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유산 '적산가옥' 보존할 준비 되어 있나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9.01.2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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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18년, 세종이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봉수대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경은 친히 가서 두루 관찰하고 그 가부를 생각한 후에 기지를 정하여 축조하도록 하라.” 압록강 중류의 4군을 개척한 후 노심초사하던 시절인지라 세종의 당부는 지엄하면서도 절절했다. 세종의 말은 이어진다. “대저 처음에는 근면하다가도 종말에 태만해지는 것의 사람의 상정이며, 더욱이 우리 동인 (東人- 조선 사람)의 고질이다. 그러므로, 속담에 말하기를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 고 하지만, 이 말이 정녕 헛된 말은 아니다.” 즉 세종은 ‘처음에는 근면하다가도 종말에 태만해지는 것’이 요즘 말로 조선인의 ‘종특’이라고 말한 것이다.

고려ㆍ조선 이어 현재까지 사흘이면 뒤집히는 국가정책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은 혼란기의 고려 시대, 고려의 행정 명령이 사흘도 못가 바뀐다는 뜻으로 중국인들이 비아냥댔다는 얘기에서 비롯된다. ‘작심삼일’(作心三日)과 비슷한 용례로 쓰이지만 ‘고려공사삼일’에는 단순한 의지 박약의 의미 이상의 한탄이 숨어 있다. 조선 선조 34년, 백관의 옷 색깔 문제를 두고 왈가왈부 논의가 일어났을 때 우의정 윤승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나라 풍속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만 또 오래 견디지 못한다. 새로운 규정을 창설할 때는 모든 사람이 다 좋다고 하여 시행하다가 행한 지 오래지 않아서는 다시 구제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생겨 의논이 분분하여 반드시 옛 제도로 돌아가고야 마는데 이것이 이른바 ‘고려(高麗)의 법은 삼일법(三日法)이라는 말이다’.

“처음에는 열심이다가 나중에 흐지부지되는” 일에 더하여 “원칙과 일관성의 부재”가 문제라는 뜻이다. 새로운 풍속에 혹해서 와와 몰려가고 ‘모든 사람’이 다 좋다고 하여 어영부영 시행해 놓고는 ‘이 길이 아닌갑다’ 하면 또 다시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일은 조선 시대에도 꽤 많았던 모양이다.

중종 때 황효헌이라는 신하가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더욱 그렇다. “속담에 ‘조선의 법은 사흘뿐이다.’ 하는 것은 자주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한 사람이 법을 세운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사람이 고치어 자주 변경하므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 큰일이라면 조종(祖宗)께서 법을 세우신 뜻을 따라야 하는데 지금은 하는 일에 폐단이 있다고 생각하면 다시 다른 법을 세우고 얼마 안 되어 도로 무너뜨리므로 백성이 믿지 않습니다.” (조남호, 새국어소식 9월호)

‘고려공사삼일’은 ‘조선공사삼일’로 바뀌어 불리기도 했고 이 두 표현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실록에 뻔질나게 등장한다. 서애 류성룡은 이 조선공사삼일이 빚은 모순을 실제로 겪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 즉 전쟁 총책임자를 맡고 있던 그는 각지에 공문을 보냈는데 공문 내용에 잘못이 있음을 깨닫고 공문을 회수하는 파발을 다시 띄우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역리(驛吏)가 아직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며 원래 공문을 들이밀었다. 유성룡은 격노하여 네 이놈! 네가 이리도 게으르다니! 부르짖는데 역리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사흘쯤 되면 다시 공문이 고쳐질 것이라 보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인지 초야에 묻힌 현인인지 알 수 없는 이 역리의 말에 류성룡은 깊이 깨우쳤다고 한다.

한 집단이든 사회든 나라든 최소한의 원칙에 근거한 일관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수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이를 게으르게 만들고, 사람에 따라 원칙이 흔들리니 사람에 따라 원칙이 세워지게 마련이며, 어차피 바뀔 원칙이니 그저 배 깔고 누워 기다리자는 이들이 득세할 수 밖에 없다.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란 바로 이 ‘고려공사삼일’ ‘조선공사삼일’의 희생양이자 류성룡을 깨우친 게으른 역리의 현신이 아닐까.

연합뉴스TV 화면 캡처.

일제 잔재라며 문화든 역사든 다 없애자는 사람들

최근 손혜원 의원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했다. 그런데 논쟁의 핵심이라 할 목포 구도심의 등록문화재는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적산 가옥들이었다. 즉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과 식민통치의 흔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정도의 역사를 지닌 거리는 마땅히 유지되고 보호되어 원형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개발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손혜원 의원을 지지한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 바람이 계속 추진력을 가지려면 ‘원칙’이 필요하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이렇듯 ‘쿨하게’, 일제 잔재(?)를 소중한 문화재로 받아들일 태세가 돼 있는가.

좀 멀리 올라가면 1996년 우리는 조선 총독부 건물이자 수십년 동안 중앙청으로 중앙박물관으로 썼던 ‘동양 최대의 석조건물’을 부숴 버렸다. 이 일에 대해서까지 구태여 잘했네 못했네를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일제 적산 가옥들이 이리도 소중한(?) 문화재가 되는 오늘에 현기증을 느낄 만큼 그에 역행하는 현실들이 최근까지도 비일비재함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일제 잔재 철거’라는 이름의 정의로운(?) 작업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돼 왔던가. 2015년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 별관이 ‘덕수궁 정기를 끊은 건물’의 혐의를 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경기도 안양의 서이면사무소는 등록문화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잔재’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울산 왜성 이야기를 해 보자, ‘부끄러운 역사’ 낙인을 벗어나 보존해야 할 역사로 인정받았으나 2017년 관광지 조성 와중에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동상 논란이 터졌다. 당시 전투를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조선군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장수 양호는 기마상을, 울산성 전투 당시 굶어 죽을 지경까지 갔던 가등청정은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만들려 했는데 그 모든 의도는 “왜놈의 동상이라니!” 하는 말 한 마디에 10미터 깊이로 파묻혀 버렸다. 중국 항저우 시의 악왕묘에는 송나라 시대 명장 악비를 죽인 간신 진회 부부가 꿇어앉은 ‘동상’이 있는데 이를 두고 누군가 ‘악비묘에 진회 동상이라니!’를 부르짖다면 그 얼마나 황망한가. 결국 가등청정 동상(?)은 없던 일이 됐다.

2018년 8월 전국공무원노조는 재미있는(?) 요구를 내걸었다. “해방 직후 일제 잔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이며..... 일제강점기에 임명된 관리들은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징병, 강제 공출 등 수탈의 첨병 역할을 맡은 행정 책임자들”이라고 비판하면서 “1910년 8월29일부터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15일까지 35년 동안 일본군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기관장 사진이나 명패가 게시된 지자체에 대한 철거작업”을 요구했다. 그 역사는 우리의 역사가 아니고 간직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양념으로 하나 더하자. 모 국회의원의 아들이 일본 여행을 갔다가 'I ♥ JAPAN' 티셔츠를 사왔는데 그 사진을 찍어 올린 국회의원은 ‘쪽바리’에 뭐에 아주 생난리를 치러야 했다.

부산 수정동의 적산가옥 '문화공감 수정'은 잘 보존된 일본식 고급주택으로 유명하다. 출처:문화재청

일제가 남긴 적산가옥 정말 보존할 준비가 되어 있나

이런 분위기에서 적산 가옥들이 ‘마땅히 보존돼야 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별안간 등극해 버리니 그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서 아연해지는 건 사실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개인적으로는 일제 뿐 아니라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든 중국인들의 흔적이든 이 땅에서 100년 가까이 터를 잡았다면 보존해야 할 우리 문화유산이라고 여긴다. 당연히 나라의 시책도 그렇게 가야 하며 문화재 정책도 일제의 잔재니 부끄러운 역사니 가릴 것 없이 오래된 것은 보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기조가 유지될 만큼 우리는 냉철한가 하는 질문에 이르면 그닥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단지 바라는 바는 일제 강점기 또한 우리의 역사의 일부임을, 지워버릴 수도 없고 단절되지도 않는 우리 역사임을 깨닫고, 해방 74년 뒤에 일제청산 비장하게 부르는 것보다는 그 아픔과 부끄러움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 조상들은 왜 그런 꼴을 당했고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차분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일본의 과거사 반성이 미진함을 비판하는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이 확립되었으면 좋겠다. 일본에 대한 때늦은 적개심보다는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존재이며, 일제 강점기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 객관적인 조망이 있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국공사삼일’의 부끄러운 이름을 상속받을 수 밖에 없다. “대저 처음에는 근면하다가도 종말에 태만해지며”, “모든 사람이 다 좋다고 하여 시행하다가 반드시 옛 제도로 돌아가고야 마는”, “ 한 사람이 법을 세운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사람이 고치어 자주 변경하므로 따라갈 수 없는” 이 민망한 자기반성을 우리가 되풀이하게 된다면, 이야말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속설 (신채호가 한 말이 아니다!!)을 곱씹을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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