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프로 야수-투수-야수 거쳐 다시 독립리그 선수·코치로...가타야마 히로시의 야구인생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9.03.26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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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일본 독립리그인 베이스볼챌린지(BC)리그는 서울 목동구장에서 한국 선수들을 상대로 트라이아웃을 열었다.

관계자들 가운데 한국 방문이 낯설지 않은 이가 있었다. 사이타마 연고의 무사시 히트베어스의 가타야마 히로시(32) 코치였다. 가타야마 코치는 2005년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일본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일본 베이스볼챌린지리그 가타야마 히로시 코치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이 대회 결승 한일전은 당대 최고의 강속구를 자랑하던 한기주와 쓰지우치 다카노부의 맞대결로 아직까지 회자된다. 한국 대표팀은 4-2로 앞선 9회말 1사에서 투런 홈런으로 동점을 내줬다. 일본의 고지마 히로키는 10회말 안산공고 2학년이던 김광현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우승을 확정지었다.

가타야마는 호토쿠학원 시절 4번 타자 겸 왼손 에이스로 명성을 날렸다 고교 통산 36홈런을 때려냈고 고교 3학년 시절 고시엔 효고현 예선에서 삼진 17개를 잡기도 했다. 2005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돼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입단했다. 1군 데뷔는 2008년으로 비교적 늦었다. 하지만 이해 7월 2일 지바 롯데 마린스를 상대로 1군 첫 승리를 완봉승으로 장식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2010년부터는 구원 투수로 전업해 라쿠텐의 주력 불펜 투수로 활약했다. 2013년 라쿠텐이 창단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부상으로 일본시리즈에 뛸 수 없었다. 부상 때문에 2014년 이후엔 제대로 뛰지 못했다. 한 차례 야수 전환을 시도한 끝에 2017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지난해부터 BC리그 무사시로 옮겨 코치 겸 선수로 뛰었다.

청소년대표부터 독립리그 코치까지. 그의 야구에 대해 물었다. 인터뷰는 야구 칼럼니스트 서영원씨가 맡았다.

- 소속팀 무사시의 성적이 지난해엔 그다지 좋지 못했다. 투타 모두 좋지 않았다. 한국 트라이아웃에선 어떤 선수를 찾았나.

“역시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와 파워가 있는 타자다. ‘한국 야구’하면 파워 히터에 대한 인상기 강하다. 그리고 소속감, 야구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는 선수를 원한다. 경기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멘탈이 강한 선수였으면 좋겠다.”

- 한국 방문은 오랜만이다. 2005년 아시아청소년대회 이후 처음 아닌가. 그때 일본 대표팀이 매우 강했다. 안에서 볼 때는 어떤 팀이었나.

“대단했다. 또래 나이대에서 잘하는 선수는 다 모였으니. 모두 고시엔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이 합류했다. 유명한 선수들이 한 팀에 모여 서로에게 배우려고 했던 건 정말 좋은 추억이다. 대표팀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니 구종 등 기술 공유도 자연스레 이뤄졌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나도 뒤처지지 말아야지’라는 마음이 정말 강했다. 하나의 목표를 놓고 선의의 라이벌들과 교류를 통해 발전했던 경험이었다.

- 당시 한국 대표팀에는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류현진(LA 다저스), KBO리그 에이스 김광현(SK) 등이 있었다. 당시 한국 대표팀에 대한 느낌은.

“가장 인상 깊었던 선수는 김광현이었다. 대단했다. 나보다 한 살 아래로 알고 있는데, 고교 2학년 레벨에서 파워와 변화구가 상당했던 왼손 투수였다. ‘이렇게 던지는 투수가 있구나’ 싶었다. 앞으로 국제대회에서 엄청난 활약을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이후 한국과 일본의 국제대회 경기에서 어김없이 선발 투수로 나와 좋은 활약을 했다.”

- 고교 졸업 뒤 라쿠텐에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했다. 하지만 루키 시즌에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부상 때문으로 알고 있는데 고교 시절 무리가 있었던 걸까.

“부상 탓은 아니었다. 고교 시절 투수로 부각됐지만 원래 야수로 입단했다. 투수와 야수는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고 훈련 방법도 다르다. 그래서 준비 기간이 길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투타 겸업이었지만 고교야구라서 가능했다. 프로 레벨에서는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하나를 선택해 집중해야 했다.”

- 프로에서도 불펜 투수로는 준수했다. 매일 대기해야하는 불펜의 긴장감을 어떻게 극복했나/

“일본 야구는 매뉴얼과 시스템이 중요하다. 경기가 이기는 방향으로 가면 A투수 다음에는 B투수, 그 다음에는 C투수라는 식으로 미리 정해져 있다. 자연스럽게 내 차례는 온다. 솔직히 내 차례가 온다는 게 두려웠다. 투수의 컨디션은 늘 같을 수 없다. 공 몇 개를 던지더라도 100% 상태가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사람마다 극복하는 방법은 다르다. 하지만 긴장감 때문에 마운드에 서기 싫을 때도 있었다.”

- 데뷔전 첫 삼진을 히로시마의 강타자 가네모토 도오아키에게 잡았다. 프로 첫 승리는 완봉승이었다. 그때 감동을 말해준다면.

“아무래도 완봉승을 거둔 2008년 지바 롯데 기억에 크게 남아 있다. 포수 사인대로 던졌다. 다행히 포수가 원하는 지점에 공이 박혔다. 그 경기는 0-0으로 팽팽하게 진행됐다. ‘여기서 맞으면 안 된다’는 긴장이 있었다. 그렇게 던지다 보니 경기가 끝나 있었다. 운이 좋았다. 포수를 믿고 던진 게 통했다. 완투나 완봉은 매우 어렵다. 경험이 많지 않았던 상태에서 해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운이 좋았다.”

- 라쿠텐 입단 뒤 야수로 전환했다 다시 투수가 됐다. 고교 시절엔 홈런 타자이자 삼진을 많이 잡는 투수였지만 포지션 변경에 어려움은 없었나.

“크게 어렵진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치고 던지는 걸 기본적으로 했다. 중요한 건 던지든, 치든 ‘프로로서의 감각’이다. 이 점이 어렵다. 프로 레벨의 강속구를 잘 봐야 하고 맞출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쳐내야 한다. 다시 투수로 전환했을 때는 팀 상황이 있었다. 마침 동료 왼손 투수가 부상을 당했다. 내가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였다. 코칭스태프에게 강력하게 어필했는데 허락을 받았다. 팀에 보탬이 될 수 있어 기뻤다. ”

- 2013년 라쿠텐은 정말 강한 팀이었다. 창단 뒤 첫 우승을 차지했고, 다나카 마사히로, 노리모토 다카히로, 미마 마나부 등 투수들이 대단했다. 무적의 팀에서 뛴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

“타자들도 강했다. 몇 점을 내줘도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어떤 팀을 상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팀은 내부 주전 경쟁이 더 무섭다. 한 타석이라도, 1이닝 수비라도 나가고 싶어서 모든 선수가 덤벼들었다. 그 흐름에 맞춰 훈련하지 않으면 안됐다. 경쟁에서 이긴 선수들이 뛰니 경기력이 강했다. 오카지마라는 선수는 모든 포지션 글러브를 다 챙겨서 각 위치에서 수비 훈련을 했다.

그해 다나카는 26연승을 했고 노리모토의 투구도 훌륭했다. 기세를 탄 팀에서 최고 레벨의 선수가 제 기량을 발휘하니 무서울 팀이 없었다. 하지만 내부 분위기를 표현하면 ‘살아남으려고 하는 의지’였다. 내부 경쟁으로 한 시즌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선수 기량이 상승한다. 이런 팀은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고시엔 스타 출신이다. 최근 일본에선 투수의 150구 완투 등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일생에 한 번뿐인 고시엔이니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선수 생명을 위해 제한돼야 하나.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선수는 부모를 설득해 고교까지만 야구를 한다. 또 어떤 선수는 프로 입단까지 생각한다. 입장 차이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다를 것이다.”

- 부상을 자주 당하는 선수에게는 어떤 조언을 하나.

“개인 훈련과 자기 관리에 조금 더 신경쓰라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방식으로 훈련했을 때 고통이 있다면 피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건 내 스타일’이라고 밀어붙이는 경우가 있다. 쉬는 것도 훈련이다. 자신만의 쉬는 방법을 찾으라고 한다.”

- 무사시 구단의 연고지는 사이타마다. 이 지경에는 퍼시픽리그의 세비우가 있다. 무사시는 팬들에게 어떤 야구를 보여주고 싶나.

“특별히 프로 팀을 의식하진 않는다. ‘다른 야구’를 한다는 생각도 없다. 늘 승리를 추구하고 멋진 플레이와 열심히 하는 태도를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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