된 데에 는 나름의 계기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쇠퇴해가는 장소에 대한 제 취향이 극영화에도 이어진 것 아닐까 합니다.

<카미하테 스토어>는 말씀하신 것처럼 자살의 명소가 영화의 무대지요. 실제 지명이 카미히테는 아니고요. 섬에 있는 로케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폐가를 개수해 세트를 만든 겁니다. <노사리: 순간의 영원>은 아시다시피 한때 번화했지만 이제는 곳곳에 셔터가 내려져있는 상점가가 무대지요. 구마모토 현 아마쿠사 시에 있는 상점가에서 촬영했는데 제가 여행 중에 골목이나 상가, 오래된 가옥 등을 돌아보는 걸 워낙 좋아하다 보니 종종 로케이션 헌팅을 하는 기분이 되고는 해요. 아트디자인으로 세트를 제작하기보다 촬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실제 장소를 찾아내고, 제작진은 그곳의 주민이 되어 작품의 등장인물에 다가가는 느낌으로 영화를 만드는 거죠. 이런 특성 때문인지 제 영화는 종종 ‘다큐멘터리 같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매번 미술 관련 예산이 부족하다는 원인도 있겠지만요. (웃음)

 

홍상현

<노사리: 순간의 영원>의 무대가 되는 아사쿠사의 특성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게 자연재해 때문이었고, 16세기 기독교가 전해진 이래 오랜 종교탄압을 받았는가 하면, 권력의 착취에 신음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실로 “고난의 땅”이라는 느낌인데요. 감독님의 스타일 상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대단히 깊은 취재가 이루어졌을 것 같습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기획 초기에는 전혀 다른 지역에서의 촬영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방침을 변경하게 되어 코야마 쿤도 씨의 고향 아마쿠사를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아마쿠사 분들에게 전화입금사기범이 손자로 위장하고 시골마을의 할머니를 속였다가, 오히려 할머니의 진짜 손자가 되어 버린다는 영화의 스토리를 이야기했더니 “감독님, 아마쿠사라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지도 몰라요”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모든 것을 하늘의 뜻으로 여겨 받아들이는 아마쿠시 사람들의 기질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 직업 지역을 체험하면서 ‘사람을 용서한다,’ ‘처해진 상황을 (숙명처럼) 받아들인다’등, ‘마음과 관련한 소개’를 구상해보았습니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노사리’라는 말에 담긴 ‘우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인간보다 거대한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겠고요.

이러한 정신성은 토테미즘에서 유래한 것으로 옛날에는 상당히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의식이죠. 어느 순간부터인가 잃어버린 채 세월이 흘러왔습니다만.

그렇다고 <노사리: 순간의 영원>이 이런 문명비판적인 시각까지 담고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전화입금사기범으로 손자를 가장해 찾아온 낯선 사내를 받아들이는 아마쿠사의 할머니를 그 자체‘노사리’의 사상을 상징하는 시대의 유산과도 같은 존재로 표현해보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시나리오를 고쳤지요.

 

홍상현

평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돈’에 관한 화제는 잘 꺼내지 않는 편입니다만, <노사리: 순간의 영원>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네요. 애초에 극장공개를 전제로 제작된 영화이지만 투자자를 찾기가 도저히 쉽지 않은 기획이기 때문입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노사리: 순간의 영원>과 관련해서, 저는 감독인 동시에 제작자로서의 역할 또한 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이런 수수한 기획에 돈을 내 줄 사람도 없거니와, 설령 돈을 들여 제작을 완료했다손 치더라도 지금과 같은 일본의 흥행시스템에서는 투자회수가 100퍼센트 불가능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소속된 교토예술대학 영화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과소(depopulation)로 고심하는 아마쿠사 시에 장기체재하면서 현지 분들과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대학과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제작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틀에서는 성립될 수 없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지요. 촬영을 맡은 스즈키 카즈히로 씨와 저를 포함, 스태프의 절반 정도는 교토예술대학의 교원으로 모두 노 개런티입니다.

이렇게 해서 가장 큰 예산이 소요되는 인건비를 줄이는 방법을 써서 영화를 완성하기는 했어요. 몇 년의 시간이 걸려버렸지만. 그래서 비용을 줄인 만큼 이익이 발생하면 대학과 아마쿠사 시, 스태프ㆍ캐스트 등 모두에게 성공보수를 분배하는 것 까지가 제가 맡고 있는 임무입니다.

 

홍상현

주인공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우선은 그가 주로 고령자가 피해를 입는 전화입금사기의 상습범으로 설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인생에 뭔가 누락된 부분이 있는 사람”이 주인공의 콘셉트였어요. 그런데 속여야 할 대상인 할머니로부터 예상과 다른 반응이 ‘훅!’하고 들어오는 거죠. 당시까지 그의 마음에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있었던 건, 예컨대 사기 동료와의 연대 의식 같은 것일 텐데, 그 상습적인 연결고리가 어떤 상황으로 갑자기 끊어져버린 타이밍에 할머니가 불쑥 나타나버린 겁니다.

「노사리: 순간의 영원」의 무대인 아마쿠사의 상점가. 이 영화를 만든 야마모토 타쿠야 감독도 시골의 상점가에서 태어났다. “미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복잡”하고 “어디선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늘 북적”이던 그곳은 야마모토 감독을 영화와 만나게 해주었다. (C)2020 Kitashirakawaha
「노사리: 순간의 영원」의 무대인 아마쿠사의 상점가. 이 영화를 만든 야마모토 타쿠야 감독도 시골의 상점가에서 태어났다. “미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복잡”하고 “어디선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늘 북적”이던 그곳은 야마모토 감독을 영화와 만나게 해주었다. (C)2020 Kitashirakawaha

홍상현

주인공을 연기한 후지와라 키세츠 배우의 연기도 무척 훌륭했는데요. 특히 초기의 아웃(outlaw)로 한 이미지로부터 할머니를 만나고 동네의 청년들과 교류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마치 1인 2역 같은 느낌이었어요.

야마모토 타츠야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매일 촬영을 하면 후지와라 배우가 그의 ‘연기라는 서랍’ 속에서 어떤 것을 꺼내올지 무척이나 기다려졌어요. 그도 저와의 캐치볼이 즐거웠던 것 아닐까요? 제게 주어진 일이란 이 모든 과정을 늘 재미있어 하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OK 사인을 내는 거였습니다.

 

홍상현

다음은 히로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키요라 역의 스기하라 아미 배우의 캐스팅이야말로 <노사리: 순간의 영원>의 완성도를 높여준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자연스러운 느낌과 연기가 놀라웠는데요.

야마모토 타츠야

스기하라 배우는 교토예술대학 배우 코스 소속으로, 촬영 당시 3학년이었습니다. 저는 캐스팅을 하면서 “제작 참여인원 모두와 숙식을 함께하면서 연기는 물론 지역조사, 식사준비, 현지 분들과의 소통 등 스태프로서의 역할을 병행해 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학생은 아마쿠사의 젊은이로 분하는 거니까 스태프로서 하는 일들이 그대로 캐릭터 연구와 준비에 연결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죠. 아울러, 이런 작품일수록 현지 분들로부터 인정과 응원을 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해 촬영에 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조건을 내걸고 나니 캐스팅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없더라고요. (웃음) 그나마 스기하라 배우와 친한 친구로 나오는 나카타 미나미 배우가 응모한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지만. 스기하라 배우는 제 학생이기 때문에 이미 그 표현력을 확인한 적이 있었거든요. 예상대로 주인공 키요라를 훌륭하게 연기해주었습니다. 그 친구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정도로 저로서도 신뢰가 있었지만요.

 

홍상현

‘아마쿠사에서 나고 자란 키요라’를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어떤 부분에 신경을 쓰셨는지 궁금합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일단 극중에서 키요라의 친한 친구인 유카리를 통해 일본의 시골이 단지 ‘소박한 인정이 넘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려 했습니다. 막연한 동경만으로 지방생활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요. 키요라는 유카리가 ‘아마쿠사를 너무 좋아해 떠나지 않는 것’이라 믿지만, 알고 보면 기러기 아빠를 방치할 수 없어서라는 사정이 있습니다. 결국 그녀는 억지로 주민모임 등에 참석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교제를 거절하면 손가락질을 받는’ 지역사회의 특성에 숨 막힘을 느끼면서 결국 도시로 탈출하지요.

이렇듯 주변인물을 통해 향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역의 현실을 영화에 담아내려고 시도해봤는데요. 물론 그저 비판적인 시각만을 드러내려는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사람살이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죠.

 

홍상현

키요라라는 인물에 특히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그녀가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 즉, 사운드와 등장인물을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지역FM의 진행자이고 엔지니어와 함께 일상의 소리를 모으는 작업을 이어갑니다. 잊혀져가는 모든 것들을 모아놓은 것 같은 이 애처로운 마을을 표현하면서, ‘소리’에 주목한 것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기획단계어서 <노사리: 순간의 영원>은 지금보다 더 ‘소리’를 의식하는 작품이었습니다.

키요라도 “뉴스원고를 읽다가 그것이 부정적이거나 뭔가를 비판하는 내용일 경우, 갑자기 좋아하는 시를 낭송해버리는” 색다른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었지요. 나라와 나라의 사이에 벽을 만들거나, “내가 행복해지지 않는 것은 저놈 때문”이라는 식으로 타자를 표적으로 삼아 자신에 대한 지지를 모으는 일이 온 세상에 만연한 현실에서 “지금 내가 내뱉은 말의 진동이 돌고 돌아 지구 반대편의 나뭇잎을 흔든다.” “지금 나 자신이 무엇을 발하는지에 따라 세계가 바뀐다”는 감각을 영화에 구현하고 싶어‘소리’로 상징되는‘파동’과 ‘진동’을 모티브로 설정한 거였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제가 애초에 설정해 놓은 날카로운 시점이 도리어 영화로 통하는 입구를 좁히고 있다고 느낌이 들면서 이런 설정도 조금씩 변화해 갔어요. 그 결과 “하늘의 울림을 모아, 어디선가 듣고 있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다”는 심플하고도 명징한 메시지가 남았습니다.

로케지인 아마쿠사의 풍경. 얼핏 세월의 흐름마저 빗겨간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처럼 보이는 이곳은 25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조정의 종교탄압과 무거운 세금에 고통 받았던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C)2020 Kitashirakawaha
로케지인 아마쿠사의 풍경. 얼핏 세월의 흐름마저 빗겨간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처럼 보이는 이곳은 25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조정의 종교탄압과 무거운 세금에 고통 받았던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C)2020 Kitashirakawaha

홍상현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이 쓸쓸한 마을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기억해내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찾아 헤매는 것이 바로 과거의 영상이라는 겁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과거의 영상을 모아 상점가의 영화관에서 상영회를 하려는 청년 모임을 등장시키는 설정은 코야마 프로듀서의 아이디어입니다. 아마 본인이 직접 그런 기획을 아마쿠사에서 실행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였을지도 모르겠는데요. 8밀리 필름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부친이 8밀리 카메라로 우리를 찍어주셨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아마쿠사에서 현지조사를 진행하던 중에 실제 일어난 대화재를 기록한 8밀리 필름이 나온 겁니다. 단순히 그리운 옛 모습을 담은 영상이 아니라, 모든 것을 태워버린 사건에 관한 자료라는데 집중을 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수정해서 대화재라는 사건까지 영화에 집어넣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다는 사건은 대화제로 소중한 것을 모두 잃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과거의 뭔가가 누락된 채로 살아온 주인공, 그리고 쇠락한 상점가와 더불어 할아버지, 아버지도 그 자체로 과거가 되어가는 키요라 또한 연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홍상현

다음은 허수아비를 만드는 공예가로 분한 에모토 아키라 배우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의 관객도 얼굴을 보면 누군지 알아볼 정도의 대배우이신데 캐스팅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웃음)

야마모토 타츠야

에모토 배우는 예전에 교토예술대학 영화과에서 강의를 하신 적이 있어서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공예가 역을 부탁드렸더니 쾌히 승낙해주셨어요. 막상 촬영이 시작되니 평소의 ’에모토 씨’와 너무 다른 느낌이 되어 좀 무서웠지만. “이봐, 이 장면 말인데,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라든가 “이 정도로 OK가 되겠어” 하면서 연기에 관한 의견을 어찌나 박력 있게 어필하시는지. (웃음) 도리어 그 기세에 눌려 무심코 OK를 내 버렸다가 나중에 역시 “다시 한 번 가죠.” “아니, 그렇게 말고요”라면서 넉살좋게 NG를 내는 편이 좋았을까 상황을 곱씹어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홍상현

게다가 그가 극중에서 만드는 허수아비에는 중요한 메타포가 있습니다.

“생각.” 영어자막에서는 “스피릿”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사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생각ㆍ마음” 등의 중의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특히 <노사리: 순간의 영원>에서는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추모와 그리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허수아비를 제게 소개해 준 사람은 극중에서 라디오방송국의 녹음기사로 분한 사키이 요스케 배우입니다. 실은 전업연기자가 아니라 저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교원인데요. 그가 아마쿠사를 돌아다니다 허수아비를 찾아내고 잔뜩 흥분해서는 “이 허수아비는 단순한 허수아비가 아니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담아 만들지 않는 이상 어떻게 이런 표정이 나올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말은 고스란히 영화의 대사로 쓰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노사리: 순간의 영원>의 등장인물은 ‘상실’이라는 키워드로 묶이잖아요. 이 의미를 담아내는 시각적인 신을 하나정도 찍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잘 된 거죠. 다만 허수아비의 모습이 살짝 그로테스크하다 보니 그저 과거와 이어지는 감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소 복잡한 느낌을 자아내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노사리: 순간의 영원>은 제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미지에 코야마 프로듀서나 사키이 씨 같은 이들, 여기에 다시 지역 여러분들의 의견이 더해지면서, 흡사 ‘맥’이라는 동물이 꿈을 빨아들이듯 모든 이미지를 흡수해 더욱 커졌습니다.

지역FM방송의 진행자인 히로인 키요라(스기하라 아미 분)는 「노사리: 순간의 영원」에서 사운드와 등장인물을 매개하는 역할 또한 수행한다. 촬영 당시 스기하라 배우는 야마모토 타츠야 감독이 교편을 잡고 있는 교토예술대학 영화학과 3학년이었다. (C)2020 Kitashirakawaha
지역FM방송의 진행자인 히로인 키요라(스기하라 아미 분)는 「노사리: 순간의 영원」에서 사운드와 등장인물을 매개하는 역할 또한 수행한다. 촬영 당시 스기하라 배우는 야마모토 타츠야 감독이 교편을 잡고 있는 교토예술대학 영화학과 3학년이었다. (C)2020 Kitashirakawaha

홍상현

에모토 배우에게는 어떻게 설명하셨나요.

야마모토 타츠야

딱히 자세한 설명을 해드린 건 아니었어요. 서로 간에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한 에너지가 공유되고 있었거든요. 다만 한 가지 구상은 가지고 있었는데, 에모토 배우가 분한 극중 인물이 “어쩌면 이 사람, 인간이 아니라 허수아비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구현하는 순간 OK사인을 내자고 생각했습니다.

 

홍상현

캐스트와 관련한 화제의 마지막 순서로 하라 치사코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하라 배우에 관한 이야기에 신중을 기한 것은 <노사리: 순간의 영원>이 당신의 유작이 되었기 때문인데요.

야마모토 타츠야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뵈었을 당시 하라 배우는 이미 투병중이셨습니다. 하지만 의상 피팅을 할 때까지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지요. 알려주면 캐스팅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즉시 촬영이 중단되어버리니까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제작진으로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촬영 전날 퇴원하시자마자 아마쿠사의 로케지로 찾아오셨거든요.

또 하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을 말씀드리면, 촬영 첫날에 하라 배우에게는 대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경우, 무리한 애드리브가 들어가 연기자들 사이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난국을 맞을 수도 있는 까닭에 크게 걱정했는데, 오후에 잠깐 동안의 휴식시간이 끝나고 나자 하라 배우가 직접 당신의 연기부분을 수정해오셨어요. 그게 현재 관객 여러분이 <노사리: 순간의 영원>을 통해 보실 수 있는 할머니의 모습입니다. 하라 배우의 그 엄청난 실력에 정말 무시무시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한 사람의 캐스트라는 차원을 넘어 완전히 우리를 리드하면서 최적의 지점에서 당신의 능력을 구현하신 겁니다.

개봉에 즈음해서 다시 한 번 이때의 일을 하라 배우와 웃으면서 되돌아보고 싶었는데, 이 시간을 함께 맞지 못하고 갑자기 돌아가셔서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홍상현

평생을 연기에 헌신한 배우의 빛나는 모습에 다시금 경의를 표하면서, 감독님의 코멘트로 이 부분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당신께서는 출연의뢰를 위해 찾아간 신주쿠의 찻집에 바람처럼 나타나셨다가, 촬영이 끝나자 다시 아마쿠사의 바람처럼 사라지셨습니다.

그 모습만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마쿠사의 공예가로 분한 에모토 아키라 배우. 교토예술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며 야마모토 타츠야 감독과 맺은 인연으로 「노사리: 순간의 영원」에 출연한 그는 이번에도  대배우의 중량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C)2020 Kitashirakawaha
아마쿠사의 공예가로 분한 에모토 아키라 배우. 교토예술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며 야마모토 타츠야 감독과 맺은 인연으로 「노사리: 순간의 영원」에 출연한 그는 이번에도 대배우의 중량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C)2020 Kitashirakawaha

홍상현

앞에서 거짓, 혹은 판타지가 깨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감독은 결국 현실의 길을 택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노사리: 순간의 영원>이라는 영화가 평범한 휴먼드라마를 넘어서게 만드는 포인트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마모토 타츠야

저는 ‘현실’과 ‘거짓 혹은 판타지’의 경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실도 결국 저 자신이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게 현실이라는 건 누구도 증명할 수 없다고 믿으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느끼는 각자의 세계가 있을 따름이죠. 엄연한 ‘현실세계’라는 건, 실은 어디에도 없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 ‘정보’라는 게 마치 그 엄연한 ‘현실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과 ‘거짓’으로 양분하고 있죠. 우리는 바로 그 ‘정보’에 따라 우왕좌왕하다가 세상에 참과 거짓만 존재한다는 식의 착각에 빠져 있는 거고요.

하지만 세계가 과연 그렇게 빈곤한 곳일까요. 저는 거짓이든 참이든 이를 어떻게 느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세상이 얼마든지 풍요로워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노사리: 순간의 영원>의 2시간 9분 안에도 현실과 거짓의 경계는 없답니다.

 

홍상현

코로나가 수습되면 가장 먼저 어디로 향할지를 결정하게 되는 인터뷰였습니다. <노사리: 순간의 영원>에 대한 감독의 소개와 연출의도, 그리고 볼거리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야마모토 타츠야

저 자신 시골의 상점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상점가 건물은 미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복잡했고 거리는 어디선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늘 북적거렸죠. 마침 걸어서 5분 거리에 10개관 이상을 갖춘 영화관이 있었기에 이내 영화관이 제 ‘청춘’이 되어버렸어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상점가에 들리는 사람들도 줄어들어버렸지만. 오래된 점포는 사라지고, 늘어선 체인점에서 전국 어디서든 팔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물건들이 진열될 뿐이죠.

<노사리: 순간의 영원>을 다 찍자마자 부모님들이 하던 가게가 문을 닫았고, 제가 나고 자란 상점가의 건물도 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어린 시절 이불 속에서 바라보던 천정의 얼룩도, 옥상에서 돌고 있던 서큘레이터의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겠죠. 이렇게 생각하면 인생 자체가 상실의 연속이라는 느낌마저 듭니다.

<노사리: 순간의 영원>은 개봉을 앞두고 있다가 코로나 19 때문에 일정이 연기되었어요. 물론 온라인 공개라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이 모든 상실 가운데서 삶의 활기를‘거짓의 저편’에서나마 찾아보려는 이들을 그린 이 작품이 상영되어야할 장소는 각각으로 분단된 개인의 컴퓨터화면이 아니라, 거리의 영화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장은 어렵지만 언젠가 사람과 사람 간의 이어짐이나 거리의 흥청거림이 조금이라도 돌아올 때까지 공개를 연기하고 싶었어요.

 

홍상현

극영화감독으로써는 아직 많은 기회가 있는 “비교적 신인”이십니다(웃음). 차기작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야마모토 타츠야

54세의 신인이라는 것도 곤란한 참 얘긴데요. (웃음) 다음 작품은 방금 전에 언급해드린 제 가족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살짝 픽션을 가미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요. 사람에게‘기억’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볼 텐데요. 아무래도 제 영화니까 화려한 미래가 아니라 잊혀져가는, 과거의 기억에 초점이 맞춰지겠지요.

야마모토 타쿠야 감독은 말한다. “엄연한 ‘현실세계’라는 건, 실은 어디에도 없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정보’라는 게 마치 그 엄연한 ‘현실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과 ‘거짓’로 양분하고 있죠. 우리는 바로 그 ‘정보’에 따라 우왕좌왕하다가 세상에 참과 거짓만 존재한다는 식의 착각에 빠져 있는 거고요.” (C)2020 Kitashirakawaha
야마모토 타쿠야 감독은 말한다. “엄연한 ‘현실세계’라는 건, 실은 어디에도 없지 않나 싶어요. 하지만‘정보’라는 게 마치 그 엄연한 ‘현실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과 ‘거짓’로 양분하고 있죠. 우리는 바로 그 ‘정보’에 따라 우왕좌왕하다가 세상에 참과 거짓만 존재한다는 식의 착각에 빠져 있는 거고요.” (C)2020 Kitashirakawaha

“이번에 직접 찾아뵙지 못해서 너무 아쉽습니다.

저는 매년 학교 일로 한국을 방문하고,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세계가 알쏭달쏭한 상황인지라 더더욱 이번에 한국에 가서 좀 더 많은 분들을 만나고 싶었거든요. 나라와 나라가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나라에 한 사람이라도 많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뿐인 친구와의 인연은 국가와 국가 간의 교감마저 초월할 수 있으니까요.

<노사리: 순간의 영원>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관용적이지요. 참과 거짓처럼 사물을 OX로 구분하지 않으며, 주의나 사상을 택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기초해서 만들어졌으니까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노사리의 정신을 담아낸다고 할까요.

아무쪼록 영화제는 물론 앞으로 다른 기회를 통해 좀 더 많은 관객 분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의 영화작가로서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폐막식이 끝나고 <노사리: 순간의 영원>이 넷팩상 특별언급의 영예를 안았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던 야마모토 감독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여간한 장편영화가 완성되고도 남았을 시간을 함께해온 스태프와 캐스트, 아마쿠사 주민들, 심지어 포구를 내려다보며 우뚝 솟아있는 사키츠교회의 첨탑위의 바람에게조차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의 말을 건네는 느낌.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며칠 전, 긴 기다림 끝에 <노사리: 순간의 영원>이 5월 29일 유로스페이스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쿠사의 풍광을 모두에게 소개해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린아이처럼 설레어하며 예매권 판매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는 아마쿠사주민들의 소식과 함께.

잠시 눈을 감는다.

어디선가 동지나해에 면해있는 그 작은 섬의 불 꺼진 상점가에 울려퍼지던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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