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오나라와 고구려의 운명적ㆍ비극적 만남

  • 기자명 안정준
  • 기사승인 2019.03.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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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조조와 유비, 손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후한말 이래 중원을 두고 수많은 영웅들이 서로 다투었으나, 황하 연안에서 일어난 군웅들은 대부분 한나라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은 조조에 의해 평정되었다. 조조는 205년에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원소를 무너뜨리면서 황하 유역의 넓은 지역을 장악하였고, 곧이어 천하 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장강(양쯔강) 유역을 근거로 하고 있던 손권 세력에게 칼날을 겨눴다. 208년 형주 지역에 무혈입성한 조조는 의기양양하게 수군을 이끌고 강남 정벌에 나섰으나, 장강 하류 유역의 적벽(赤壁)이라는 곳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 의해 처참하게 격파되었다.

이후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남쪽에서 유비가 험고한 자연지형을 울타리로 삼아 촉한(이하 촉나라)의 기반을 닦았으며, 장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동남부 지역은 손권의 오나라가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그렇게 천하의 자웅을 겨루는 위․촉․오 삼국이 정립하게 됐던 것이다. 흔히 이 시기를 가리켜 천하가 삼분(三分)되었다고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삼국은 균등하게 ‘삼분’된 것은 아니었다.

위촉오 삼국시대 지도

○ 중원의 패자 위나라, 그리고 절박했던 남쪽의 오나라

이 시기까지도 중국의 중심부는 황하 중․하류를 중심으로 한 화북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문명의 발상지로서 일찍이 개발과 치수가 진행되어 많은 농경지가 확보되었고, 그에 따른 풍부한 생산력으로 다수의 한족 주민이 거주하는 정치․경제․사회의 중심부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반면에 오나라가 세워진 장강 유역은 현재 중국에서 경제적 비중이 매우 높은 인구밀집 지역이 되었지만, 삼국시기까지만 해도 다수의 한인들이 거주했거나 농경의 기반이 제대로 갖춰진 지역은 아니었으며, 이전부터 거주했던 많은 소수민족들이 오나라 정권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즉 오나라의 남부 영토 가운데 상당부분은 사실상 ‘미개척’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나라는 인구와 생산력면에서 화북의 위나라에 크게 뒤졌으며, 이는 곧 국력과 군사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보통 삼국시기 연구자들은 당시 중국 전체의 인구와 생산력을 놓고 비교할 때, 조조의 위나라가 천하의 60%이상을 장악하였으며, 나머지 40%를 오와 촉이 나눠가진 상태였다고 본다. 오나라는 강력한 수군과 지형적 험고함, 그리고 촉나라와 연합을 통해 위나라에 근근이 대항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위나라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었다. 손권은 촉나라와의 연대만으로는 거대제국 위나라의 공격을 오랫동안 막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위나라의 군사력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킬 수 있는 전략을 짜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손권의 이러한 ‘절박함’은 오나라가 아주 의외의 국가와 적극적인 연대를 꾀하게 되는 주된 원인이 된다.

 

○ ‘요동(遼東)’의 힘을 빌어 ‘역적’ 조조를 치자

후한말인 서기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대대적으로 일어나면서 중원 지역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이때 요동군 출신의 공손탁(公孫度)이라고 하는 걸출한 인물이 190년경 요동 지역의 지방장관(요동태수)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후한 조정이 멀리 떨어진 변경에 미처 신경 쓰기 어려운 상황임을 간파하고는 아예 요동 지역에서 자립해서 세력을 거느리고 눌러앉아버렸다. 그리고 군대를 동원해 인근 요서 지역과 더불어 한반도 서북부까지 자기 관할 하에 두고 스스로를 요동후(遼東侯)・평주목(平州牧)으로 칭하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220년 후한이 멸망하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나라가 화북 지역에 들어섰다. 위나라가 주변 세력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급기야 동쪽 요동으로 가는 길목의 군벌 세력들을 모두 제거해버리자 공손씨 세력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위나라의 주변 정세가 진정된 이상 그 칼날이 요동 지역을 향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불안감이 엄습해오던 즈음인 229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누군가가 공손씨 세력에게 손을 내밀어왔다. 남쪽의 오나라 손권이 바닷길을 통해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 그것도 숙적 위나라를 배후에서 함께 공략하는 군사 협력을 제안하면서.

당시 요동에서는 공손탁이 죽고 공손강-공손공을 거쳐 공손연이 집권하고 있었다. 공손연은 이러한 오나라의 적극적인 동맹 제안에 대해 많은 고심을 했던 것 같다. 만약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경우 한편으로는 두 세력의 힘을 모아 위나라를 위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나라와의 군사동맹이 위나라에 알려질 경우, 이는 오히려 위협을 느낀 위나라의 적극적인 요동 침공을 유발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결정인지 여부에 대해 공손씨 세력 내에서도 내심 확고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단 오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하임을 자처하고 담비가죽과 말을 바치면서 오나라 수도 건업의 동정과 군대 무기 상황 등을 살피며 허실을 면밀히 따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애매한 분위기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손권은 공손연의 사신이 오나라에 오자 크게 기뻐했다. 급기야 손권은 공손연과의 군사동맹을 기정사실화 하고 233년에 장미․허안 등의 고위 관리와 더불어 400명 규모의 사절단, 그리고 1만 명이나 되는 군대를 배에 태워서 요동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공손연에게 선물로 줄 진귀한 보물들을 가득 실은 배들도 함께였다. ‘밀당’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손권이었다.

사실 요동 공손씨와의 동맹은 오나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큰 도박이었다. 오나라에서 요동반도로 가는 항로는 멀기도 했지만, 당시 항해 기술이나 목조선박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깊은 바다에서 항해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위나라 영토인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비교적 수심이 얕은 바다에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실로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사행길이었다. 바로 전해인 232년 9월에는 요동에 다녀오던 오나라 사신단의 선박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고, 이때 우두머리였던 주하가 탔던 배가 위나라 해안에 표류해버리고 말았다. 주하는 위나라 장수였던 전예에게 붙잡혀 곧바로 참살당했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불안요소는 요동의 공손연이었다. 당시 오나라 중신들은 대부분 공손연이 과연 믿고 함께 연대할 수 있을만한 인물인지 여부에 대해 크게 의심하고 있었다. 오나라의 유명한 대신인 장소라는 사람은 손권에게 아래와 같은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공손연은 위나라를 배반하고서 그들에게 토벌당할까봐 두려워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뿐이지, 진심으로 우리를 섬길 뜻은 없습니다. 만약 공손연이 돌연 마음을 바꿔서 위나라에 자기 충성심을 보이려고 한다면 (우리가 보낸) 두 명의 사신은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 인민들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장소의 지적대로 공손연의 변심도 걱정이었지만, 만약 그가 갑자기 오나라에 비협조적으로 나오거나 배반할 경우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나라로서는 딱히 응징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요동의 일개 군벌에 불과한 공손씨 세력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이유 등으로 오나라의 대신들은 대부분 손권에게 결사반대를 외쳤으며, 설령 보내더라도 사절단 규모를 크게 줄여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간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손권은 막무가내였다. 장소의 간언을 들은 손권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한손으로 칼을 만지며 죽음을 운운하는 등 더 이상의 발언을 막았다고 한다. 이처럼 손권이 고집스럽게 추진한 결과로 꾸려진 대규모 사절단은 드디어 여러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요동을 향해 출항했다. 이러한 독단적 추진이 가능했던 것은 손권 개인의 성향도 문제였지만, 아무래도 최고통치자의 권력이 내부에서 제대로 견제 받지 않는 기형적 정치구조도 한 원인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손권의 확신 속에 해피엔딩을 꿈꾸며 항구를 떠난 400여 명의 사절단 앞에는 크나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국시대 당시 동북아 지도

○ 필사의 탈주, 우연히 맞닥뜨린 고구려 사람들

233년 오나라의 대규모 사신단은 긴 항해 끝에 요동 반도에 상륙했다. 400여명의 관인들, 그리고 1만여 명의 정예 군대였다. 공손연이 보낸 사절이 정중하게 마중을 나왔다. 그들은 오나라의 군대를 일단 해안가에 머무르게 하고, 400여 명의 사신 일행만 공손연이 있는 양평 지역(지금의 요령성 요양시)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책임자였던 장미와 허안은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 그들의 권유에 따라 병력들을 해안가에 머물게 한 뒤 사절단 일행과 함께 양평으로 길을 떠났다.

한편 고향땅에서 만 리나 떨어진 낯선 해안가에 머물게 된 오나라 1만 장병들은 해안가에 숙영지를 만들고 추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장미 등의 지휘부로부터 아무런 기별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떨고 있던 어느 날 밤, 갑자기 한 무리의 군부대가 해안가로 접근해오더니 급기야 오나라 군영을 기습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손연이 보낸 군대였다. 오군은 황급히 진용을 갖춰 대응했지만 갑작스러운 기습에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멀리서 점점 더 많은 적군이 몰려오는 것을 목도한 오군은 바닷가에 정박해있던 자신들의 배로 허겁지겁 이동하여 요동반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양평으로 공손연을 만나러갔던 오나라 사절단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일단 최고책임자였던 장미와 허안은 양평에 도착하자마자 공손연에게 포박되었고 곧바로 참수되었다. 이들은 각각 오나라의 태상과 집금오라는 높은 관직을 맡고 있던 관인이었으나 이처럼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공손연은 이들의 잘린 목을 잘 포장해서 위나라 조정에 보냈다.

 

‘남쪽 장강의 역도들이 찾아와 참람되게 저희 측에 위나라를 공격할 것을 제안해오므로, 이들의 목을 베어 조정에 보냅니다.’

 

아마도 위나라에는 이러한 사유서를 적어서 보냈을 것이다. 사실 공손연은 위와 오 양국의 군사적 긴장관계 속에서 양국의 군사적 충돌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양국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요동 지역이 자연히 위나라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오나라에게는 겉으로 공동의 적인 위나라를 치자고 하여 싸움을 부추기면서도 내심 자기 지역의 안위를 추구할 뿐 적극적인 위나라 공략은 의도하지 않았던 셈이다.

순진한 손권은 이러한 사정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공손씨에게 보다 적극적인 연대와 협공을 제안했다. 오나라의 적극적인 구애는 공손씨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요동 지역이 위나라의 최우선 타겟이 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공손연은 일단 오나라에 사신단을 보내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오나라가 과연 위나라에 대적할만한 역량을 갖추었는지 그 군대와 무기, 그리고 수도의 동정 등을 먼저 살피게 했다. 사신단이 내린 결론은 「오나라는 미약하여 위나라에 대적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손연은 위나라측과의 친선을 도모하기로 마음을 바꿨고, 급기야 교섭을 진행하러온 오나라 사절인 장미․허안의 목을 베어 위 조정에 보냈던 것이다. 참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처신이었다.

이제 우두머리를 잃은 오나라의 4백여 명에 달하는 사절단에 대한 처치가 남았다. 공손연은 이들을 모두 요동 지역에 구금시키기로 했다. 4백여 명이 한군데 몰려있을 경우 집단행동을 할 우려가 있으므로 여러 지역으로 분산해서 옥에 가두고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관리가 소홀한 곳도 생기기 마련이다. 동북쪽의 현도군 지역에 보내져서 감금되어 있던 진단․장군․두덕․황강이라는 4인의 인물들이 그곳을 지키던 자들에게 저항을 시도했고, 급기야 성을 넘어서 탈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네 사람은 정신없이 달려서 쫓아오는 공손연 측의 군사들을 따돌리는데 겨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주변 지리도 전혀 알 수 없었고, 곳곳에 어떤 세력들이 포진해 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오나라로 타고 갈 큰 배도 없었을 뿐더러 설령 배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단독으로 건너갈 수 있는 항로도 아니었다. 네 사람은 일단 공손연의 추격자들을 완전히 따돌리고 그 세력권을 벗어나기 위해 동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이때 장군이라는 인물은 무릎에 종기가 생겨서 두덕이 부축하여 함께 갔으나 결국 일행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게 됐다. 이에 장군과 두덕은 낙오하여 산속에 숨어있게 되었고, 진단과 황강은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헤어진 옷차림에 엉망인 몰골로 들판과 산속에서 과일, 나물 등을 채집해 먹으며 밤중에 몰래 이동했다. 몰골은 말 그대로 만리타국을 떠도는 거지꼴이었다. 진단과 황강은 장군․두덕을 놔두고 나선지 며칠 만에 드디어 공손씨 세력의 동쪽 경계에 다다랐다. 국경의 건너편에 이르자 중국의 성곽과는 사뭇 다른 형태인, 견고한 돌로 들여쌓은 성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인 복식.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진단과 황강이 황급히 근처로 달려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 지르자, 잠시 후 성문이 열리고 그곳 관리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머리에 새 깃털로 장식된 모자를 쓰고, 붉은 바탕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새겨진 긴 두루마리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남쪽 장강 유역에서 살던 진단과 황강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희한한 행색이었다. 이렇게 진단 등의 오나라 사절단은 공손씨의 동쪽에 인접한 나라, 고구려에 닿았던 것이다. (2회에서 계속)

안정준 팩트체커는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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