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의 휘문고, 동맹휴학으로 1924년 고시엔 출전 실패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9.01.15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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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엔과 조선야구 역사> 시리즈

1회: 1923년 휘문고는 고시엔에 갔었다

2회: '일선융화'에 활용된 고시엔 조선 예선

3회: 휘문고는 어떻게 조선 최초로 고시엔에 진출했나

4회: 휘문, 대만 다롄상업과 고시엔서 첫 대결, 그 결과는?

5회: 휘문고, 동맹휴학으로 1924년 고시엔 예선 출전 못하다

휘문고보가 대련상업을 대파하고 8강에 올랐다는 소식은 다음날 조선에도 전해졌다. 동아일보는 1923년 8월 18일 기사에서 휘문의 승전보를 보도('휘문이 대승 구대사로')했다. 보도 시점이 하루 늦은 이유는 당시 동아일보가 석간신문이었기 때문이다. 

“대판조일신문사 주최의 중등학교야구대회에 조선을 대표하야 출전한 휘문고등보통학교는 (중략) 만주를 대표한 대련상업학교와 싸워 9-4로 승리를 얻었는데 18일 2회전에 출장하게 되었더라.”

이 기사는 스포츠 기사가 실리던 3면 최하단에 한 문장짜리로 배치됐다. 전해 5월 동아일보가 제3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이틀 연속 3면 톱 기사로 배치한 점과는 대조된다. 조선인들의 야구대회와 ‘조선 대표’가 참가하는 일본 오사카 야구대회를 보는 시각 차이가 읽힌다. 당시 이 대회를 가장 크게 보도한 조선 내 매체가 주최사인 오사카 아사히 신문 조선판이었다는 점도 보도 기조에 작용했을 것이다. 전조선야구대회와 이 대회를 주최한 조선체육회 창립에는 동아일보가 후원을 했다. 1920년 조선체육회 초대 이사진에는 장덕수 동아일보 주필이 포함돼 있었다.

1923년 7월 28일자 동아일보 사진 캡처. '중학야구계 패권을 잡은 휘문군'이라고 설명이 적혀 있다.

동아일보 8월 18일자가 경성 시내 가판대에 깔리고 몇 시간 뒤인 오후 4시 휘문은 일본 교토의 릿츠메이칸중학(현 릿츠메이칸 고교)과 8강전을 치렀다. 감독 박석윤에 따르면 이날에도 교포 수 백 명이 나루오구장에 모였다. 릿츠메이칸중학은 1905년 나카가와 쇼이치로가 설립한 사립으로 야구부는 전해 8회 대회에 처녀 출전해 8강에 올랐다.

휘문에선 전날 완투한 김종세가 다시 마운드에 올랐고, 1루수 김종윤, 2루수 심운영, 3루수 왕명구, 유격수 정인규, 좌익수 이경구, 우익수 이순재도 역시 선발로 출장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전날 3번 타자 포수로 선발 출장해 2타수 2안타를 친 김정식이 벤치를 지켜야 했다. 김정식은 다롄상업전에서 부상을 당했다. 이 경기 박스스코어에는 포수에서 중견수로 포지션을 옮겼고, 결국 경기 도중 중견수 김광수와 교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중견수에서 포수로 긴급 투입됐던 유재춘이 포수 마스크를 썼고 교체 멤버였던 김광수가 선발 중견수로 투입됐다.

휘문은 7회까지 4-4로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8회초 수비에서 김종세는 릿츠메이칸 타자 세 명을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하지만 9회 석 점을 내줬고, 결국 5-7로 패했다.

동아일보는 8월 20일자에서 릿츠메이칸과의 8강전 패배 소식을 전하며('휘문군실패 제이회전에서') “선수 중에 다친 사람이 많고 포수 김정식군은 중상(重傷)하였으므로 최후까지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함에 이르렀더라”고 보도했다. 경기 이틀 뒤에 보도가 된 이유는 19일이 신문이 발간되지 않는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한 <한국야구사>도 이 경기에 대해 “공수의 주축인 포수 김정식이 전날 경기에서 부상당하는 바람에 결장한 것이 치명적”이라고 같은 평가를 내린다.

 

가와니시 레이코의 <플레이볼>을 번역한 양두원 기자는 휘문의 강점을 김종세, 김정식의 배터리와 강한 센터 라인(포수, 2루수, 유격수, 중견수)으로 꼽았다. 김정식의 결장은 전력에 큰 타격이었다. 김정식은 이 대회 2년 뒤인 1925년 일본 프로야구의 전신 격인 다카라즈카협회에 입단해 활약했고, 귀국 뒤 평양철도와 경성부청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해방 뒤인 1946년에는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를 맡았다.

 

당시 휘문 야구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가와니시가 소개한 한 일본 신문의 기사 내용에는 날 일본 야구가 한국 야구를 보는 시각과 비슷한 점이 있다.

“미지수라고 한 휘문의 시합을 보면서 일단 거칠고, 주루, 투구, 수비가 모두 매우 투박하면서도 강한 모습이라고 느꼈다. 세세한 플레이에 구애받지 않고 당당하면서도 선굵은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미국 프로야구 선수단을 보는 듯하다.”(<플레이볼>, 83p)

오사카 아사히신문 조선판은 동아일보보다 하루 늦은 21일 "잘 싸웠다. 향후 더욱 발전하여 다음 대회에 다시 출전하게끔, 오늘의 분함과 눈물을 씻는 것을 갈망“이라고 휘문을 격려했다.

하지만 휘문에 ‘다음 대회’는 없었다. 이 신문은 이듬해 7월 20일자는 ”올해는 지난해 패자 휘문고보가 어떤 사정 때문에 출전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총독부 검열 탓인지 표현이 애매모호하다. 그 ‘어떤 사정’은 동맹휴학이었다.

휘문고보 학생들은 1923년 11월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동맹휴학은 해를 넘긴 1924년에도 이어졌다. 잡지 <개벽> 1924년 1월호는 맹휴의 이유를 설립자 민영휘의 경영에 대한 반발로 들었다. 지금으로 치면 사학 비리에 대한 반발이다.

“학교를 신성한 교육을 하는 사회의 공공기관으로 생각하지 않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무슨 농장이나 회사로 생각한다. 따라서 학교의 직원을 자기의 마름이나 문객과 같이 본다. …그는 재정은 물론 일반 사무까지도 간섭하고 심지어 교원의 임용과 해고도 마음대로 한다“.
한겨레21, '버르장머리 없는' 학생들의 추억 중

 

김기주 호남대 명예교수는 일제 강점기의 동맹휴학을 네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3.1운동 이후 5년인 1919-23년이다. 독립과 배일 사상이 기조였다. 3단계는 1925~1930년으로 이 시기에 3.1 운동 이후 최대 항일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학생 조직이 활발하게 결성됐으며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진영과 연계 아래 동맹 휴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휘문 학생들이 맹휴에 돌입한 1924년은 2단계(1924~25년)인 과도기로 분류된다.

1924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휘문의 맹휴는 학생 700여 명이 징계를 받고 40~50명이 검거, 단속됐다. 총독부가 맹휴를 단순한 학내 소요로 보지 않았다는 점은 명백하다. 총독부 경무국은 1929년 작성한 문건에서 “1921-28년 8년 동안 404건의 맹휴가 전역에서 발생.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이후 민족적 사상의 흐름이 다분히 깔려 있음은 분명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휘문 이후 고시엔 본선에 참가한 조선인 팀은 없었다. 조선 선수 일부가 포함된 팀은 1930년 대구상업, 1932년 평양중학, 1933년 선린상업, 1935년 신의주상업, 1936년 인천상업, 1940년 평양1중 등이 있지만 전원 조선인 선수로 이뤄진 팀은 1923년 휘문이 마지막이다.

휘문의 라이벌이던 배재는 1924년 고시엔 조선 예선에 참가한다. 하지만 경성중학과의 결승전에서 심판 판정이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경기 도중 기권을 선언했다. 실제 판정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조선인 선수들이 느꼈을 감정을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다. 1926년 예선전에는 조선인 팀은 단 하나도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시엔은 일제 시대 조선 야구가 명맥을 유지하는 데 기여를 했다. 1927년부터 조선인 학교들은 예선 참가를 재개했고 1931년에는 11개교로 두 자릿 수로 늘어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대회가 중단되기 전까지 평균 10개가 넘는 조선 팀이 예선전에 참가했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 문부성은 1932년 야구계 정화를 명분으로 야구통제령을 발표했다. 일본에 야구 전체를 총괄하는 기구가 없었던 만큼 문부성이 프로야구로 치면 ‘규약’을 만들었다. 야구통제령은 상업주의와 금전 거래, 폭력 문제 등으로 혼탁해진 당대 일본 아마추어 야구를 ‘정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식민지 조선이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같은해 9월 2학기부터 식민 본국의 야구통제령을 본뜬 ‘야구통제안’을 발표한다. 야구통제안과 그 기본인 야구통제령은 대회 개최 등 아마추어 야구 운영에 대한 기본 틀을 정부에서 만들고 체육 단체가 관련 사무를 맡는다는 게 기본 틀이다. ‘조선인들의 대회’는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고시엔 조선 예선은 일종의 ‘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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