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 기자명 김재인
  • 기사승인 2019.02.07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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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명절이 왔고, 저번 명절을 강타했던 김영민 박사의 유명한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심지어 '명절·술모임은 권력 확인하는 자리…고단한 어른들, 예술과 디저트를 음미하라'라는 인터뷰 기사까지 지면을 장식하며, 저 칼럼을 소환했다. 김영민 박사는 특유의 예시, 도약, 해학을 통해 읽는 이를 뜨끔하게 하는 솜씨로 많은 독자를 매혹시켰고, 그 정점에 있는 글이 '추석' 칼럼이다. 그 한 대목을 옮겨 보겠다.

따라서 “그런 질문은 집어치워 주시죠”라는 시선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중에서

 

김영민 칼럼에서 빛을 발한 글들은 이른바 '정체성' 또는 '본질'을 묻고 있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위력이란 무엇인가', '추석이란 무엇인가' 등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글들. 나아가 칼럼 안에도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집요하게 등장한다. "사람들은 평상시 그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별 관심이 없"고 "정체성을 따지는 질문은 대개 위기 상황에서나 제기되기 때문"에, 현 상황의 위기성을 지적하기 위해 그런 형식의 물음을 묻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민 교수가 경향신문에 게재한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칼럼.

 

이런 물음의 시조는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주로 '셀럽'들을 붙잡고 '~란 무엇인가'라고 집요하게 물었다.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미란 무엇인가?', '덕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참이란 무엇인가?' 등 소크라테스의 물음들은 아직까지도 답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플라톤의 기록으로 남은 소크라테스의 물음들을 철학의 '문제집'이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정의(定義)'를 내리라는 요구로 향한다. 정의는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많은 이들을 당혹케 하고 화나게 했다. 하지만 그 까닭은 소크라테스가 '정체성 물음' 또는 '본질 물음'을 던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답변을 시도하는 모든 이들을 함정에 빠트리는 물음이었다. 이 점이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까지 이끌었다는 학자들의 해석도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란 "한 사물의 여러 속성들을 그들의 본질을 통하여 기술(記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물의 속성들을 다 나열하고 그것의 통일성까지 확보해야 정의가 완성될 수 있다. 가령 '미란 무엇인가?'에 답하기 위해 '미'를 정의할 때, 미의 모든 속성을 다 나열하면서 통일성을 확보해야 하지만, 이는 경험적으로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 미의 속성일 수 있는 어떤 것이 발견되면 기존의 정의는 실패한 것으로 확인될 터인데, 시공간의 제약 때문에 새로운 속성은 언제든 등장 가능하기 마련이다. 과학철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귀납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은 파괴적 성격을 갖는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소크라테스의 반대 논증에 부딪친다. 반대 논증은 개체의 속성에서 보편 개념에로의 참여라는 개념의 이행의 어려움을 논의의 파괴에 역이용하는 데 있다. (중략) 소크라테스는 결국 무지의 자의식에 빠지고 마는데 그것은 파괴적 측면의 방법의 가장 큰 의미며 소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귀에로 도망간다. 왜냐하면 경험적 소여의 속성들은 그들 사이의 차이성 때문에 유개념을 형성할 정도로 통일되지 않는다."(김완수, '소크라테스의 방법론' 중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이 지점에서 김영민 박사의 물음을 돌아보자. 칼럼의 '정체성 물음'들은 필연적으로 파괴적 성격을 가지며, 독자는 그로부터 쾌감을 느낀다. '본질 물음'들은 여태까지 독자를 속박하던 것들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따라서 일단 '~란 무엇인가'라고 발설하기 시작하면 기존 질서는 흔들리고 속박에서 해방될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김영민 박사의 매력 포인트는 여기까지.

니체와 들뢰즈는 '~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는 누구인가?'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가령 '~란 무엇인가'에서 멈추지 말고 ~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자는 누구인가?'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 물음' 배후에는 '권력 물음'이 있다. 거기까지 가지 않으면 물음은 유희로 끝나고 만다. '추석' 칼럼을 둘러싼 약간의 소란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가족과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조카된 자, 자식된 자는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는 존재일까? 물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발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현대철학, 그 중에서도 프랑스 현대철학이 우리에게 알려준 중요한 성취의 하나는 (represent라는 말로 표현되곤 하는) '대표' 또는 '대변'은 정치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는 데 있다. 근대 대의민주주의 이론은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대표자를 통한 통치를 지지했다. 허나 대표자는 흔히 배신하기 마련이며, 궁극적으로는 주권자 자신이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근대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철학은 '당사자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하기'라는 실천 강령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누군가를 대변한다는 것은 바로 그 누군가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점을 폭로한다. 당사자 스스로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떠해야 하는가를 물어야지 당사자를 대신해 말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당사자가 말하려면 당사자에게 권력이 있어야 하고, 아무리 약자일지라도 직접 말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권력은 힘들의 관계를 만든다고 니체는 말했다. 당사자가 힘의 일부로서 등장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은 힘의 주장이며, 경합하는 힘들은 권력관계에 따라 조정되고 질서를 만든다. 니체는 그렇게 만들어진 일시적인 질서를 어떤 사물이나 사태의 '본질'이라고 부른다. '지배적인 힘'이 곧 '본질'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이런 주장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이다. 2014년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된 '지록위마'는, 사마천의 <사기> 중 '진시황본기'에서 악당 조고가 황제에게 사슴을 말이라고 함으써서 윗사람을 속이고 진실과 거짓을 제멋대로 조작했다는 데서 유래했다(아래 지록위마의 유래 참고). 최순실 국정농단이 밝혀진 것이 2016년이니, 선견지명이 담긴 고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국민을 농단한 것을 빗대기엔 적절치 않다. 박근혜가 조고도 아니고 국민이 황제도 아니니 말이다. 아무튼 조고는 사슴을 말로 바꾸어 부르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조고의 권력은 저 상황의 본질을 구성했다.

지록위마의 유래: 지록위마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일컫는 걸 뜻한다. 진(秦)나라 시황제를 섬기던 환관에 조고(趙高)란 악당이 있었다. 조고는 시황제가 죽자 유조(遺詔)를 위조해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린 데다가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내세워 황제로 옹립했다. 그래야만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호해를 온갖 환락 속에 빠뜨려 정신을 못 차리게 한 다음 교묘한 술책으로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원로 중신들을 처치하고 자기가 승상이 돼 조정을 완전히 한 손에 틀어쥐었다. 조고는 입을 다물고 있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기 위해 술책을 썼다. 어느 날 사슴 한 마리를 어전에 끌어다 놓고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황제 호해는 “어찌 사슴을 말이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조고가 짐짓 사슴을 말이라 우기자 호해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저게 뭐 같소? 말이오, 아니면 사슴이오?”라고 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신들은 조고가 두려워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나마 의지가 남아 있는 사람만이 ‘사슴입니다’라고 말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답한 사람을 똑똑히 기억해 뒀다가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러고 나니 누구도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없게 됐다고 한다. 또한 황제 호해는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면서 정사에서 손을 뗐다고 전해진다.
(출처 : 『史記』, 『고사성어 따라잡기』((주)신원문화사, 2002.5))
교수신문 캡처

자, 이제 다시 묻자. 가족과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자식이나 조카에게 자기 발언할 수 있는 권력이 얼마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실업자인 조카는 당숙의 '위력'에 굴종한 결과로 얻을 수 있었을 적으나마 용돈은커녕 '버릇없다'는 욕만 바가지로 먹었을 테고, 묵묵함을 대가로 그나마 숙식이라도 해결할 수 있던 엄마의 집에서 쫓겨나는 위험 상황에 처해졌을 테다. 김영민 박사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것이 수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지만, 저 자식이자 조카인 당사자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수치의 순간임을 알고 있었으리라. 위력에 저항하면 "얼마 안 되어 대학원을 그만두었고, 지금은 남쪽 지방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게 되리라는 건 너무나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용은 칼럼 '위력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사람은 힘이 있게 되었을 때에야 수치를 수치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건 힘이 없어서이다. 당숙이, 엄마가, 아버지가 제멋대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것 역시 힘이 있어서이다. 따라서 관건은 자기 물음을 던지라는 조언도 아니고, 힘을 내라는 격려도 아니다. 아마도 제3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적더라도 온힘을 낼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일이리라. 그렇게 되면 당사자는 실제로 힘을 낼 수 있으리라.

웃자고 적은 글에 너무 진지한 것 아니냐고? 웃자고 던진 말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명절의 본질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저 웃을 수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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