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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닮은 이와 사랑에 빠졌는데 첫사랑이 돌아온다면?[홍상현의 인터뷰] 14일 개봉 영화 <아사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순전히 아침 댓바람에 출발해 저녁녘이 되어도 목적지에 닿을 수 없는 여정 때문이었다. 2010년 10월을 이틀 남겨놓은 토요일 《더 가디언》에 실린 ‘경애하는’ 캐서린 테일러의 리뷰만을 읽고 무작정 약 보름 전 출판된 단행본을 주문한 것은.

하지만 재킷 앞주머니 작은 비닐주머니에 수면유도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저자인 이삭 마리온이 세계시장에서 백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부자가 될 만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가 경유지인 항공기 이코노미클래스 좌석에 압핀처럼 고정되어 있었던 건, 옆자리의 덩치 큰 코카시언 남성이 비행기가 이륙한 이후 내내 곤히 잠들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웜 바디스(Warm Bodies)』, 스물세 살 시절의 니콜라스 홀트가 앳된 미모를 뽐내는 ‘좀비’로 등장해, 관객의 가슴을 흔든 할리우드 영화의 동명 원작 소설, 그리고 2014년 『봄의 정원』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원작 소설 작가와 2016년 <해피 아워>낭뜨 3대륙 영화제 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감독의 이름이 내걸려 화제를 뿌린 <아사코>(3월 14일 개봉) 사이의 묘한 상관관계를 제25호 태풍 콩레이가 휩쓸고 지내간 거리를 가로지르는 내내 생각했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사랑에 다가갈수록 사람이 되어가는 <웜 바디스>의 주인공과 첫사랑을 빼닮은 이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가 돌아오자 감정의 격랑에 휩쓸리는 <아사코>의 주인공은 닮았다. ‘사랑’을 통해 현실과 맞부딪치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해 ‘발화한다(énoncer)’는 점에서.

‘사랑밖에 모른다’ 운운하는 철지난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는 것은 일차원적이다. 욕망의 삼각형(Désir triangulaire)을 언급하며 날을 세우는 일도 성급하다. 그런 생각으로 불편해진다면 부디 영화가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사실보다 애초에 흥행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흔하디 흔한 사랑 영화’에 비평적 잣대를 들이대며 피로해 하기 보다는.

그렇게 영화에 몰입해 있다가 후반 30분을 지켜보던 필자로 하여금 문득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지’하는 불안감마저 들게 만들었던 <아사코>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그의 마력(魔力)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 제작사인 꼼 데 시네마(Comme des Cinémas)와 공동 제작한 <아사코>는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과 함께 세계 20여 개국 배급이 결정되어 화제를 불렀다. (<아사코> 티저 포스터) ⓒ 올 댓 시네마 플러스

홍상현:

한일합작영화 <심도>로 처음 한국을 찾은 이래 9년 만인가. 물론 <아사코>와 <해피 아워>가 각각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비록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심도>가 (CJ엔터테인먼트 배급으로) 한국의 영화관에 걸렸으니 저는 한국에서 ‘상업영화’ 데뷔를 했다 할 수 있다. (웃음) 그런 한국에서 제 작품이 다시 이 정도 규모로 공개되어 너무 기쁘다. 홍상수, 봉준호, 박찬욱 등 작가주의 영화를 중심으로 한국영화를 접했는데, 최근 <부산행>을 보고 그 화면의 강도에 놀랐다. 그런 강렬한 작품에 익숙한 한국 관객 여러분께 이번 작품이 어떻게 비쳐질지, 또한 ‘아사코’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무척 기대된다.

홍상현:

여기서 떠오르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2011년 후카다 코지 감독이 극단 청년단 소속으로 고바마아고라영화제 개최를 주도할 당시, 당신의 세 번째 장편영화 <열정>도 상영되었다. 그로부터 6년 뒤 후카다 감독은 <하모니움>으로, 이듬해 당신도 <아사코>로 칸국제영화제에 갔다. 그 밖에도 고마바아고라영화제에 참가한 감독들은 현재 국제영화제에서 각광받으며 활약 중이다. 얼마 전 <우행록>의 이시카와 케이 감독과도 이야기했지만 특히 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태어난 이들 가운데 뛰어난 연출역량을 가진 감독이 두드러진다. 대표주자의 한사람으로 어떻게 생각하나.

하마구치 류스케:

어떻게 고마바아고라영화제를 다 아십니까? 깜짝 놀랐어요! (웃음) 우리 세대가 실질적으로 국제무대에 인지되는 데는 후카다 코지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의 칸국제영화제 진출로 ‘신세대의 존재’가 각인되었다고 본다.

더불어, 국제적 인지도는 차치하더라도, 동세대 중에 ‘재능 있는 인재’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넘쳐난다는 점은 저 또한 실감한다. 요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짧게 정리해 보면 제 경우, 그 원류에 하스미 시게히코(※ 불문학자ㆍ소설가ㆍ영화평론가로 도쿄대 총장을 지냈다)의 비평ㆍ상영활동이 있었다. 1970 ~ 80년대에 그로부터 직접 교육받은 세대가 (제 스승이기도 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을 필두로 한 이른바 ‘릿쿄 누벨바그(Rikkyo Nouvelle Vague)’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후발세대인 우리는, 말하자면, 하스미의 영화비평과 그 다종다양한 실천을 동시에 수용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온갖 종류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하는 ‘영화도시’, 도쿄라는 환경요인도 있을 텐데. (20대 무렵, ‘아무리 영화를 봐도 끝이 없구나’하는 기쁨과 괴로움을 동시에 맛보았다) 그 중심지가 현재도 운영 중인 미니시어터(mini theater, 소규모 예술영화전용관) 유로스페이스다. 경영자인 호리코시 겐조(※ 영화프로듀서, 도쿄예술대 명예교수)는 제가 구로사와 감독에게 가르침을 받은 국립도쿄예술대학(TAU) 대학원 영상연구과를 2005년 창설한 멤버 중 한 분이기도 하다. 유로스페이스가 위치한 시부야의 키노하우스 건물에는 영화미학교라는 사립 영화학교도 입주해 호리코시가 제시한 “영화를 보고, 찍고, 연기하는” 사이클을 체현하고 있다.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참가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미야케 쇼 감독도 이 학교 출신이다. 저 또한 그 사이클 안에서 영화를 배운 이들 중 하나고. 적절한 제작체제만 갖춰진다면 앞으로 많은 영화감독이 이 시스템을 거쳐 국제무대에 진출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상영기간 때문일까. 한일합작영화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 공개된 곳이 다름 아닌 한국이었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 Bitters End

홍상현:

학교(도쿄대 고마바캠퍼스) 앞 3분 거리의 극장에서, 학기 초마다 회원 모집 광고를 하던 영화연구회의 대표적 인물이 참가한 가운데 치러진 영화제를 몰라도 이상하지. (웃음) 아무튼 또 한 가지, 당신의 인터뷰를 하면서 반드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연기자에게서 최선의 연기력을 이끌어내는 연출력이다. <사랑의 행로>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한 것으로 유명한 존 카사베츠의 영향을 받았다고 명언하며, 자크 리베트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우리의 후견인 장 르누아르 2부 : 연기자의 연출>에서 소개된 연출법을 작품 제작에 도입했다. 무려 2015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라는 저서도 냈다.

하마구치 류스케:

‘최선의 연기’라고 평가받는 것은 기쁘고 감사한 일이나, 제가 그것을 끌어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연기자의 연기가 훌륭하다면, 그것은 단지 연기자의 힘, 혹은 연기자의 매력을 그대로 모사해낸 카메라의 힘일 것이다.

언급하신 저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기』의 내용에서도 <해피 아워>의 제작기록이 주를 이루며, 이론이라기보다 영화를 제작하며 제가 겪은 시행착오를 다룰 분이다. 다만 제게 카사베츠나 르누아르의 영향이 현저한 것은 분명하다.

카사베츠의 가장 큰 가르침은 ‘누구나 연기를 할 수 있다’, ‘얼마나 잘 연기할 수 있는지는 연기자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스스로가 느끼는 바를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를 얼마나 실천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제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구체적인 ‘기술’보다 연기자가 안심하고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다.

홍상현:

촬영 전부터 무척 오랜 시간을 투자해 연기자들과 작업을 한다. 과정은 힘들겠지만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은 <해피아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효과도 있고, 연기자들의 만족도가 높을 것 같은데.

하마구치 류스케:

<해피 아워>의 경우, 촬영에 들어가기 6개월 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워크숍을 진행했다(총 23회). <아사코>는 모두 합쳐 1주일 정도였고. 후자는 작업 기간이 극단적으로 길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구체적으로 연기자가 대사와 동작을 리허설하는 일은 전혀 없다. 주가 되는 것이 뒤에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릴 ‘책읽기’, 혹은 시나리오나 부수적인 서브텍스트를 읽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 갖는 최대의 효용은 ‘연기자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로가 어떠한 인간인지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연기의 수월성(excellence)은 높아지는데, 여기에 신뢰관계라 할 만한 것까지 더해지면 촬영 현장에서의 연기에 또 다른 기반이 다져진다.

필자가 보기에, 사랑에 다가갈수록 사람이 되어가는 <웜 바디스>의 주인공과 첫사랑을 빼닮은 이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가 돌아오자 감정의 격랑에 휩쓸리는 <아사코>의 주인공은 닮았다. ‘사랑’을 통해 현실과 맞부딪치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삶에 대해 ‘발화한다(énoncer)’는 점에서. ⓒ 올 댓 시네마 플러스

홍상현:

특히 개인적으로 감탄하는 것이 바로 그 ‘책읽기’로 대표되는 대본 리딩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책읽기’는 언급하신 리베트의 다큐멘터리에도 언급되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지젤 브룬베르거의 <장 르누아르의 연기지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르누아르가 미켈 시몬에게 배웠다는 이탈리아식 책읽기(전화번호부를 읽듯이 감정적 뉘앙스를 배제한 채 텍스트를 읽는)를 실천함으로써 <장 르누아르의 연기지도>의 지젤 브룬베르거는 매우 농밀한 연기를 보여준다.

물론, 프랑스어와 일본어는 전혀 다르며, 우리가 르누아르와 같은 눈과 귀를 갖고 있지도 않은 까닭에, 여러 가지를 조정한 우리 식 ‘책읽기’에 불과할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연기자들이 무기질(無機質)하게 텍스트를 읽는 소리가 매우 아름답게 들린다. 텍스트와 연기자의 친화성이 높아지는 그 느낌을 ‘책읽기’가 거듭되는 가운데 받을 수 있어서다. 또한 이는 연기자에게 자신감을 부여해준다. 큰 실패 없이(해서 다른 이들 앞에서 그를 부정하거나 면박을 주는 일 없이) 몇 번이든 시행착오를 거듭해도 된다는 점은 제가 생각하는 ‘책읽기’의 최대 매력이다.

다만, 촬영현장에서는 ‘책읽기’ 때와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지 말고, 그저 연기자 본인이 원하는 대로 연기해달라고 주문한다. 만약 어떤 감정이 일어날 경우, 솔직하게 발전시켜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홍상현:

<아사코>에 대해서 좀 더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자. 프랑스와 공동 제작,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고, 세계 20여 개국 배급이 결정된 이 작품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당신의 “첫 상업영화”인데,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치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나누는 엄밀한 기준이 존재하는 것 같잖은가. 재미있음과 재미없음의 기준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당신의 경우는 다르다. 단지 편집, 즉, 상영시간의 문제거든. 극장주 입장에서는 러닝타임이 짧아서 하루에 여러 번 상영할 수 있으면 좋겠지. 예컨대 전작인 <친밀함>도, <해피아워>도 255분과 317분으로 무척 길었지만 그 긴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는 서사의 힘이 있었다. <아사코>와 전작의 차이는 원작을 각색했다는 것과 메인스트림의 제작사가 참가했다는 것 정도일 뿐, 흥미로운 이야기와 뛰어난 연기를 보는 재미라는 면에서 당신의 작품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데.

하마구치 류스케:

물론 상업영화 제작은 그간의 독립영화 제작과 어느 정도 다른 체험이었다. <아사코>는 흥행에 실패할 경우 저 혼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금전적인 부담은 프로듀서들에게만 발생한다. 이런 환경 하에서 프로듀서가 어느 정도, 이야기의 내용이나 시나리오,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 방향에 대해 의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느끼며, 저 또한 대응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다만, 제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제작방향과 비교했을 때 본질적인 변화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아사코>는 전작과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울러, 상업영화ㆍ예술(작가주의)영화의 구분은 저로서도 확실치 않다. 물론 각각의 극점에서 이야기하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제가 서있는 지점은 그 구분이 혼탁해지기 쉬운 환경이다. 그 안에서 제 판단기준도 당연히 ‘상업적이냐 예술적이냐’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제게 ‘재미있는’ 영화냐 아니냐는 것뿐이다. 이것을 제 작가적인 고집으로 보지 않는 것은, 이 ‘재미’의 기준에 관객이 이해하기 쉬운지, 혹은 어려운지에 대한 문제의식도 분명 포함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그동안 관객들의 이해를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는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는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이는 내 의지의 산물이라기보다 능력의 한계에서 기인한다. 단순히, 그런 영화밖에 만들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이 제 상상 이상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사이클이 이어져 왔고, 그래서 저는 제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프로듀서에 대한 제 의무를 다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이런 제 기준이 많은 면에서 프로듀서들에게 받아들어져 서포트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서, <친밀함>과 <해피 아워> 모두 일본 내에서 극장개봉이 이루어져 두 편 다 제작비가 문제없이 회수되었고, 그 중 <해피 아워>는 3만 명 정도의 관객을 동원, 규모에 비해 오히려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모든 면에서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분하는 기준이 더욱 애매하다는 것이다.

2014년 『봄의 정원』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아사코>의 원작자, 시바사키 토모미는 오사카에서 나고 자랐다. <아사코>에서 첫사랑의 무대가 되는 곳도 오사카이며 캐스트는 모두 현지 사투리를 구사한다. ⓒ 올 댓 시네마 플러스

홍상현:

<아사코>는 지난 2004년, 당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로 전성기를 누리던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이 연출한 <오늘의 사건 사고>의 원작자, 시바사키 토모카의 소설이 원작이다. 다만, 여기서 이야기할 것은 이 작품의 시나리오가 단지 제작사가 소설의 판권을 구입해 시나리오를 쓰는 간단한 과정을 거쳐 태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작자 본인과 직접 의논해가면서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데만 2년 이상이 걸렸다고 들었다. 그 과정에서 <아사코>를 “하마구치 영화”로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이 더해졌나.

하마구치 류스케:

<아사코>는 저 자신이 시바사키 토모카 소설의 팬이었던 까닭에 직접 프로듀서에 제안하면서 영화화가 이루어졌다. 기획이 시작된 건 2014년 무렵의 일이다. 정확하게는 시나리오 집필의 최종 국면(2017년)에 이르기까지, 원작자로부터의 주문은 거의 없었다. 시바사키 작가가 대단히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소설과 영화는 완전히 다른 미디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다. (시바사키 작가는 촬영 현장에도 몇 번이나 견학을 와주셨다) 따라서, 저로서도 대단히 자유롭게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시바사키 작가가 확인한 것도 “관서(關西) 방언의 정확함”과 “원작에 없는 요소를 취급할 때, 섬세하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 그리고 몇 가지 대사의 세부적인 부분 정도였다.

홍상현:

극중에서 동일본대지진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원작소설에는 없는 부분이다.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경험 때문인가.

하마구치 류스케:

시나리오는 대략 2014부터 1년에 걸쳐 구성ㆍ플롯ㆍ초고ㆍ제2고를 공동 집필자인 타나카 사치코 작가가 써주었고, 저는 2016부터 1년간 촬영을 위한 개고(改稿)를 담당했다. 지적하신 대로, 2011년 일어났던 동일본대지진에 관한 묘사는 원작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2010년 출판된 원작에서도 10년 가까운 시간의 흐름을 담겨 있던 까닭에 그 안에 미국의 9ㆍ11 테러나 지바에서 진도 5 정도의 지진 등 실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타나카 작가에게 단지 연애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사건도 배경으로 다뤄주십사 부탁드렸다. 다만, 이 정도로 정면에서 동일본대지진이 다뤄져서 솔직히 당황했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타나카 작가 본인이 제 다큐멘터리 제작 이력을 염두에 두고 이 요소를 추가하셨다고 한다) 그러니 제가 한 일은 이야기의 주제(계속되고 있던 하나의 흐름이 돌연 끊어져버리는) 안에서 동일본대지진 관련 내용이 묘사될만한 필연성이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거기에 제가 직접 보고 온 내용과 관련해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분을 고치는 페이스(pace)로 작업을 진행했다.

홍상현:

원래부터 다큐멘터리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 감독이었는데, 특히 직접 제작을 경험한 이후, 연출자로서 이전과는 다른 단계에 접어든 느낌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확실히 제 영화 만들기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거치면서 바뀌었다. 이를테면 다들 그저 ‘이재민’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토호쿠 지방 사람들이, 그런 선입견을 넘어 무척 생생하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순간과 몇 번이나 맞닥뜨렸다. 어떤 사람의 깊숙한 내면에도 그런 생명력이 잠들어있음을 이해하게 된 경험은 이후 발표한 <해피 아워>나 <아사코>에서 연기자와의 소통방식과 인물묘사에 활용되었다.

2017년 4월에 오디션이 진행되기 직전까지 미국에 체재했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카라타 에리카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 Bitters End

홍상현:

칸국제영화제에서 <아사코>가 공개될 당시부터 화제를 모은 것은 단연 타이틀 롤을 연기한 카라타 에리카의 등장이다. 그와 관련해서 두 가지 이유로 감탄했는데, 뛰어난 연기력과 <아사카>가 사실상의 데뷔작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당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유추해 보면 역시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을 텐데, 제작사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리스크라고 할 수 있는 완전한 신인의 캐스팅에 우려는 없었나?

하마구치 류스케:

이제 와서 보면, <아사코>에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크랭크인 약 3개월 전까지 주연 캐스팅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시나리오에 묘사된 아사코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부족해서였는지, 이미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연기하기에 리스크가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여하튼 우리는 2017년 4월 진행된 오디션을 통해 카라타를 만났다. 저는 그 직전까지 1년 동안 미국에 다녀오느라 그가 출연해 화제가 모았던 CM등을 일체 볼 수 없었기에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주연으로 결정한 것은 앞서 언급한 ‘책읽기’를 시켜보니 목소리가 너무나 훌륭해서였다. 아사코라는 캐릭터는 두 남자를 똑같이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기에(그렇지 않으면 영화의 전편을 관통하는 서스펜스가 성립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를 연기로 보여줄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그러다 카라타의 보이스를 들어보니 “이 사람에게 대사를 시키면, 어떤 내용도 리얼하게 들릴 것”이라는 확신이 들더라. 자기자신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프로듀서 측에서도 그렇게까지 유명한 편은 아니던 카라타의 기용에 부담도 느꼈을지 모르나, 반대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 밖에 없다”는 게 중론이었으니까.

홍상현:

캐스팅 이후 다른 트레이닝 과정이 있었나.

하마구치 류스케:

‘책읽기’외에 딱히 트레이닝을 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시나리오를 읽었을 당시 이미 아사코라는 인물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난 감상을 들었을 때, 아사코의 행동원리가 그녀의 입을 통해 아주 심플하게 설명되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제가 했던 일은, 기본적으로 앞서 말씀드린 카라타(의 보이스)에 대한 인식과 신뢰를 본인에게 전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여기서 큰 역할을 해 준 사람이 히가시데 마사히로다. 히가시데도 카라타의 인품의 매력을 순식간에 이해하고, 그녀를 철저하게 서포트 할 것을 리허설 중에 명언했다. 앞서 말씀드린 “연기자 사이의 신뢰관계”의 가장 이상적 형태가 둘 사이에 존재했던 거다.

국내 팬들에게는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로 유명한 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아사코>에서 헌신적으로 작업에 임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 올 댓 시네마 플러스

홍상현:

그래서일까. 카라타와 데뷔 8년차의 뛰어난 연기자로 1인 2역을 소화한 히가시데 마사히로와의 ‘케미스트리(chemistry)’는 <아사코>를 보는 재미의 중심에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

연출가란 기본적으로 연기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다. 다만, 관객들까지 그 위치에 있지 않도록 이따금씩 캐스트 사이에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두 사람이 연기자로서 도달한 차원은 제게 있어서도 하나의 신비였다. 여기에 카메라가 이를 그대로 포착해서 관객에게 전달해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히가시데는 제 전작 <해피 아워>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책읽기’의 의의 또한 이해하면서, 바쁜 중에도 솔선해 시간을 할애해주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책읽기’를 반복하다 보니 바쿠ㆍ아사코ㆍ료헤이의 대사 역시 자연스럽게 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었다. 바쿠ㆍ아사코ㆍ료헤이 사이에 있었던 분위기는 두 사람이 연기자로서 함께했던 시간의 반영이기도 하다. 히가시데는 1인 2역을 연기하면서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카라타에게서 완전히 다른 표정을 끌어냈다. 그가 도달한 경지는 기본적으로 히가시데가 인도한 것 아닐까 한다.

홍상현:

관객을 압도하는 <아사코>의 재미는 역시 후반 30분의 전개이다. 이 부분은 감독인 당신의 연출의도와도 직결될 것 같은데.

하마구치 류스케:

마지막 30분은 분명 영화의 핵심으로 모든 요소를 이 부분을 향해 배치했는데 그 부분을 그렇게까지 봐주셨다니 매우 기쁘다.

다만, 제게 영화가 좋은 점은 보여드린 것 이상 첨언할 게 없어서다. 관객이 느낀 바가 무엇이든,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감정이 일어났다면 그 점이 저로서는 가장 바라는 일이며, 각각의 관객들께서 부디 그 감정을 음미하거나 다른 분들과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영화를 본 감상을 남들과 이야기 하는 것은 분명 재미있을 것이다. 또한 그 일을 통해 서로에게서 의외의 측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카라타 에리카의 보이스를 듣는 순간 “‘이 사람에게 대사를 시키면, 어떤 내용도 리얼하게 들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 올 댓 시네마 플러스

혹여 ‘유튜브 조회수 200만 뷰’를 자랑하는 타이틀 롤의 막강한 비주얼을 ‘필승의 카드’로 내세우지 않을까 했던 기우가 면구스러워, 역으로 카라타 에리카에 대한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진 탓일까. 인터뷰의 말미에서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다른 캐스트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하마구치 감독은 예의 성실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는 원작이 훌륭한 배우와 만나 태어난 영화입니다. 어떤 감상이 안식 있으신 한국 관객 여러분에게서 나오게 될지, 무척 설레네요. 이미 한국에서 유명한 가라타 에리카 외에도 히가시데 마사히로 등 주변의 훌륭한 배우의 존재에 주목해주시고, 부디 그들의 다음 작품도 기대해주세요.”

왜 모르겠는가.

이야기를 주도하는 두 사람에게만 시선이 쏠릴까 걱정이었는지 것이 신경 쓰였는지, 적재적소에서 『갈매기』의 독백연기를 하는 조연들(야마시타 리오세토 코지)의 모습까지 배치해주었던 그 마음을. 터프해 보이는 이미지에 감춰진 여린 내면이 어쩔 수 없는 예술가인 하마구치 감독과의 대화를 마무리하며 필자 또한 한 줄의 문장으로 내내 말하지 못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지금껏 당신이 만든 영화를 좋아했던 관객들 가운데 나또한 포함되며, 특히 <아사코>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고.

홍상현 팩트체커  contact@newstof.com  최근글보기
일본의 경제월간지 <게이자이(經濟)> 한국특파원. 도쿄대학교 이미지인류학연구실(IAL) 네트워크 멤버다. 도쿄대 시미즈 연구실 소속으로 국제관계와 언론보도의 상호작용을 연구했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논쟁적인 책을 한국에 소개하는 번역가다. <시사인> 등에 일본 소식과 국제관계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램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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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규 2019-03-15 07:52:58

    감독의 역량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인터뷰 입니다.
    연기에 집중할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다는 것에 하마구치 류스케가어떤 감독인지 느껴집니다. 예술영화이든 상업영화이든 대중에게
    읽혀야 한다는 부분도 공감이 되네요 .   삭제

    • 거북이등껍질 2019-03-15 07:28:24

      감독의 책읽기를 통한 인물 탐구 부분이 참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감독의 의중이 자신의 뜻보다 원작자, 연기자 본인들에게 있음을 보여준 흔치 않은 경우의 작품을 우리가 보게 되는 거라 생각하니 또다른 감상 포인트가 될 것 같네요.
      역시나 깊이 있고 흥미로운 인터뷰 기사에 엄지 척 들어 드립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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