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정문경은 누가 기증했을까?

  • 기자명 김현경
  • 기사승인 2022.01.05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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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도서관의 소식지인 《오늘의 도서관》 2021년 11월호에는 일본 메이지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했던 서기준(徐基俊, 1900~?)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서기준은 1923년에 메이지대학 정치경제과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전라북도의 관리로 근무하다가 이듬해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6년부터 모교인 메이지대학 도서관의 대출계 직원으로 근무를 시작하였고, 1933년에는 도서관 사서에 임명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근대 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조선인 사서는 극히 소수였고, 해외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는데, 서기준은 일본 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던 유일한 조선인 사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해방 이후 정치계에서 활동하였지만 6.25 때 납북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서기준을 검색해 보면 그 검색 결과 중에는 국보 다뉴세문경에 관한 여러 블로그 포스팅들이 보인다. 그 중 하나를 예로 들면 2013년에 작성된 모 블로그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확인된다.

국보 141호로 지정된 다뉴세문경의 정확한 출토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1960년대에 충남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에서 출토되어 서기준(徐基俊) 씨가 기증하였다고 한다. 한병삼(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에 따르면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군인들에 의해 발견된 뒤 중간 상인에게 유통되던 유물이라 한다.

‘국보 141호로 지정된 다뉴세문경’은 과거에 지정되었을 때의 명칭으로 지금은 ‘정문경(精文鏡)’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정문경은 잔무늬거울이라고도 한다. 덧붙이자면 ‘다뉴’란 거울을 매는 데 사용하는 고리인 ‘뉴’가 두 개 이상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거울은 현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1. 국보 정문경의 모습(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이미지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가져옴)
국보 정문경의 모습(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이미지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가져옴)

국보 정문경에는 출토지를 둘러싸고 약간 복잡한 사연이 숨어 있다. 이 유물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 당시에는 강원도에서 출토된 것으로 소개되었다. 1979년에 발간된 도록 『숭전대학교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숭전대학교는 숭실대학교의 전신)에 실린 ‘다뉴세문경’에는 그 출토지가 전(傳) 강원도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1988년 『숭실대학교 부설 한국기독교박물관』 도록에는 다뉴세문경(잔무늬청동거울)의 출토지가 ‘충남 지역 출토’로 바뀌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한국의 청동기문화> 도록(범우사, 1992)에서는 국보 141호 다뉴세문경과 국보 146호 청동방울 일괄이 함께 소개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본 일괄유물은 그동안 전(傳) 강원도 또는 전 원주 출토로 알려져 왔으나 충청남도 논산 훈련소 부근의 야산에서 발견된 것이며 그 당시 숭실대 소장 국보경(國寶鏡)도 함께 출토되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이들 전 논산 출토 동령류(銅鈴類)는 문양이 정교하고 앞뒤 양면의 시문(施文) 등 높은 수준의 제작 기술로 만들어진 것으로 동령류 중 가장 우수하다. 국보경은 문양이 3구(區)로 나누어진 3구식의 것으로 8개의 동심원문이 특징이다. 동경 중에서 가장 문양이 정치한 것으로 화순 대곡리 출토 동경과 가깝다. (국한문혼용 원문을 수정함)

국보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구 리움 소장, 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정문경은 논산 훈련소 부근의 야산에서 함께 출토되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출토지가 충청남도 논산으로 수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2008년, 제5회 매산기념강좌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연구> 자료집에 수록된 이건무의 「다뉴정문경에 대하여」에 좀더 자세한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숭실대 국보경은 최초에는 출토지가 전 강원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동경은 역시 전 강원도 출토로 전하던 국보 제146호인 리움박물관 소장 ‘강원도출토 청동방울 일괄’과 함께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한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고 한병삼 선생의 생전 전언에 의하면 이 청동기 일괄유물은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다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군인들이 중간상인에 팔아넘기면서 강원도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둔갑되었다고 한다. 이 유물을 구입해 팔아넘긴 중간상인이 후에 고 한 관장께 고백하였는데 거울은 숭실대학교에 넘겼고 나머지 청동방울 일괄은 수집가 고 김동현 씨에 팔았는데 이후 청동방울 일괄은 다시 호암(현 리움)박물관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중략) 중간상인의 말을 100%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20년 이상이 지나 고백한 것이고 유물 세트의 정황상 숭실대 국보경과 국보 제146호 청동방울들이 일괄유물일 가능성은 높다 하겠다. 후에 과학적 분석이 가능하다면 이에 대한 진부가 가려질 수 있겠다.

여기서 다시 블로그의 서술을 살펴보면, 정문경의 정확한 출토 경위는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다음 두 가지 정보를 제시하고 있다.

a. 1960년대 충남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에서 출토되어 서기준이 기증

b. 논산훈련소에서 발견되어 중간상인에게 유통됨(한병삼 증언)

이 중 b는 앞서 확인한 바와 동일한데, a의 경우 ‘논산’이라는 지명만 일치할 뿐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정보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서기준은 논산 출신이기는 하나, 6.25 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으므로 1960년대에 출토된 유물을 기증할 수 없다.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여러 블로그 포스팅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서기준 기증’ 글은 사실 위키백과 ‘정문경’ 항목의 문장을 그대로 복사하여 붙여넣기 한 것이다. 2021년 12월 31일 현재, 해당 항목에는 서기준 기증과 관련된 문장이 삭제되어 있는데, 항목의 편집 이력을 통해 이전 버전들의 변화를 되짚어 볼 수 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2009년 10월 21일 03:37 편집판

‘충남 논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이 거울’

2) 2009년 11월 24일 15:35 편집판

‘충남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 서기준(徐基俊,忠南論山) 기증으로 되어 있고 충남 논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이 거울’

3) 2009년 11월 25일 14:40 편집판

‘정확한 출토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1960년대에 충남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에서 출토되어 서기준(徐基俊) 씨가 기증하였다고 한다. 한병삼(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증언에 따르면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군인들에 의해 발견된 뒤 중간 상인에게 유통되던 유물이라 한다.’

2009년 10월 21일 시점에 충남 논산에서 출토되었다는 정보만 기록되어 있던 것이 11월 24일에는 충남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논산군은 1996년에 논산시로 승격)라는 지역 정보와 서기준이라는 기증자 정보가 추가되었고, 25일에는 블로그에 유포되어 있는 것과 같은 문장으로 다듬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2009년 11월에 해당 문장을 기입한 편집자에게 해당 정보의 근거에 대하여 문의하였으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혹시 1960년대에 거울을 기증한 서기준이 메이지대학 도서관 사서 서기준과 동명이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충남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와 ‘서기준’이라는 정보를 동일하게 포함하고 있는 자료는 이것 외에도 더 있다. 1977년에 간행된 도쿄국립박물관 『수장품 목록: 동양미술‧동양고고‧호류지 헌납 보물』에 따르면 동양고고 수장품 중에 ‘서기준’이 기증한 점판암제 석검(石劍), 즉 돌칼 한 점이 있고, 그 돌칼의 출토지는 바로 ‘충청남도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였다. 돌칼은 지금도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기증자 정보는 아직 소장품 종합검색 시스템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림 5. '수장품 목록: 동양미술‧동양고고‧호류지 헌납 보물' 220쪽의 돌칼 정보. ‘충청남도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 ‘서기준 기증’이라는 기재가 보인다.
'수장품 목록: 동양미술‧동양고고‧호류지 헌납 보물' 220쪽의 돌칼 정보. ‘충청남도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 ‘서기준 기증’이라는 기재가 보인다.

도쿄국립박물관 자료관에 소장된 박물관 역사 자료인 『다이쇼(大正) 14년(1925) 열품록(列品錄)』을 살펴보면, 서기준 기증 돌칼은 1925년 10월 28일, 도쿄제실박물관(지금의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그리고 돌칼을 기증한 서기준은 바로 메이지대학 도서관 사서 서기준과 동일인물이며, 기증자의 주소도 일본 도쿄로 되어 있어 1924년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서기준의 행적과 일치한다. 또한 서기준의 아버지 서일훈을 비롯한 집안사람들의 묘소가 있는 곳도 성동면 원남리였다. 역시 동명이인이라고 보기에는 일치하는 점이 많다.

그림 6. '부여서씨대동보'에 수록된 서일훈 기사. 서일훈은 서기준의 아버지이며 그의 묘는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 소죽동’에 있다고 되어 있다.
'부여서씨대동보'에 수록된 서일훈 기사. 서일훈은 서기준의 아버지이며 그의 묘는 ‘논산군 성동면 원남리 소죽동’에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하면, 1925년에 기증된 돌칼과 관련된 출토지와 기증자 정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같은 논산에서 발견된 정문경의 기증 정보로 바뀌어 위키백과에 올라왔고, 그 정보가 여러 블로그들을 거쳐 유포된 것이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어째서 서기준이 정문경의 기증자로 둔갑하게 되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결론을 말하자면, 현재로서는 정문경이 1960년대에 논산훈련소에서 발견되어 중개업자의 손을 거쳐 유통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50년에 납북된 서기준이 정문경의 입수 및 기증에 관여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으며, 서기준이 일본 도쿄제실박물관에 기증을 했던 일이 어떠한 착오로 인해 정문경의 입수 과정과 뒤섞이게 된 듯하다. 여전히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은 만큼 추가 정보가 나와서 의문을 해소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림 7. 매일신보 1925년 8월 21일자 기사에 실린 서기준의 사진
매일신보 1925년 8월 21일자 기사에 실린 서기준의 사진

※서기준은 도쿄국립박물관의 수많은 기증자들 중에서 해방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유일한 한국인 기증자라는 점에서도 눈길이 가는 인물이다. 그의 기증품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문에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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