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가 부족해 한국 인문학 수준이 낮다

  • 기자명 김재인
  • 기사승인 2019.01.04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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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문학은 왜 경쟁력이 낮을까? 또는 한국의 자연과학이나 공학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느껴지는 걸까? 대중적으로 호응 받는 수준 높은 인문 서적은 왜 없는 걸까? 내 생각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인문학의 윤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인문학을 규정하는 방법은 여럿일 수 있다. ‘인문(人文)’이라는 말을 풀어 ‘사람의 무늬’라고 할 수도 있고, 주요 분과의 앞 글자를 묶어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규정 방식들은 인문학의 본질을 말해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사실 인문학은 엄밀한 분류법에 따른 명칭도 아니다. 인문학은 영어 ‘휴머니티스(Humanities)’나, 중세의 ‘아르테스 리베랄레스(Artes Liberales)’ 즉 영어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나, 르네상스의 ‘후마니타스(Humanitas)’에 대응하는 말 또는 번역어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 물론 서양에서의 용례를 보아도 시기마다 포함하는 분과가 달랐기 때문에, 새로운 규정이 필요하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인문학, 그 중에서도 철학을 했다. 내가 ‘철학을 했다’고 말할 때는 대략 다음 세 가지 활동을 포함한다. 학생 시절 철학을 배웠고, 전통 철학의 여러 주제들에 해당하는 것들을 연구하고 글을 썼으며, 철학자로서 당대의 문제에 철학적으로 답하려 했다. 그러니 내가 인문학이 무엇인지 나름으로 규정해 보려는 시도는 그간의 세월에 값한다고 감히 고백하고 싶다. 내가 해 왔던 활동에 대한 규정일 터이니 말이다. 내 나름의 규정에 동의하지 않는 인문학자도 많을 수 있다. 수긍한다. 그래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시도해 보는 게 항상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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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언어 탐구'로부터 시작된다

흔히 인문학의 목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 ‘인간에 대한 성찰’ 같은 걸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무릇 모든 학문과 예술이 그런 내용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정의로는 지나치게 넓다. 내가 보기에 인문학의 가장 밑바닥에는 언어 사랑이 있다. 희랍어(고전기 그리스어)로 표현하면 ‘필롤로기아(philologia)’라고 할 수 있다. 언어(logos)에 대한 사랑(philia) 말이다. 오늘날 필롤로기아는 ‘문헌학’으로 주로 번역되는데, 번역어로 무슨 말을 쓰건 그 근원에는 ‘언어 탐구’, 즉 ‘언어에 대한 탐구’ 및 ‘언어를 통한 탐구’가 놓여 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인문학의 목적 말고 수단을 말하고 있다.

내가 언어라는 수단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렇게 했을 때, 또 그렇게 해야만, 다른 학문 활동과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언어로는 세상을 기술하기 어렵다’, ‘언어는 불완전하기 그지없다’ 등의 주장을 인문학은 언어를 통해 펼친다. 하지만 자연과학은 언어를 포기하고 과감하게 수학이라는 인공 언어를 통해 생각을 표현하고 세상을 기술한다. 예술 또한 언어를 포기하고 색, 형태, 음, 질감, 동작 등 감각에 기댄다. 이렇듯 언어를 불평하는 행위마저 언어로 실천하는 활동이 인문학이다.

이 점은 인문학자의 활동을 보면 더 두드러지게 입증된다. 문학이 언어로 된 표현들을 탐구한다는 점은 굳이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현실에서 문학은 ‘문예학’(시, 소설, 극 등 언어 예술 탐구)이기도 하고 ‘문헌학’(문헌 해석을 통한 탐구)이기도 하고 ‘문예’(언어 예술의 창작)이기 하다. 설사 그럴지라도 이 모두가 언어 실천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역사학은 사실(事實)을 탐구한다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사실(史實), 즉 선대와 당대의 기록에 기대어 탐구를 행한다. 설사 특정한 사실(史實)이 거짓일지라도, 즉 사실(事實)이 아닐지라도 그에 대한 판정은 대체로 다른 사실(史實)에 근거한다. 철학은 언어로 진술된 사상을 탐구한다. 플라톤이 어쩌고, 데카르트가 어쩌고, 칸트가 어쩌고, 니체가 어쩌고, 등 ‘누구누구 말에 따르면...’이나 ‘누구누구는 이렇게 말했다’가 철학에서 너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 관용적 표현법 뒤에 숨은 특정 철학자의 독창적인 생각의 결을 파헤치겠다는 의도까지 폄하해서는 안 되리라. 그런데 모든 철학자는 자기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 최대한 정교하게 표현한다. 모든 철학자는 그렇게 표현된 생각을 파악해서 자기 생각의 밑천이나 불쏘시개 삼으려 한다. 이 점에서 철학자는 일차적으로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한국에서 인문학이 방황하는 이유가 ‘언어’ 때문이라고 본다. 일단 인문학은 오랜 기간에 걸친 언어 습득을 전제로 한다. 언어 습득은 단기간에 가능하지 않고, 한 언어에 숙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나아가 개별 언어권 문학과 역사를 탐구하는 게 아닌 이상, 아니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읽어야 할 자료들은 여러 언어로 되어 있기에, 인문학을 하려면 여러 언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숙달은 꼭 필요하다. 시를 읽을 때만 해당 언어에 통달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가령 철학이라면, 플라톤이 쓴 희랍어와, 데카르트가 쓴 라틴어 및 프랑스어와, 칸트가 쓴 독일어를 모르면서 철학을 공부했다고 말하기는 참 곤란한 일이다. 시를 읽을 때처럼은 아니더라도, 번역으로 다 포괄되지 않는 뉘앙스들은 해당 언어로 파고들어가서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철학 공부의 태반은 이런 작업이며, 이 과정을 건너뛰면 철학을 가장한 허구가 되거나 개똥철학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서 외국어를 능숙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게 요점은 아니고, 해당 사상가의 중요한 생각에 도달한다는 게 요점이기 때문에, 내 서술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외국어 공부에 매몰되다 보면, 정작 철학은 시작조차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항상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 균형은 내가 배우려는 철학자가 흥미로운 생각을 개진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생각을 나의 문제를 위해 써먹을 수 있는지 주시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아무튼 철학은 특히 어렵다는 점만 지적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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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병신체'의 등장은 이해력 부재의 증거

나는 인문학이 언어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이 기준을 놓고 한국의 인문학과 인문학자를 평가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일단 구분해야 하는 건 ‘애호가’와 ‘연구자’이다. 인문학의 각 분과를 애호한다는 것과 그 분과의 실천을 잘 해낸다는 건 별개의 일이다. 인문학 담론이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용어들의 연속이라고 해서 “인문 병신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이런 조롱은 아주 일리 있다. 왜냐하면 꽤 오랜 기간 철학을 공부했고, 그것도 현대 프랑스 철학으로 박사 학위논문을 쓴 내가 보아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철학 저술들 중에는 실제로 많기 때문이다. 글쓴이에게 설명해 보라고 하면, 다른 인문 병신체 신공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요컨대 그렇게 쓸 수밖에 없어서 쓴 것이고, 정작 글쓴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고 짐작하면 십중팔구 맞다. 이 현상은 주로 철학 및 이론 분야에서 목격된다. 윤리의 부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일단 원문으로 된 글을 읽을 때 잘 이해가 안 됐고, 반복해서 계속 읽다 보니 자기 식으로 이해하든지 그냥 용어만 외우든지 해서 아무튼 결과적으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남에게 설명하기는 여전히 요령부득이다. 이 상태로 글을 쓰면 글쓴이 본인도 모르고 독자도 모르는 글이 완성된다. 더 중요한 건, 다른 전문가들의 역할이다. 대다수가 잘 모르겠으니, 서로 지적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나아가 그런 글이 유통되는 것에 침묵하거나 동참한다. 비평 담론의 부재, 논쟁의 부재는 산 증거이다. 인문 병신체는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나는 철학 개념이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된다고, 쉽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럴 거면 철학이라는 분과 자체가 필요 없을 것이다. 오늘날 대학에서 철학 분과가 없어져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전혀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아무튼 철학은 언어 해독에서 출발해서 개념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는 굉장히 중요한 활동이고, 애호가는 많을 수 있지만 정작 철학자는 너무나 드물 수밖에 없다. 조금 톤을 높이자면, 인문학을 즐기는 것과 인문학자로 실천하는 일은 너무도 다르며, 굳이 인문학자일 필요도 없다. 이런 구분이 너무도 반민주적으로 여겨지기에, 아무나 인문학을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고 나는 진단한다. 누구든 인문학을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하지만 언어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언어를 놓게 되면 아무 말이나 하게 된다. 그건 인문학자의 삶의 태도로서 부적절하다.

Photo by Sunny Ng on Unsplash

'동양적인' 혹은 '한국적인' 옛 것은 정말 존재하는가

‘동양적인 것’을 곁들이면서 ‘한국적인 것’으로 향하는 인문학자도 가끔 눈에 띈다. 언어를 넘지 못했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읽힌다. 하지만 ‘동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라는 발상 자체는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본인이 한국어로 읽고 생각하고 쓰는데, 왜 옛 것에 뭔가 보물이 있다고 여기는 걸까. 대부분은 외국어인 한문으로 쓰였고, 오늘날은 번역을 통해서가 아니면 접근할 수 없으며, 그 점에서 서양에서 온 글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데. 한문 번역가가 서양어 번역가보다 더 믿을 만할까? 한문 문헌이 ‘우리 것’이라는 생각은 언어 사랑이라는 인문학의 기본을 놓아버리는 또 다른 기만일 뿐이다. 원천에 따른 구분과 차별만큼 조악한 건 없다. 생각과 사상을 종합하는 것은 나 자신이어야지 다른 누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인문학자의 긍지이다.

한국에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문학자와 문필가가 많다. 이 분들의 특징은 글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어려운 개념들을 나열하지도 않는다. 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면,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진술하는 대목이다. 생각은 중단되고, 거센 깨달음과 더불어, 새로운 경지가 보인다. 개념은 항상 생각을 위해 존재하며, 수사(rhetoric)에 이용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과학은 수학이라는 꽤나 객관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결과를 검증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인문학은 글로 결과를 공포하는데, 많은 글들은 검증 받지 않은 채로 분과라는 작은 동아리 안에서 유통된다. 과학자의 구체적인 작업에 과문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모른 채로 말하는 건 아니다. 내 논점은 인문학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가 다르고, 그 차이가 활동과 결과의 차이까지 낳는다는 점이다. 과학자가 타고났기 때문에 윤리적일 리는 없다. 다만 과학 활동 자체가 실증적인 검증과 비판을 내포하고 있기에 더 윤리적일 수 있다. 인문학은 사실과 해석을 오가는 활동이기 때문에 은폐가 쉽다. 인문학자가 윤리적이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말하는 윤리는 인문학 자체의 윤리이며, 세간의 규범을 따르라는 말은 전혀 아니다. 세간의 규범은 늘 요동치기 마련이며, 처세는 눈치 보기일 뿐이다. 인문학은 확고한 자존감을 세우고 행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되, 감히 알려고 하라.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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