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왜 오래 걸렸나

  • 기자명 선정수 기자
  • 기사승인 2021.08.1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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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이름을 새긴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1943년 10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지역에서 별세한지 78년 만이다. 정부는 오는 18일 대전현충원에서 안장식을 엄수할 예정이다. 뉴스톱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에 왜 이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 등을 분석했다. 

출처: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출처: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①왜 대전현충원에? … 서울현충원 안장 공간 없어

8월15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공군 특별수송기 편에 실려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인사들이 서울공항에 나가 장군의 유해를 맞이했다. 운구차는 서울공항을 빠져나가 대전현충원으로 향했다. 장군의 유해는 16~17일 대전현충원 현충관에 임시 안치됐고, 온·오프라인 추모식이 진행된다. 18일에 안장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17일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대한민국장은 건국훈장 가운데 최고 등급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첫 손에 꼽힐만한 영웅이 왜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고 대전으로 갔을까? 국가보훈처는 뉴스톱과 통화에서 "서울현충원은 남아있는 안장 공간이 없어 대전으로 모시게 됐다"고 밝혔다. 대전현충원 내에 홍범도 장군이 안장될 곳은 독립유공자 3묘역이다.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②홍범도 장군 고향은 평양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9세에 고아가 된 장군은 15세 평안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한다. 나고 자란 곳은 평양이다. 이역만리에서 숨을 거둔 장군의 유해를 고향으로 모시자면 평양으로 모셔야 마땅하다. 그러나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상황이 장군의 유해 봉환을 지연시켰다.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소련 극동 지역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된다. 홍 장군도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얀꾸르간 시르다리아 강 건너편의 사나리크 셀소비에트(카잘린스크 구역)로 이주했다. 이후 1938년 4월초 크즐오르다 도시구역인 크라스늬 고로독(붉은 구석) 60번지로 이사했다.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직후 홍 장군의 생활은 여유롭지 못했다. 그는 병원의 경비로 어렵게 일했다. 홍 장군 사정을 알게 된 고려극장 관계자들이 홍범도에게 매달 50루블을 받는 수직원(수위장) 자리를 만들어줬다. 홍 장군은 전용 건물이 없는 극장인 고려극장의 빈 창고에 모아둔 무대기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홍 장군은 1943년 10월25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집 근처에 조성된 분묘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중앙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사망 8주기인 1951년 10월25일 분묘 봉분이 내려앉자 크즐오르다시의 고려인 인사들과 전우들이 '홍범도 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해 성금(2000여루블)으로 철벽과 철로 된 비를 세웠다.

 

③유해 봉환 시도는 북한이 먼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봉환하려는 시도는 북한이 먼저 시작했다. 북한은 1993~1994년 홍 장군 유해를 봉환하겠다며 카자흐스탄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고려인 사회가 북측으로의 봉환을 거부했다.

이에 한국 정부 조사단은 1994년 9월 홍 장군 묘소를 조사하고 카자흐스탄 정부 측과 유해봉환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그러자 북한은 반발했다. 북한은 1995년 8월28일 평양방송을 통해 "홍 장군 유해봉환은 (남측의) 사기협잡극이며 홍범도 열사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들도 평양에 있기 때문에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국가보훈처와 기업은 1996년 5월 홍 장군 묘역 정비사업 지원에 1만 달러를 투입해 홍 장군 흉상 주변에 3개 기념비를 건립하고 공원묘역을 단장했다. 이후에도 보훈처는 시설물을 보수하는 등 묘역 정비사업을 지원해왔다. 2017년 7월에는 묘소 실태조사 때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관계자 등과 면담해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을 논의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4월9일 중앙아시아 순방 최종 보고 때 홍 장군 유해봉환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2019년 12월에 자국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홍 장군 유해를 보내겠다고 밝혔다. 이어진 협의 끝에 문 대통령은 지난해 3월1일 제101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을 최초 발표했다.

하지만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이 코로나19 관련 상황으로 연기되면서 유해봉환도 연기됐다. 북한은 또다시 홍 장군 유해를 평양으로 모셔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지난해 6월23일 "유해는 그의 고향인 평양에 안치돼야 한다"며 "카자흐스탄 정부도 북과 남이 통일된 이후에 홍범도의 유해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유해송환 책동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1년여가 지난 이달 카자스흐탄 대통령 방한이 성사됐다. 이에 따라 홍 장군 유해도 귀국길에 오를 수 있게 됐다.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④남아있는 과제…카자흐스탄 고려인 지원 등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17일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했다. 박 수석은 "카자흐스탄은 남북 모두와 수교를 맺고 있는 국가"라며 "우리 입장에선 대한민국으로 귀국해오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말했다.

박 수석은 이와 함께 홍 장군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었던 만큼 고려인 사회의 지지를 얻는 일에도 장시간이 걸렸다고 덧붙였다. 

그는 "홍 장군은 독립운동 영웅일 뿐만 아니라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이기 때문에 고려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 일(국내 봉환)이 섭섭하고 서운한 일"이라며 "고려인 사회의 지지가 이제 겨우 (어렵게) 오게 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박 수석은 이어 문 대통령이 2019년 4월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함께 홍 장군이 근무했다는 고려극장을 들르고 현지 고려인 동포들과 간담회를 개최한 일 등이 고려인 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보탬이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카자흐스탄 인구(1851만명)의 0.5% 정도를 차지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는 "고려인에게 홍 장군은 절대적 존재이자 고려민족의 상징이다. 그런데 유해 봉환의 과정에서 고려민족 사회의 여론이 무시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홍 장군을 그리 존경한다면, 홍 장군 부대원의 후손이 포함된 재한 고려인들에게 간이 귀화 가능성을 열어두면 안 될까? 홍 장군을 이렇게 품을 수 있다면 고려 민족에 대한 대우를 좀 달리하면 안 될까"라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언론발표를 통해 경제협력 강화, 감염병·기후 위기 등 국제 현안 협력 강화, 인적·문화적 교류 확대에 합의했다.


강제이주 당시 한인 17만여명 가운데 9만6000여명 정도가 카자흐스탄에 정착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고려인들이 이주열차에 실려 허허벌판에 도착한 시점은 겨울이 시작되던 때라 추위와 홍역 등으로 어린이 60%가 사망했다. 고려인들이 첫 겨울을 지냈던 바스토베 언덕에 세워진 비석에는 한글로 “이곳은 원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9일부터 1938년 4월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경착지이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카자흐스탄 사회는 이주한 고려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당시 카자흐인들이 이주 고려인에게 집을 비워주거나 당나귀에 빵을 싣고 와 나눠주었다는 미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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