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1등급 훈장 추서' 왜 문제인가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9.02.27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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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때 이상한 괴담이 돌았다. ‘유관순 괴담’이었다. 그 얼굴을 반을 가리면 남자 반을 가리면 여자로 보인다는 괴담에서부터 꼬리가 몇 달린 여우였다는 둥, 사진의 반을 가리고 보다가 별안간 초상화 속 인물이 눈을 크게 뜨면 죽는다는 둥의 학교괴담. 그런데 그녀를 남자로 보이게(?) 만드는 사진에는 사실 슬픈 사연이 서려 있다. 그 사진은 감옥에서 찍은 것이었다. 여자라고 해서 사정 돌보지 않은 일본 경찰이 무자비하게 폭행해 퉁퉁 부어오른 얼굴의 사진이었다. 그러니 반을 가리면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보일 만큼 그 인상이 험악했던 것이다.

유관순 열사

필자는 지난 2000년 3․1절을 앞두고 유관순의 동기생이자 룸메이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1902년생이 100세를 맞기 전이었으니 당시 나이 아흔 여덟의 할머니셨다. 이미 치매가 와서 아침밥을 먹었는지도 분간하지 못하셨지만 90년 전의 ‘관순이’는 명확하게 기억 밖으로 꺼내놓으셨다. “관순이는 불쌍한 사람 보면 지나치지를 못했어. 뭐라도 쥐어 주거나 덮어 줬지. 우스갯소리도 잘하고 얼마나 명랑했다고. 화가 나면 충청도 사람답잖게 말도 따다다다 쏴 대기도 했고.” 유머 감각도 탁월했던 사람 같다. 명태 반찬을 좋아했는데 식사 기도 시간에 이래저래 기도한 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대신 “사랑하는 명태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고 능청스레 읊어 좌중을 웃기고 근엄한 선교사들을 발끈하게 만들었다고도 하니까.

동시에 유관순은 정의감 넘치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아는 청년 학도였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파고다 공원에서 감격 속에 읽혀진 이후 전국을 휩쓴 만세 시위에 그녀는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이화학당을 책임지고 있던 교장 프라이가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드러눕자 차마 그 위를 지나가지는 못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친구들 몇과 함께 담을 넘어 독립 만세를 부르던 열혈 소녀였다. 만세 시위에 질려버린 일본인들은 각급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는 일본인들의 실수였다. ‘독립만세 바이러스’를 조선 각지에 뿌려 놓은 셈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크게 실망한다. 서울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동포가 만세 부르고 죽어가고 있는데 서울에서 코 닿을 정도로 멀지 않은 천안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니. 부아가 치민 열혈 소녀 유관순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친척들을 끌어들이고 고향의 교회와 유림들, 그리고 인근의 진천, 청주 등 다른 도시까지 찾아다니며 만세 시위를 준비한다.

아마 가장 극적인 순간은 1919년 음력 3월 1일 양력으로는 4월 1일 전날 밤일 것이다. 캄캄한 밤 나이 열일곱의 소녀는 오늘날 독립기념관을 품에 안고 있는 매봉산 정상에 올라 봉홧불을 들어 올린다. 이를 신호로 목천, 천안, 안성, 진천, 연기, 청주 등 여섯 고을 스물 네 곳의 산봉우리에 봉화가 올랐다. 그때 소녀의 가슴은 터져 나갔을 것이다. 조선은 살 수 있다. 대한은 이렇게 불타오를 수 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검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껑충껑충 뛰었을지도 모르겠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저 산에도 그 산 넘어 또 산에도 나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 정경을 상상해 보자. 캄캄한 밤 산꼭대기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만세를 부르며 울먹이는 한 소녀의 하얀 저고리 검은 치마를.

그리고 다음 날 음력 3월 1일, 양력 4월 1일 수천 명이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에 나선다. 이미 한 달 전부터 만세시위로 골머리를 앓아 온 일본 경찰은 글자 그대로의 살인적인 진압에 돌입했다. 유관순의 만세 시위를 고무하고 도와주었던 김응구는 일본도에 맞아죽고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일본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는다. 유관순은 체포돼 옥에 갇힌 지 1년이 지난 1920년 열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또 만세 시위 1주년인 3월 1일을 맞아 옥중에서 만세 부르다가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끝에 참혹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유관순 수형기록표

몇 년 전 국정교과서 홍보작업을 하던 교육부가 지상파 방송사에 내보낸 홍보물 가운데 이 유관순이 등장했었다. 어느 여고생이 등장해설랑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즉 ‘편향된 교과서’에 유관순이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나가는 길을 아무데서나 막고 물어도 유관순의 이름을 모르는 청소년은 열에 하나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부르며 숨이 진” 유관순 ‘누나’‘언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독립운동가의 아이콘이었고 상징이었고 대명사였다. 어찌 그를 모르는 사람이 그리 흔하랴.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유관순을 내세우는 모습은 또 다른 측면에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유관순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안중근이나 윤봉길 등 대표적인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배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해방 전까지 유관순의 이름을 알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제 강점기 신문들을 보아도 유관순의 이름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적도 없다. 유관순처럼 열정적으로 싸웠던 여학생들은 전국적으로 많았고 참혹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이야기도 숱하게 입에 오르내렸지만 유관순이 그런 이들의 대표적인 이로 꼽힌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해방 당시 김구든 이승만이든 여운형이든 박헌영이든 유관순의 이름을 몰랐을 것이고 조선인 거의 대부분도 그랬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그런데 갑자기 유관순이 뜬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 공산당 등 이른바 좌익 세력에 반대했던 민족주의 진영, 즉 우익들은 거의 일제의 폭압에 거의 저항을 포기하거나 적극적인 친일파로 전락한 상태였고, 독립운동의 영웅이라고 내세울 사람이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관순의 영웅적인 투쟁이 ‘발굴’된 것이다. 분명히 할 것은 그 ‘발굴’은 왜곡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영웅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이다. 단 그 스포트라이트의 조건에 유관순이라는 인물이 부합된 것 뿐이다. 유관순은 기독교인에 우익의 거물 조병옥과 같은 고향 사람이었고 일찍 죽어서 변절하지도 않고 사회주의 따위에 빠지지도 않았다. 나이도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하기에 걸맞게 열일곱에 독립만세 부르다가 열여덟 살에 옥사했으며, 일제 부역행위로 핀치에 몰려 있던 김활란이 “학교를 살리기 위해 친일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던 그 학교, 이화학당 출신이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 비로소 양의 이야기가 동포 사이에 알리어지자 사람들은 모두 목이 메어 비분의 눈물을 금치 못하였지만 양의 출신인 서울 이화여자중학교와 유관순기념사업회의 발기로 향리에 기념비를 세우게 되어 준비를 하여 오던 중...... 11월 27일 오후 2시 병천에서 문교 당국 및 사회 유지 및 이화여중 합창단이 참석하여 기념비 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하기로 되었다 한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27일자, '殉國(순국)의少女柳孃(소녀유양) 並州(병주)에서記念碑除幕式(기념비제막식)'

이 일에 앞장선 것은 유관순의 은사였던 박인덕, 그리고 해방 직후 이화여중 교장이었던 신봉조였다. 둘 다 상당히 열렬한 친일 행각을 보였던 인물들이다. 이후 ‘유관순 기념 사업’은 잉걸불에 기름 부은 듯, 비온 듯 죽순 자라듯 이어졌고 두 달 뒤에는 ‘유관순 전기’가 나왔고, (동아일보 1948년 2월 7일자) 석 달 뒤에는 유관순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7일자) 이 영화 역시 대대적인 홍보 속에 절찬리에 상영됐다. 그 해 제작된 한국영화래야 11편에 불과했고 정부 홍보 영화 등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극 영화 수는 더 줄어든다. <유관순>은 그 중의 하나였다. (영화진흥위원회 데이터베이스) 이후 유관순을 주제로 한 영화는 두 번 더 만들어진다. 도금봉과 엄앵란이 유관순 역을 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이 정도의 조명을 받은 인물은 안중근 정도나 될까.

특히 이화여중(당시)이 유관순을 내세우는 모습이 당시에도 좀 고까워 보였던 것 같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4일자(우리학교의 자랑, 이화여중편)에는 한 기자의 이화여중 교장 방문기를 싣고 있는데 교장은 “과거의 유관순을 자랑하고 현재의 박봉숙(세계 기록을 낸 올림픽 투포환 선수)를 길러낸 것이 이화교육의 최대목적이라”기염을 토했다. 기자는 그만 빈정이 상한다. 그래서 나오는 질문이 이것이었다. “전쟁 중에는 방공훈련에 1등을 하느라고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전쟁이란 태평양 전쟁을 말하며 이화여중은 일본 당국이 실시한 방공훈련 경진대회에서 1등을 한 모양이다. “아이들을 살리느라.....”고 궁색한 답변을 하는 교장을 뒤로하고 기자는 이렇게 오금을 박는다. “(일본) 육군병원 위문단으로 많은 칭찬을 받던 이화여중의 특수한 교육법을 기자는 묵묵히 생각하며 교문을 나왔다.” 즉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유관순 유관순 하는데 결국 그 과거 숨기자는 것 아니냐.”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당시의 우익에게 감사한다. 유관순의 발굴은 훌륭한 일이었다. 그토록 용감하게 싸우다가 부모를 잃고 자신도 항거하다가 목숨을 버린 여성 독립 투사를 새삼스레 조명해 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런데 3.1절 100년을 맞아 정부는 유관순을 서훈 3등급(건국훈장 독립장)에서 1등급(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격상시켰다. 기존의 법 체계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유관순의 새로운 공적이 밝혀졌거나 지금까지 몰랐던 비밀스런 사실이 등장했을 때에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유관순 열사가 3·1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국민에게 각인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1등급 훈장 추서의 자격이 있다”면, 나로서는 도무지 이 기준을 이해할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유관순 같은 이들은 당시 조선 전역에 넘쳐났다. 단지 ‘많이 알려졌을’ 뿐이다. 그래서 1등급의 자격이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항차 수십 년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들이 그 뒷단에 즐비한 마당에 유관순을 1등급으로 격상시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단지 ‘지명도’의 차이라면 이 어찌 황망한 일이 아닐까.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 배화여학교 교정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한 안희경 안옥자 소은명 성혜자 박양순 김경화 학생(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당시 14∼18세였던 이들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한 달 넘게 수감됐다. 2018년 8월 보훈처는 이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출처: 보훈처

친일파 청산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하나 분명한 것은 독립운동사의 발굴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가 그 알파요 오메가가 되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우에도 기준이 있어야 하고 차등을 둔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자의적으로 그 이유를 만들면 안된다. 유관순 열사를 존경하고 그 행동에 지극한 경의를 표하지만 “널리 알려졌기에” 1등급으로 세우는 일은 유관순 열사 본인이 난처해할 일이 아닐까. 충청도 출신이었으되 말이 빠르고 말이 안되는 일에는 거침없이 쏘아 부쳤다는 그 말투로 “아니 어떻게 제가 석주 이상룡 선생이나 우당 이회영 선생, 김마리아 선생보다 더 위에 있단 말인가요. 이런 말도 안되는 기준이 어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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