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국정부 불신, 이명박 정권에서 시작됐다

냉온탕 오간 이명박 정권의 대일 정책이 불신 시초
2010년대 한일관계 전반적 재점검 필요한 시점

  • 기사입력 2022.09.29 14:03
  • 기자명 윤재언

뉴욕 한일정상 간 ‘만남’은 ‘문재인 정권으로 비롯된 한일관계 악화를 바로잡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실 인사들의 인식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과 통일교의 유착 문제로 어려움에 빠진 기시다 정권은 ‘굳이 지금 한국 정상과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한국 쪽에서 정치적 이익을 가져다 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이미 인지했기에 만나더라도 조용히 만나기를 원했으리라 생각된다.

대통령실의 서투른 혹은 섣부른 회담 성사 발표는 일본 정부에 좋은 구실을 줬다. 정치와 외교에 잔뼈가 굵은 기시다가, 한국 대통령실의 조바심을 간파하고 언론에 “분노했다”는 반응을 전했다고 생각된다. 이에 놀란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으나, 결론적으로 안 하느니느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이번 글에서는 윤석열 정권의 대일인식, 즉 ‘문재인 정권이 한일관계를 파탄시켰고 우리들이 회복시켜야 한다’는 ‘사명’에 가까운 생각이 일본에 유효하게 전해지고 있는지 점검해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일본 정부가 가진 ‘한국 불신’의 시발점 혹은 근원은 이명박 정권 말기 갑작스러운 대일 강경 드라이브에 있다는 게 이 글의 주안점이다. 이에 대한 반성적 검토 없이 국내 정치, 즉 문재인 정권에 모든 원인이 있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 글의 또다른 전제는 문재인 정권의 대일 정책이 옳았다는 게 아니다. 문재인 정권의 대일 정책은 섬세하지 않았고 외교에 ‘상대방’(특히 상대국 여론)이 있다는 인식이 결여돼 있었다. ‘우리가 피해자인데 감히’라는 윤리적 인식과 정당성만으로는 현시점에서 일본의 사죄나 반성을 끌어내기 어렵다. 결국은 한국이 어디까지 포기하고, 무엇을 얻어낼지에 대한 구체적 전략 없이 대일 관계에 임하면 상황은 나아지지 않으리라고 본다.

 

일본 전략에 말려든 섣부른 한일정상회담 발표

한일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해, 한국 측의 성사 발표(9월 15일, 일본이 ‘흔쾌히’ 응했다고 발표)가 있고 일본 측 반응이 전해진 건 9월 21일자 아사히신문 기사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정부 관계자’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한국 측 강제징용문제 구체적 해결책 제시가 없었다는 소식에 기시다가 “그런 식이면 반대로 아예 안 만날 것(それなら逆に会わねえぞ)”이라고 한국 측 일방적 발표에 ‘강한 불쾌감’을 표했다고 한다. 본인은 아쉬울 것 없으니 만나고 싶으면 그쪽에서 성의를 보이라는 식으로 압박을 한 셈이다. 

일본 정부는 외교 정책을 추진할 때 총리나 책임자가 직접 발언을 해 정치외교적 부담을 높이기보다, 유연성을 갖기 위해 익명 관계자가 언론에 흘리는 방법을 자주 사용해 왔다. 경우에 따라 차후 “실제 해당 발언은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시다가 이를 활용해 허점을 노출한 윤석열 정부에 빚을 지게 한 셈이다. ‘젠틀맨’ 기시다가 실제로 화났는지보다, 섣부른 발표가 일본 전략에 말려 드는 계기가 됐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을 유리하게 하면서 만나는 데만 의의가 있는 자리를 갖게 됐다. 오로지 ‘한국은 진보에서 보수로 질적으로 달라졌으니 우리가 진심을 보이면 일본은 알아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실패로 나타났다고 하겠다.

 

과연 문재인 정권에만 관계 악화 책임이 있을까

여기서 드는 의문은 ‘그러면 문재인 정권의 대일 정책만으로 일본이 신뢰를 잃었다는 게 사실일까’라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에 신뢰 상실 단초를 제공한 건, 적잖은 현정부 정책 담당자들이 외교를 책임졌던 이명박 정권 때라고 본다. 이명박 정권 말기 대일 정책이 강경일변도로 흐르면서 “한국이 일본을 국내 정치에 이용한다”는 일본 정치인과 여론의 인식이 강화됐다. 

이처럼 경색된 한일관계는 박근혜 정권까지 이어진다. 2015년 11월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무려 3년 6개월 만에 한일정상회담을 열었다. 아베가 2012년말, 박근혜가 2013년초 취임했으니, 아베의 두 번째 임기로서는 첫 양국정상회담이었다. 박근혜 취임 전부터 이미 한일관계는 악화된 상황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경색의 배경에는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연이은 대일 강경행보가 있었다. 집권 초기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에 유화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출생지가 일본 오사카이기도 했고, 2008년 4월, 일본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 국민과의 대화’에도 임했다(아래 사진, 전임 노무현 정권때도 동일한 프로그램이 방송된 바 있다). 여기서 이명박 대통령은 “과거에 묶여서 미래를 못나가면 안되니까 미래를 향해서 나갈 수 밖에 없다, 또 나가야 한다라는 그런 긍정적인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라고, 이른바 ‘미래지향적 발언’을 한다. 

일본 국민과의 대화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명박 전 대통령(MBC 뉴스화면 캡처)
일본 국민과의 대화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명박 전 대통령(MBC 뉴스화면 캡처)

그 뒤 정책 추진 과정과 측근 의혹 등으로 이명박 정권이 국내 정치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국가의 무책임한 대일 외교로 행복추구권을 침해받았다며 낸 헌법소원심판에서 ‘위헌확인’결정을 내린다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위헌이라는 취지였다. 해당 결정에 대해 사회적으로는 이명박 정권의 대일 정책에 대한 반발이 높아져 갔다. 이에 이명박 정권은 헌재 결정을 계기로 국내 정치적 기회를 노리는 차원에서 완전히 대일 강경 자세로 돌아선다. 그 첫 모습이 확인된 게 한일정상회담이었다.

2011년 12월 교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총리(민주당)의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명박 대통령은 회담 의제를 ‘위안부 문제 해결’로 잡고, 1시간 내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여기에 “미래지향적 관계를 위해서는 우선 위안부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는 과거와는 다른 취지의 발언을 이어갔다. 일본 측에서는 경제 협력이나 역사 교과서 공동 연구 등을 제안했으나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한일정상회담은 이듬해 5월을 마지막으로 한국 측이 위안부와 역사 문제 등으로 강경 자세를 이어가며 오랜 기간 열리지 않았다. 지금과는 반대의 상황이었던 셈이다.

2012년 초에는 독도 문제를 두고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조금 기다려달라”고 했다는 발언이 위키리크스 폭로 자료를 통해 사실로 확인되는 일도 있었다. 이 역시 일본 문제의 국내정치 활용이라는 차원에서 역공을 펴는 단초가 된다.

 

초기 대일본 유화책, 말기 강경일변도로 선회한 이명박 정권 

이명박 정권의 대일 강경 방침이 명확하게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2012년 8월에 들어서다. 이명박 대통령은 두 가지 행동과 발언으로 일본을 더욱 놀라게 한다. 하나는 독도 방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 천황에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사죄를 촉구한 일이다. 굳이 독도를 분쟁지로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대통령이 방문하지 않았던 관행을 깨고, 이명박 대통령은 같은 달 독도를 시찰한다(아래 사진). 그리고 다소 뜬금없이 일본 천황에게 사죄를 요구했다. 대통령이 일본 천황에게 직접적으로 위안부 문제 사죄를 요구한 것은 처음이었다. 국가 상징인 천황에 대한 갑작스러운 사죄 요구에 일본 정치권과 여론은 더욱 부정적이 돼 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전하는 경향신문 1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전하는 경향신문 1면

 

이후 경색된 관계는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다가, 2015년말 특별한 분위기 전환에 대한 시도 없이 이른바 위안부 합의가 이뤄진다.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에 대한 설명이나 사전 논의가 결여돼 있었기에 국내 정치적 부담이 컸음에도 박근혜 정권은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문재인 정권에서 되돌리기 시도의 단초가 된다. 

다만 일본 측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총리였던 아베로서는 최대한 양보를 한 내용이었고,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외무상 기시다에게도 정치적 위험을 안고서라도 한일관계 개선의지를 보인 결과물이었다. 치밀하지 못한 이명박 정권의 대일 정책에서 출발해, 박근혜 정권의 뜬금없는 위안부 합의, 문재인 정권의 뒤집기 시도가 이어지면서 일본은 한국 정책추진 과정에 대한 불신을 높여간다. 온전히 문재인 정권의 책임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2012년 8월 상황으로 돌아가보면, 당시 일본은 센카쿠 열도 영토 분쟁으로 중국과 극한 대립에 있었다. 여기에 한국이 가세하면서 위기감은 커졌다. 전 조선일보 주필 송희영의 저서 『진짜 보수, 가짜 보수』(2020년)에는 해당 과정을 정리한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그대로 옮겨본다. 

그래도 교토 회담은 그럭저럭 넘어갔다. 하지만 2012년 여름 이후에는 일본의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곧이어 일본이 중국과 센가쿠(다오위다오) 열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이명박의 언행은 중국의 반일 데모와 겹치고 있었다. 중국과 한패를 지어 일본을 공격한다는 인상을 일본에 주고 있었다. 이명박은 취임 초에는 일본과 매우 좋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돌출 행동이 나왔던 만큼 일본의 충격은 배신감으로 번지고 있었다.

박근혜 정권은 위안부 문제를 내세워 일본과 정상회담을 하지 않고 3년을 버텼다. 그러더니 2015년 말 돌연 10억엔을 받고 위안부 협상을 마무리했다. 뜬금없는 화해였다. 위안부 당사자나 관련 단체들과 사전 협의를 갖지 않은 채 정치적 타결을 지어버린 것이다.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위안부 문제가 있어도 정상회담은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고 권고했었다. 이에 박근혜는 큰 거래를 성사시킬 듯 회담을 거부하며 고집을 부렸다. (이하 생략)


이 같은 상황에 대한 반성적 성찰 없이, 국내 정치적 이념에 사로잡혀 ‘직전 정부에 모든 책임이 있고 보수 정권은 일본과 잘 지내려고 한다’고 주장해도 바로 의심을 풀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기시다 현 총리는 제2차 아베 정권 출범초기부터 이명박 정권 말년과 박근혜 정권을 외무상으로 온전히 지켜본 장본인이다. 당시의 한일관계 악화 전후 상황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보수는 괜찮고 모두 진보인 전정부가 나빠서 이렇게 됐다”라고 한들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이라도 당시 과정을 성찰해 전반적 대일 정책을 재점검할 수 있는 새 인물이 필요해 보인다.

윤재언   sharply2u@gmail.com    최근글보기
일본 히토츠바시대 강사, 전 신문기자. 연세대에서 사회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뒤 2010년 매일경제신문 입사. 예전부터 갖고 있던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자일을 뒤로 한 채 2015년 훌쩍 바다를 건넘. 2021년 히토츠바시대에서 박사 학위 취득 뒤 연구자의 길에 접어듦. 전공은 국제관계(국제정치경제)지만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정치 / 경제 / 사회(특히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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