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자드는 정말 PC(정치적 올바름)와 페미니즘 때문에 망했나

  • 기자명 박현우
  • 기사승인 2019.04.0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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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가 블리즈컨에서 <디아블로 4> 정도는 공개할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을 때, 블리자드는 중국 회사 넷이즈와 공동개발하는 <디아블로 이모탈>을 공개했다. <디아블로 이모탈> 이후 블리자드의 주가가 곤두박질쳤고, <폴아웃 76>을 출시한 베데스다와 함께 조롱거리가 됐다. 블리자드는 <디아블로 이모탈> 유튜브 트레일러에 달린 비추 폭탄을 무마하고자 동영상을 지웠다가 다시 올리기도 했고, <오버워치> 대회인 ‘오버워치 컨텐더스’를 관전하며 채팅을 남기기 위해서는 블리자드 계정과 연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해외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블리자드와 베데스다가 서로 누가 더 잘 망하는지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PC 게이머들은 더 큰 화면으로 더 풍부한 화질의 게임을 즐기고 싶어하고, 설령 자신의 PC로 플레이하고 싶은 게임을 플레이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몇 십, 몇 백만원을 들이더라도 하나의 게임을 위해 새로운 컴퓨터를 장만한다. 이런 PC 게이머들은 모바일 게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기본적으로 화면이 작고, 퍼포먼스는 PC에 비할 바가 못해서 스마트폰 전용의 모바일 게임들은 화질이 낮고 볼륨이 소박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블리즈컨에 참석한 하드코어 PC 게이머들은 모바일 게임 따위를 기대하지 않았다. 블리자드가 블리즈컨이 있기 몇 개월 전부터 <디아블로> IP의 새로운 게임을 출시할 거라면서 기대를 높여왔는데, 모바일 게임으로 그런 포부를 펼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리자드 본인들만 빼고.

놀랍고 신비하게도 블리자드는 게이머들의 당연한 마음을 읽지 못했다. 게이머들이 충격 받은 이유는 모바일 게임을 공개하면서 사람들이 호응할 거라고 기대한 블리자드의 안일한 판단력 때문이다. 넥슨, 넷마블, 엔씨를 그럴 수 있지만, 블리자드는 그러면 안되는 존재였기에 게이머들은 더 크게 실망했고 상처 받았다. <디아블로 이모탈> 사태 이후 블리자드의 주가는 급격하게 떨어졌고 게이머들은 블리자드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있다. 블리자드가 이렇게 된 이유가 PC 때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 블리자드가 예전만 못하다는 주장은 그럴듯하다. 나 역시 블리자드가 예전만큼 훌륭한 게임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원인을 블리자드가 추구하는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에 두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한국의 수많은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디아블로 이모탈>의 예고편에서 아시안 여성 마법사가 남성 야만용사를 구해주는 것을 두고 ‘메갈이네’라며 비난했고, 블리자드의 게임 <오버워치>의 솔져76-짐 모리슨이 동성애자라는 게 알려지자 PC 때문에 블리자드가 망했다는 진단을 내놓았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실바나스가 나이트엘프 진영의 소중한 무엇을 불태웠을 때도 실바나스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같은 진단을 내놓았다. 블리자드에 “PC충”과 “메갈”이 유입되어 블리자드가 이 사단이 났다고 주장하는 것.

<스타크래프트 2> 사라 캐리건은 게임 막판 신적 존재가 되어 아몬을 처치했다.

흥미로운 것은 블리자드의 명성이 두터웠을 시절, <스타크래프트 2>의 여성 캐릭터 케리건이 신적 존재가 되어서 데우스 엑스 케리건하며 빌런 아몬을 해치웠을 때도 여성이 대단한 존재가 된다는 것만으로 ‘또 PC냐’며 같은 종류의 비판이 있었다는 거다. 하지만 그때는 <블리자드 이모탈> 발표 전이었기에 “이러니까 블리자드가 망하는 거다”라는 진단이 나오지는 않았다. 즉, 짐 모리슨의 성 지향이나 실바나스의 행태를 근거로 ‘PC 때문에 블리자드가 망했다’라고 주장하는 건 대단히 편리한 주장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블리자드가 <디아블로 이모탈> 때문에 시총이 박살나고 이미지도 예전만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망하지 않았고, PC 때문에 망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발표한 2018년 4분기 매출은 일반회계기준(GAAP)으로 23억 8,100만 달러(한화 약 2조 6,735억 원)을 기록하며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서 약 3억 달러가 증가했고, 영업 이익은 6억 9,400달러로 2017년보다 세 배 이상 올랐다. 또, <오버워치>는 한국 PC게임 검색어 순위에서 여전히 10위권이다.

블리자드라는 박스를 벗어나 게임판 전체를 보더라도 PC 때문에 게임이 망한다거나 하는 기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전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하고 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의 바루스는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로 바뀌면서 호모포비아들의 분노를 샀지만 그럼에도 왕좌를 지키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최근에 출시한 <에이펙스 레전드>에는 동성애 캐릭터와 흑인, 여성 캐릭터들이 대부분이지만 이런 노골적인(?) PC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게임판만 이런 건 아니다. 여성 인권을 다루고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어떤 회사가 망해야한다면 구글, 애플, 넷플릭스, 나이키, 질레트, 페이스북 등은 진작에 망했어야했다. 하지만 이 기업들은 정책이나 광고를 통해 PC를 추구한다고 당당히 밝혔음에도 딱히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입장을 보임으로써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그동안 사회에서 배척되고 소외됐던 존재들을 한 명의 인간으로 인정해주는 제스처였기 때문이다.

PC가 사회의 큰 화두가 된 만큼 PC하면 흥한다느니, PC하면 망한다느니 하는 다양한 주장들이 업계에 존재한다. 하지만 PC하다고 반드시 흥행하는 것도 아니고, PC하지 않다고 장사가 안되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해도 콘텐츠 그 자체가 재미를 보장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묻히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콘텐츠가 그 자체로 충분히 재미있으면 다소 문제적인 부분이 있더라도 시장에서는 여전히 소비된다. 하나의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소비자가 있는가하면, 정치적 올바름이란 요소를 신경쓰지 않는 소비자들도 그만큼, 혹은 더 많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콘텐츠나 회사가 망했을 때 ‘정치적 올바름을 지지해서 망했다’라고 지적이 나오는 이유는 정치적 올바름이 보호하고 지지하고자 하는 약자와 소수자들이 여전히 혐오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망함’의 정확한 원인 분석을 하지 않고, ‘사소한 것’을 지키려다 ‘큰 것’을 잃었다는 주장하면서 PC를 지적하는 경우는 많은 분야에서 관찰된다. 저 먼 나라 중국에서는 집안이 망하는 이유로 ‘가장의 무능’ 대신 ‘암탉의 울음’을 들었고, 클린턴이 트럼프와 대선에서 붙어서 패배한 이유로 많은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적했다. 페미니즘 한다고 돈 없는 블루 칼라 백인 남성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이 사단이 났다고 주장하는 거다. 

한국 정치판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정치, 문화, 경제, 건축, 예술 등 전분야에 있어 모르는 게 없는 한국의 많은 정치비평가들은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을 두고 문재인 정부가 페미니즘을 지지했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2017년 2월, 문재인 당시 후보는 대통령 선거 때부터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라면서 성평등 공약을 발표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었고, 이후에도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지율이 떨어지면 그 원인은 페미니즘으로 지목된다. 그때는 문제되지 않았던 게 지금에와서는 갑자기 문제라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애초에 페미니즘이 문제였다면 당선도 힘들었어야되는 거 아닌가? 낮은 지지율로 시작했어야하는거 아닌가? 내가 페미니즘이라면 굉장히 억울할 것 같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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