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의 '이승만과 신탁통치' 강연 대부분 틀렸다

  • 기자명 임영대
  • 기사승인 2019.03.28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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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에서는 2019년 1월 5일부터 3월 28일까지, 매주 토요일에 <도올아인 오방간다>라고 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총 12화로 편성, 방영하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한국사를 제대로 돌아보고자’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주요 진행자였던 철학자 도올 김용옥 한신대학교 석좌교수는 한국 현대사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청중들 앞에서 소개했는데, 10화까지는 별 논란이 없었으나 11화는 방영 이후에 일부 언론이 보도하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논란의 중심에는 ‘이승만과 김일성이 모두 미국과 소련의 괴뢰였다’느니, ‘국립묘지에 묻힌 이승만의 시신을 파내야 한다’느니 하는 과격한 표현이 있었다. 여기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견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특정 인물을 대하는, 또는 사건이나 사상을 취급하는 시각은 해당인의 성장 과정과 지식, 경험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비추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같은 사실에 대한 평가의 차이로서 나타나는 결과여야 한다. 특정 인물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해석이 둘로 나뉠 수는 있다. 하지만 실제로 범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고 기술하거나, 전혀 다른 의도로 실행한 게 명백한데도 그와 다른 해석자 본인의 해석을 추가하여 해당 인물이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언론이 주목한 ‘이승만을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경우, 김용옥은 이승만이 범한 여러 과오를 거론함과 함께 ‘4.19혁명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거부당한’ 지도자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승만이 많은 과오를 범했으며 국민의 뜻으로 권좌를 떠난 독재자였음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여기에는 문제가 없다. 이승만에게 과오는 있으나 공을 인정하여 그대로 둘 것인가, 과오를 덮을 만한 공적이 없으므로 이장할 것인가는 가치판단의 영역이다.

하지만 해당 프로그램의 나머지 부분에서 다루는 내용은 어떨까? 이 글에서는 도올 김용옥이 방송에서 말한 내용의 사실관계가 맞는지를 팩트체크한다.

①김일성·이승만은 소련과 미국이 의도적으로 데려온 괴뢰?

→이승만은 미국 정부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했다

<도올아인> 11화 서두에서, 김용옥은 항일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소련으로 넘어간 김일성의 약력과 미국에서 학업을 수행하고 주로 외교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이승만의 약력을 짧게 소개하면서 이들 두 명 모두가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장악을 위해 선택된 퍼핏(puppet), ‘괴뢰’라는 주장을 펼쳤다.

김일성의 경우에는 소련에 의해 선택된 존재가 맞다. 김일성에게는 보천보 전투 등의 항일 게릴라 활동으로 인해 부풀려진 명성이 있긴 했으되, 국내외 다른 좌우익 지도자들을 압도할 만한 실적이나 존재감은 없었다. 정권을 잡은 뒤에는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통해서 북한 정권에 대한 외부 개입을 차단하고 확고한 독재 정권을 세웠지만, 처음에 권좌에 앉을 때의 김일성은 소련의 후원이 없으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는 괴뢰가 맞았다.

하지만 이승만의 경우에는 전혀 상황이 다르다. 김용옥은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였고, 이에 맥아더가 군정장관 하지를 자신이 있는 도쿄로 불러 이승만을 만나게 하면서 미군 비행기로 귀국시켜 해방정국에 참여시켰으므로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라고 했다. 과연 그 견해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의 괴뢰’라는 표현이 적절성을 찾으려면, 극동군 사령관으로서의 맥아더 개인뿐 아니라 미국 정부에서도 이승만을 지지하고 서둘러 한국에 보내려고 움직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 당시 상황을 보면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후술하겠지만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소련과 함께 신탁통치하기로 이미 방침을 정해 놓았다. 하지만 이승만은 한참 전부터 반소, 반공적인 태도가 명확했으니 당연히 껄끄러운 존재였다.

경향신문 1995년 1월 1일자 기사 '서울 워싱턴 비화 50년 -이승만 환국' 캡처

당연히 이승만의 한국 귀환부터가 미국 정부의 ‘선택’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처음부터 미국 정부에 자신을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해외에 있는 여러 독립운동 세력 중 누가 먼저 귀국하는가는 아주 중요한 이슈였고, 이승만은 그 점을 잘 알았다. 이승만이 한국에 돌아가려고 처음 시도한 건 1945년 8월 10일부터다(경향신문 1995년 1월 1일자 기사 '서울 워싱턴 비화 50년 -이승만 환국'). 미국 합참의장 조지 마셜 원수(마셜 플랜을 입안한 그 사람이다)에게 “아무런 정치적 의미 없이 미국에 협력하기 위해 미군과 함께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시점은 미국이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지조차 결정되지 않은 때였다.

마셜 원수는 23일이 되어서야 “미군은 미국 시민만 동반할 예정임”을 밝히면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는 이승만의 요청을 거절했다. 미군의 한반도 진주는 27일에 정식으로 발표된다. 이승만이 정식으로 한국에 들어오려면 국무부의 출국허가 외에 합동참모본부의 입국허가도 필요했다. 이승만은 미군 내에서는 어느 정도 끈을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이쪽을 통한 출국도 추진하고 있었는데, 국무부 극동국장은 국무장관에게 28일 자로 이런 보고를 올린다.

"이승만의 귀국에 미군 장교를 동반할 경우 이른바 ‘한국임시정부’를 장래의 한국 정부로 인정한다는 암시를 줄 수 있으므로 이에 반대함."

이 보고로 인해 이승만이 따로 추진하던 입국 계획은 취소된다. 국무부는 9월 24일에도 또 합참 측이 발급한 입국허가서에서 이승만의 신분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 고등판무관」’으로 되어 있는 점을 문제 삼아 출국 허가를 거절했다. 결국, 합참에서는 이승만의 신분을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 시민’으로 바꾸는 데 동의했다. 국무부에서는 그 동의를 얻어낸 뒤에야 9월 27일 자로 이승만의 출국 허가를 내주었다. 더구나 국무장관에게 올라간 11월 11일 자 국무부 극동국장(그동안 교체됨)의 보고를 보면, 이승만을 임시정부 요인으로 대우한 합참의 조치는 합참의 공식 입장도 아니었다. OSS 활동에서 이승만과 연을 맺은 굿펠로우 대령의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인 호의였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은 10월 4일에야 미군 군용기 편으로 워싱턴을 출발, 10월 12일이 되어 도쿄에 도착한다. 이후 13일에 처음 맥아더를 만나게 되는데, 이때도 워싱턴에 있는 육군부(당시 미국에는 통합된 국방부가 없이 육군부와 해군부가 별도로 존재했다)에서는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어떤 정파의 공인된 대표로 취급받아서는 안 됨. 국무부는 그의 귀국을 승인한 조치가 한국인들에게 미국이 그와 그의 일파를 지원한다는 인상을 줄 것을 우려하고 있음.

하지만 맥아더와 하지는 이승만을 유력한 지도자로 보아 후대했고, 이승만은 10월 16일에 맥아더의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군용기 탑승을 위한 형식상 계속 입고 있던 미군 군복을 입은 채였다.

김용옥은 이승만이 “미국 정치인들과의 좋은 관계를 바탕으로 귀국했으며, 한국을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한 괴뢰”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상의 상황을 보면 이승만에게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줄 정치인 한 사람이 없었다. 오직 OSS에 한국인 특공대원을 제공하는 과정에 개인적인 친분을 맺은 군인 몇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이 과정을 임시정부가 환국하지 못한 데 대한 김용옥의 지적과 비교해보자. 김용옥은 광복 다음 날 바로 입국했어야 할 임시정부가 미 군정의 거부 때문에 개인 자격으로 입국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환국한” 이승만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승만도 처음에는 “임시정부 고등판무관”의 직책을 그대로 유지한 채 환국을 시도하다가 거절당했고, 개인 자격으로 바꾼 뒤에야 환국했음은 거론하지 않는다. 또한,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 역시 미군 수송기로 귀환했음도 역시 언급하지 않는다. 김구가 환영 없이 귀국했다고 하지만, 이승만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도 환영하는 인파는 없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들의 입국 문제를 군정장관 하지와 교섭한 당사자가 바로 이승만(1975년 1월 20일자 경향신문 '비록 한국외교 <4> 건국전야 ③)이었음도 거론하지 않는다.

양자가 귀국하는 시점이 달라진 원인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미국 정부의 방침을 얼마나 빨리 받아들였나 하는 점밖에 없다. 만약 임시정부가 임명한 주미 고등판무관 직위를 버리기를 거부했다면, 이승만 역시 10월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이승만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복잡한 과정을 소련군 복무 중에 소련군 당국의 ‘간택’을 받아 북한 지도자로 내세워진 김일성의 사례와 똑같이 취급하여 <미국에 의해 선택된 괴뢰>라고 간주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승만은 해방 당시 실제로 많은 한국인이 지지하던 지도자였다. 잡지 선구(先驅)가 1945년 12월에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승만은 431표로 대통령 후보 1순위를 차지했다. 293표로 2위 자리에 오른 김구, 78표로 3위가 된 여운형의 득표수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아직 귀국하지 않은 9월에도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기도 했고, 조선공산당이 잠깐이기는 해도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독립촉성위원회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이는 미국이 일부러 선택하지 않더라도 이승만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인지도만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승만이 정말 미국을 위한 괴뢰였다면, 환국한 후에도 계속 미국의 방침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철저히 자신의 판단에 따라 움직였다. 김용옥이 방송 중에 표현했듯, “정말 훌륭한 역량을 가졌으면서도 이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이 정한 방침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신탁통치 문제다.

 

② "찬탁은 합리적 사유의 인간, 반탁은 변통을 모르는 꼴통의 인간"

→당시 복잡한 한반도 정세를 단순화하고 일부를 악마화하는 오류

<도올아인> 11화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여타 언론에서는 전혀 주목하지 않은 파트가 바로 신탁통치 오보사건이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미국-소련-영국 세 나라 외무장관이 모여서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었는데(모스크바 3상회의), 여기에서 한국을 미・영・중・소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안이 가결되었다.

한국 문제에 대한 연합국 간의 공식적 논의는 1943년 11월에 열린 카이로 회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미국, 영국, 중국은 장차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킨다고 선언했다. 그 다음으로 한국 문제가 논의된 때는 바로 며칠 뒤에 열린 테헤란 회담이다. 중국의 장제스 대신 소련의 스탈린이 참석한 이 회담 주제는 대독전 수행이었으나, 이때 루스벨트는 한국은 40년 정도는 신탁통치를 받아야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의사를 스탈린에게 따로 전했다.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도 한국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없었다. 독일이 항복한 지 3개월 뒤에는 소련도 대일전에 참전한다는 합의가 들어갔을 뿐이다. 다만 루스벨트에 의해 테헤란에서처럼 스탈린에게 비공식적인 언급이 전해지기는 했다. 역시 한반도에는 신탁통치가 필요하리라는 견해였고, 그 기간은 이제 50년으로 늘어났다.

한국 독립의 결정적 보장은 1945년 7월 26일에 나온 포츠담 선언이었다. 여기서는 한국을 별도 항목으로 다루진 않았으나, 전체 13항 중 8항에서 ‘카이로 선언의 실행’을 명시함으로써 한국이 독립할 대상임을 명확히 했다. 다만 구체적인 실행 조치는 없었다. 바로 이 구체적인 실행 조치를 결정하고자 마련된 자리가 모스크바 3상 회의였다. 여기에서 결정된 5년간의 신탁통치 결정이 한반도에서 엄청난 후폭풍을 초래하게 되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찬탁과 거부하는 반탁 간에 엄청난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신탁통치(信託統治)란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는 집단을 다른 국가가 맡아서 유엔 총회 및 신탁통치 이사회의 감독을 받아 대신 통치해 주는 제도다. 유엔 헌장 제12장, 《국제신탁통치제도(75조~85조)》와 제13장, 《신탁통치이사회(86조~91조)》에서 그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이 합의는 12월 27일 자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서 처음 국내에 알려졌다. 문제는 이 보도가 신탁통치를 소련이 제안했고 미국은 즉각 독립을 주장했다고 잘못 보도한 것으로, 이 오보로 인해서 찬탁과 반탁을 놓고 정치적 격돌이 심화되었다.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고 큰 제목으로 기사가 나갔다. 이 기사는 1946년이 되어서야 오보로 판명이 났다.

김용옥은 중도파인 여운형을 누르고 해방 정국의 분위기를 우파가 주도하려 모의한 한민당 세력이 이 오보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나, 이 오보는 동아일보의 창작이 아니었다. 미국의 UP, AP 통신이 12월 25일 자 기사에서 “번즈 국무장관이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되는 즉시 독립안을 주장하라는 훈령을 받고 러시아로 갔다 (Secretary of State Byrnes went to Russia reportedly with instructions to urge immediate independence as opposed to the Russian thesis of trusteeship.)”는 기사를 먼저 냈고, 국내 언론은 이를 번역해 27일에 보도했을 뿐이다. 이 보도가 공식적으로 오보로 밝혀진 때는 소련 타스 통신이 상세한 회담 경과와 ‘신탁통치를 원래 제안한 건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1946년 1월 24일이다.

문제는 처음에는 반탁 대열에 동참했던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진영이 공식적으로 오보 여부가 밝혀지기 전인 1월 2일부터 찬탁으로 태도를 바꾼 것이다. 확실하게 오보가 밝혀지기 전이었으므로 찬탁은 소련의 편을 들어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졌고, 우익 진영과 좌익 진영이 극렬하게 대립하는 계기가 된다. 이승만 역시 반탁 진영에 섰다.

김용옥은 이 ‘신탁통치 오보사건’이라는 ‘가짜뉴스’로 인해 좌우익이 분열되고 찬탁 세력이 악마화되었으며 이후 70년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찬탁 세력은 "합리적 사유의 인간"이고 반탁 세력은 "변통을 모르는 꼴통의 인간"으로 규정한다. 길어야 5년이면 끝났을 신탁통치를 전 국민이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분단과 전쟁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유엔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한 나라는 우리 말고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 공통점이 있다.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패한 패전국의 식민지였다는 점이다.

 

국명

원 종주국

신탁통치(위임통치) 

수임국 및 개시연도

독립연도

카메룬

독일제국

영국, 프랑스 분할(1922년)

1960

토고

1960

탄자니아

영국(1922)

1961

르완다

벨기에(1919)

1962

부룬디

1962

사모아

뉴질랜드(1920)

1962

나우루

오스트레일리아(1920)

1968

파푸아뉴기니

1975

마셜 제도

일본제국(1919), 미국(1947)

1986

미크로네시아 연맹

1990

팔라우

1994

북마리아나 제도

미국령 존속

소말리아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공화국(1950)

1960

* 영국령 토고는 가나에 병합

* 영국령 카메룬의 일부는 나이지리아에 병합

* 소말리아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가 독립 후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합병하여 형성

 

이탈리아령 소말리아를 제외한 모든 “신탁통치령”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구 독일제국의 식민지였다. 이 식민지들은 어느 강대국의 영향권에 가까이 있는가에 따라 국제연맹에 의해 위임통치되었는데, 실질적으로는 위임받은 국가의 전리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국제연합으로 넘어오고 식민지 통치권의 위임에 불과했던 위임통치가 독립을 준비하는 과정인 신탁통치로 바뀐다. 이 과정을 거쳐 대부분의 신탁통치령은 실제로 독립을 이루었고 김용옥도 이를 근거로 하여 찬탁이 옳았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견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에 있던 여러 신탁통치령도 위의 표에서 보듯이 1960년대로 접어들고서야 독립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5년이라는 시한부로 신탁통치를 한다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지만, 약속대로 5년 뒤에는 신탁통치가 종료되리라는 확증은 어디도 없었다.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들의 약속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한국인들은 대한제국의 멸망과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통해서 충분히 체험한 뒤였다.

둘째, 과연 신탁통치가 제대로 시작이나 될 수가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다. 신탁통치 제안은 점령국인 미국과 소련이 협의를 통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이 임시정부가 한반도를 통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협의해야 할 미소공동위원회는 1차 회의를 열자마자 임시정부 구성 문제로 난관에 봉착했다.

소련은 반탁세력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임시정부에서 우익세력을 배제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대신 과거에 반탁운동을 했더라도 추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양해하겠다고 했는데, 미 군정 측이 이승만과 김구에게 압력을 가해 여기 서명하게 만들면서 서명이 곧 찬탁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아줬다. 그러자 소련은 이 문제로 다시 트집을 잡아 결국 회의를 결렬시켰다.

셋째, 과연 미소 양국이 합의한다고 해서 남북이 단일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김용옥 자신도 프로그램 말미에서 한 방청객이 ‘신탁통치가 유발할 수 있는 문제점은 없나?’하고 묻자 과연 단일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을지 자신도 회의적임을 인정했다. 김일성과 이승만이 각자의 기반을 이미 구축한 상황에서, 자신이 얻은 것을 내놓을 리 없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이미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해(1946.2.9.) 북한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심지어 소련군은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중앙 군사력인 보안대까지 창설하였다(1945.10.21.). 소련군정은 1946년 2월 15일부로 끝났으므로, 이 모든 힘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 김일성의 손에 공식적으로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그런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 군정당국은 신탁통치에 방해가 되는 김구의 임시정부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고,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로 들어가고서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조직(1946.12.12.)하여 한국인들을 상대로 민주주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보안대와 흡사한 군사조직인 경찰예비대(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도 북한보다 훨씬 늦었다(1946.1.15.). 더구나 미 군정당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 출범하는 그때까지 남한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있었고 이승만에게는 확실한 힘이 없었다. 양자의 차이는 명백하다.

이런 점들을 돌아보면 김용옥의 정의처럼 찬탁과 반탁을 '합리적 사유'와 '변통을 모르는 꼴통'으로 간단히 규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냉전구도가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줄곧 반공・반소・반탁 입장을 견지하던 이승만이 과연 미국에 의해 ‘선택’된 괴뢰일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③ '괴뢰' 이승만은 정부 수립 후 미국 방침에 따랐다?

→ '애치슨 선언'으로 개입하기 싫어하는 미국과 달리 북진통일 추진

김용옥은 신탁통치 논란 이후 이승만의 행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11화에서 언급한 견해인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인가?’라는 주제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기에 간략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승만이 미국의 괴뢰였다면 이승만은 미국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였어야 한다. 음모론적인 견해를 배제하고 당시 미국 정부와 의회가 표한 방침을 보면, 2차 세계대전으로 지친 미국은 가능한 해외 사태에 개입을 삼가면서 평화를 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미국은 중국 내전에도 개입하지 않고, 주한미군도 모두 철수시켰으며, 애치슨 선언으로 아시아에서 자신들이 개입할 한계선을 규정해두었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은 미국 정부가 원하는 바와 정확히 반대로 행동했다. 소련을 자극하지 않고 평화를 누리며 군비 지출을 줄이기를 원하는 미국 정부를 향해서 보다 많은 군사원조를 요구하고, 북진통일을 대놓고 주창했다.

이승만의 북진 시도가 소련을 자극하지 않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당한 열강의 침략(간섭전쟁)과 불가침조약까지 맺었던 독일의 침략은 소련을 외부의 위협에 극도로 민감하게 만들었다. 결렬 전 열린 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임시정부에 참여할 대상을 논의할 때도 소련 대표단은 찬탁 여부도 중요하지만, 소련 공격에 나설 수 있는 반소주의자는 절대 참여시킬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래서 미국은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전투용 항공기나 전투함, 전차, 대구경 야포 같은 장비는 하나도 넘겨주지 않았다. 당시 한국군 병력은 10만에 달했는데, 개인장비는 6만5000명 분량밖에 없었다. 애초 한미가 <한미 상호방위 원조협정>으로 합의한 병력 규모가 6만5000명이고, 10만은 이승만이 멋대로 늘린 숫자였기 때문이다. 미국이 장비를 주지 않으니 나머지 병력은 패망한 일본군이 두고 간 성능 떨어지는 일본제 총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공개적인 북진통일론은 미국이 한국 정부를 꺼리도록 만들었고 한국이 국방력을 강화하지 못하게 했으며 훗날 북한이 남침을 실행했을 때 ‘실은 이 전쟁은 이승만이 먼저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만드는 명분을 제공했다.

이승만이 미국의 의도에 어긋나게 행동한 사례는 이게 마지막이 아니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이승만은 수시로 미국과 충돌했다. 휴전협정 체결을 반대하고 북진통일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반공포로를 석방해 휴전협상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런 이승만과의 트러블에 진절머리가 난 미국은 유엔군 병력을 동원하거나 한국군 장교단에게 쿠데타를 일으키게 해서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과연 이승만이 미국이 고른 괴뢰라면 이런 양상들이 왜 나타났을까?

 

1945년 만주 뤼순의 해군 기지를 점령한 소비에트 연방 해군 장병들. 출처: 위키피디아

④ 소련은 일본에 터진 원자폭탄을 보고 대일 전쟁에 참여했다?

→ 얄타회담에서 이미 참전 선언...45년 8월 대규모 병력으로 만주국 침공.

다른 언론에서는 별로 논란거리로 삼지 않은 부분이지만,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관련해서도 사실과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

김용옥은 소련이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 두 발의 위력을 보고 난 뒤에야 일본과의 전쟁을 결정했다고 했다. 원자탄에 맞은 일본은 곧 항복할 것이므로 일본과의 전쟁은 ‘거저먹기’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첫째, 위에서도 적었는데 소련은 이미 얄타 회담에서 ‘독일이 항복하고 3개월 후’에 일본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은 5월 9일에 정식으로 항복했으니,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8월 8일에 소련이 일본을 공격한 것은 얄타 회담에서 한 약속을 지킨 일일 뿐이었다.

둘째, 스탈린은 이미 미국의 원자탄 개발 성공 및 그 위력에 대해 알고 있었다. 원자폭탄 개발진 내에는 소련 첩보망이 침투해 있었고, 소련은 여기서 얻은 정보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핵무기를 만드는 중이었다.

셋째, 그런 결정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소련은 극동에 배치되어 있던 전력만 가지고 일본을 공격한 게 아니다. 독일이 항복한 후, 독일 전선에서 경험을 쌓은 정예병력과 이들이 운용할 각종 장비가 동쪽으로 이동해서 재배치되었다. 만주 공격에만 160만에 달하는 병력과 5천 대를 넘는 전차와 자주포, 2만7천 문이나 되는 포, 4천 대 가까운 각종 항공기가 투입되었으며 이들은 3개월에 걸쳐 유럽에서 극동으로 이동했다. 전쟁을 시작하려는 확실한 의도가 없다면 이런 대규모 병력을 옮기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원자탄 사용이 소련을 서두르게 했을 것은 확실하다. 스탈린은 소련 참전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 소련이 아무 전리품도 얻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미 다 계획해놓은 일정을 다소 당긴다는 의미지, 원자탄의 위력을 보고서야 원래 할 생각도 없었던 일본과의 전쟁을 결심했다는 건 지나친 억측이다.

김용옥은 분명 대단한 석학이다.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학자, 사상가라고 해도 정말로 모든 분야의 지식을 알고 있을 수는 없다.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하여 심사숙고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김용옥은 이번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부문만 아는 것은 악이며 전체를 알면, 자신의 무지를 알면 악이 사라진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두 차례나 인용했다. 진실로 옳은 말이라 하겠다.

필자 임영대는 역사작가다. 역사를 주된 주제로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는 둥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한국전쟁 전략, 전술, 무기>, <서프라이즈 세계 역사 미스터리> 등의 역사 교양서와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 등의 소설을 썼다. 2019년에는 <월간 독립기념관>에서 <역사를 만든 사람> 코너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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