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부족' 오나라와 '애매한 태도' 고구려의 예정된 파국

오나라 손권과 ‘요동’의 외교, 그 비극적 ‘로맨스’에 대하여 ②

  • 기사입력 2019.03.16 09:29
  • 최종수정 2019.03.18 02:18
  • 기자명 안정준

 

○ 고구려와 오나라의 운명적 만남

거지꼴을 한 채 아무런 징표도 지니고 있지 않았을 진단과 황강이 고구려인들에게 어떻게 스스로 오나라 사절임을 입증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중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가운데, 그들의 신분과 학식을 문장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진단과 황강은 운이 좋았다. 그때 고구려는 동천왕(227~248) 재위기였는데, 공손씨 세력과는 그리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진단 등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요동에 파견된 사신단으로서의 맡은 임무를 지속하기 위해 국경의 고구려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발언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나라 황제께서 고구려에게 보낸 사신입니다. 황제께서 고구려왕에게 내릴 조서와 많은 사여품을 가져왔으나 저 천하의 도적 놈 공손연이 사신단을 습격하여 책임자를 죽이고 물건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만 이렇게 겨우 도망쳐 이곳에 온 것입니다. 고구려 국왕께 우리 황제의 조령을 전달하게 해주십시오.”

 

고구려인들이 이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사실 오나라에서 고구려로 바로 가려고 했다면 굳이 공손씨의 영역인 요동반도에 정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의 압록강이 서해로 빠져나가는 길목인 서안평(단동시 일대)에 정박하면 바로 고구려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에 오나라의 사신이 고구려에 올 때도 매번 서안평 일대에 정박하였다. 아마도 고구려는 진단과 황강이라고 하는 이 오나라 사람들의 원래 목적지가 공손씨 세력이었고, 그들과의 교섭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고구려에 오게됐다는 사실도 눈치 채고 있었을 것이다.

2세기말~3세기초의 요동지역 세력도.

하지만 고구려 입장에서 그들의 입국 배경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진단 등은 분명 오나라의 사신단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극진히 대접해서 오나라와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트는 계기로 삼는다면 고구려로서도 굳이 손해 볼 것이 없었다. 3세기 전반 당시 고구려는 아직까지 세력이 약소한 상태였으며 거대 제국인 위나라와 이웃 공손씨 세력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하는 형국이었다. 이때 남쪽의 강국인 오나라와 정식으로 우호관계를 맺게 된다면 선진 문물의 수용과 더불어 향후의 대외전략을 펴는데 유리한 카드로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치밀하게 계산기를 두들겨본 고구려 동천왕은 진단과 황강을 중앙조정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오나라 손권의 교섭 의사를 받들기로 결정하고, 진단 일행이 중도에 헤어졌다고 하는 장군과 두덕도 찾아오게 했다. 이렇게 다시 뭉친 이들 4인방을 극진히 대접하게 한 동천왕은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선박까지 마련하여 진단 등을 남쪽의 오나라로 태워 보내게 했다. 이때 고구려의 관리 25명을 동행시켜서 호송하게 했는데, 이들은 오의 황제 손권에게 올리는 표문과 함께 담비가죽 1천 장, 멧닭 가죽 10장 등의 선물도 함께 지니고 갔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진단․장군․두덕․황강은 다시 오나라땅을 밟을 수 있었다. 4인방이 마침내 손권 앞에 다시 서서 귀환을 보고하게 된 순간, 이들은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오나라에서 함께 출발했던 400여 명의 동료들을 모두 잃은 채 구사일생으로 생존해서 귀환한 진단 등의 심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삼국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진단 등은)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스스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손권은 여러 중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규모 사절단을 요동으로 보냈으나 이는 공손연의 배신으로 인해 많은 인재들만 잃은 대참사로 끝났다. 장미․허안 등 고위관료들은 허무하게 타국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함께 갔던 400여명의 관료들은 생사를 알 수 없었고, 이들을 호위하며 따라갔던 금쪽같은 수군 병력들도 상당한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이처럼 요동과의 교섭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다가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한 손권의 정치적 책임은 매우 뼈아픈 것이었다. 손권 스스로도 조정에서 좌불안석이었고, 침소에서도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진단 등의 4인방이 돌아왔다. 그것도 동북방의 고구려라고 하는 신흥세력의 여러 관원들을 대동한 채로.

이렇게 아주 우연하게 찾아온 고구려라는 세력은 ‘순정남’ 손권에게 매우 큰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물론 당시 고구려는 요동의 대표 세력도 아니었으며, 이웃한 공손연 세력을 힘으로 누를만한 역량도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손권의 입장에서는 기왕 공손씨 세력과 철천지원수가 된 마당에 바로 옆에서 이를 견제해줄 수 있는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갖는 것이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게다가 언젠가 고구려가 급성장하여 동쪽의 위나라를 어느 정도 견제해줄 수 있는 전략적 파트너 역할을 해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손권은 고구려와의 친선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기 위해 고구려 사신단이 다녀간 바로 이듬해에 오나라의 대규모 사절단을 꾸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렇다면 손권이 이처럼 계속해서 동북방의 공손씨와 고구려 등 세력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구애’를 했던 것은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지금 시점에서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오나라가 막대한 위험과 경제적 손실을 무릅쓰고 추진했던 동북방 세력과의 전략적 연대는 설사 장기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끌어냈다고 할지라도, 그다지 큰 실익을 얻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위나라는 화북에서 안정적으로 자리한 대국이었다. 요동의 공손씨 세력과 고구려는 위나라를 실질적으로 견제해줄만한 국력에는 미치지 못했으며, 오나라와의 유기적인 군사 협력을 도모하기엔 너무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있었다.

특히 요동의 두 세력 모두 자국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는 가운데 바로 서쪽에 있는 위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형편이었다. 공손씨보다도 약체였던 고구려가 과연 오나라 손권과의 약조를 굳건하게 지킨다는 보장이 있었을까. 고구려 동천왕은 나름대로의 손익계산을 따져본 뒤 손권과 외교 관계를 맺고자 한 것이었으나, 이러한 계약은 주변 정세의 변동에 따라 언제든 극적으로 깨져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원의 위나라가 ‘매의 눈’을 하고서 요동 지역에서 돌아가는 상황들을 기민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위나라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왔던 요동 지역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동쪽 바다에서 오나라의 배가 요동을 왕래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고, 233년에는 아예 1만여 명 규모의 대규모 병력을 실은 선단이 공손씨 세력을 향해 가는 것이 목격됐다는 첩보도 들어온 상태였다. 위나라는 과연 이를 손 놓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손권의 요동 세력들을 향한 맹목적 믿음은 이러한 복잡한 상황들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었다. 오나라와 고구려, 양국 관계의 ‘파국’은 사실상 예견된 것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의 공성도. 창을 든 기병이 적을 쫒는 모습이다.

 

○ 양다리 외교, 그리고 파국으로의 향하는 길

234년 오나라에서는 사굉과 진순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 고구려를 향해 출항했다. 이들이 탄 배에는 동천왕에게 선물할 많은 비단 옷과 세공품들, 그리고 각종 보배들을 배에 잔뜩 실은 상태였다. 오나라 사절단은 고구려와의 교섭을 통해 양국 간의 우호관계를 확고하게 하는 동시에, 오나라에 부족했던 군마(軍馬)를 얻어오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고구려에는 좋은 말이 많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긴 항해 끝에 일단 압록강의 북안에 있는 고구려 영역인 서안평에 정박했다. 곧이어 고구려 사람들이 오나라 사절단을 안내하기 위해 찾아왔는데, 이때 사절단의 총책임자였던 사굉과 진순 등은 이전의 요동반도에서와 같은 비극적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매우 신중을 기하였다. 우선 사굉과 진순은 오나라 배가 정박한 서안평 지역에서 머물기로 한 가운데, 하위직에 있던 진봉이라는 사람을 먼저 보내서 고구려왕을 만나게 한 것이다.

진봉은 고구려인들의 안내를 받아 수도인 국내성(길림성 지안시)에 무사히 도착했다. 주변에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다는 점을 확인한 진봉은 비로소 안심하고 공식적인 양국 간 외교업무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진봉은 정확히 어떤 경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충격적인 첩보를 접하게 된다. 유주 지역을 지키는 위나라 장관(유주자사)이 고구려 동천왕에게 넌지시 연락을 하였는데, 그 내용인즉슨 오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오면 공손연이 그랬던 것처럼 붙잡아서 죽이든지 해서 공을 세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진봉이 누구로부터 어떻게 이러한 첩보를 얻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구려는 위나라로부터 이러한 은밀한 요구를 받았음에도 오나라에 그 내용을 알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하튼 양국 간의 내밀한 연락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 진봉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1년 전에 벌어졌던 공손연에 의한 장미와 허안의 죽음이 준 충격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을 때였다. 게다가 오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구려는 공손씨 세력만도 못한 북방의 일개 오랑캐 족속일 뿐이며, 이전까지 교섭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야만인들이다. 그런 자들이 위나라와 몰래 밀담을 주고받았다고 하니, 진봉 등의 인사들이 공포에 휩싸였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에 진봉은 고구려와의 교섭을 진행하기도 전에 국내성을 빠져나와서 서안평에 있는 자기 진영으로 황급히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사굉 등의 책임자에게 자신이 들은 첩보를 고해 바쳤다. 사실 고구려는 양단책의 일환으로 위나라와의 통로도 열어놓고 있었지만, 당장 오나라 사신단을 해치거나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진봉 등이 위와의 교섭 사실을 눈치 채고 황급히 돌아가 버리자, 고구려 동천왕은 황급히 수십 명의 관리들을 서안평으로 보내 오나라 사절단을 면담하여 해명하도록 했다.

이때 오나라 사절단의 책임자인 사굉은 진봉의 보고를 듣고 매우 분노한 동시에 자신들의 안위가 크게 위태롭다고 인식했던 것 같다. 이에 동천왕이 보낸 사신들이 서안평에 도착하자마자, 데리고 온 오나라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 사신 30여 명을 사로잡아 밧줄로 묶고는 인질로 삼아서 고구려측과 대치했다. 일관되게 우호적이었던 양국관계가 갑자기 칼을 빼들고 서로를 노려보는 극한의 대립 상황으로 뒤바뀐 것이다. 사굉 등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것과 동시에 오나라에 가져갈 많은 군마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난데없이 인질극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고구려 조정에 전해지자 동천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 사굉 등에게 사죄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말 수백 필을 내주며 달랬다. 이에 사굉은 곧 고구려 관리 30여 명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스스로 고구려 수도에 다시 갈 엄두는 나지 않았는지 고구려인들에게 자신들이 가져온 손권의 국서와 사여품 등을 갖고 가서 동천왕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아무리 일이 틀어졌다지만 사굉의 이러한 조치는 방문한 국가의 통치자에 대한 제대로 된 예우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 조정은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오나라 사절단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둘러 고구려에서 받은 말들을 배에 싣고 돌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어이없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오나라의 배가 작아서 말 수백 필 가운데 고작 80필밖에 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신단은 많은 말들을 항구에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배에 허둥지둥 탑승하여 오나라를 향해 출항하였다. 서안평의 항구에는 갈 곳을 잃고 배회하는 말들과 멀어져가는 오나라 선단을 멍하니 지켜보는 고구려 사람들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손권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첫 번째 고구려 방문 외교는 이처럼 희한한 해프닝들 속에 막을 내렸다. (3회에서 계속)

 

안정준 팩트체커는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안정준   kyuri21@naver.com  최근글보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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