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학자들은 3.1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안 올리고 파리장서를 주도했나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4.0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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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선포된 선언서(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기독교·불교계 인사 33인이 이름을 올렸다. 3.1운동의 중심에 섰던 천도교는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명망가들의 참여를 바랐기에 여러 방면의 요인들을 접촉했는데, 500여 년간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탱하고 이끌어온 유학자들이 포함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지만 이들에 대한 교섭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왜 유학자들은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까

장면 ①

1919년 2월 선언서 작성을 맡은 최남선이 경학원 대제학인 유학자 김윤식을 만나 민족대표들의 뜻을 전하고 참여를 호소했다. 그러나 김윤식은 ‘독립을 선포하자는 것이 비록 사회일반의 여론이라 해도 경거망동은 불가하고, 현재 나라가 없고 정부가 없는데 누가 선언을 하느냐?’며 따져 물었고, 독립선언이란 이미 독립이 된 것을 선언하는 것이므로 ‘선언’을 해서는 아니 되고, 일본에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옳다며 거절했다.

장면 ②

한용운은 경남 거창을 방문해 영남 유림의 대표 격인 곽종석을 만났다. 곽종석은 동참 의사를 밝히면서도 선언서 내용에 왕정복고에 관한 내용이 빠진 것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용운은 다음 날 정오까지 곽종석의 최종 회답을 기다리다가 시간에 쫓겨 귀경할 수밖에 없었다. 왕정복고의 문제뿐만 아니라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신학문을 배운 자들과 행동을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고 한다.

장면 ③

2월 경북 성주에 있던 김창숙은 경성의 성태영으로부터 “광무 황제의 인산을 삼월 초 이틀에 거행하는데(인산일은 3월 3일, ‘초 이틀’은 김창숙의 착오인 듯하다), 그 때 국내 인사들이 모종의 일을 일으키려 한다. 기운이 이미 성숙했으니 자네도 바로 상경하여 혹시 시기를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김창숙은 어머님의 병이 위중하여 바로 자리를 뜰 수 없었고, 그믐께가 되어서야 경성에 도착했는데, 선언서 인쇄가 끝난 이후여서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선언서를 읽은 김창숙은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실로 나라가 망한 원인을 따져보면 이 유교가 먼저 망하자 나라도 따라서 망한 것이다. 지금 광복 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유교를 꾸짖어 ‘오활한 선비, 썩은 선비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런 나쁜 이름을 뒤집어썼으니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겠는가?
- 김창숙 자서전 상, 『김창숙문존』에서

 

김창숙은 유학자로서 망국의 책임을 통감했으며 독립선언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모든 유학자의 수치라며 자책했다. 그러나 김창숙은 좌절과 절망으로 주저앉지 않았다. 슬픔에 잠긴 김창숙에게 경북 상주 출신의 유학자 김정호가 유림 수십만이 경성에 상경해 있다면서 유림이 광복 운동에 나설 방도를 물었고, 그 결과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독립 운동을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시키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137명의 유림 대표가 서명한 파리장서 운동이 시작되었다.

 

파리장서운동을 유학자들이 주도한 이유는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을 앞두고 많은 유생들이 상경했다. 김창숙과 접촉한 김정호를 비롯한 유생들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거창의 곽종석에게 운동의 추진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곽종석은 이들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고, 경북 성주에 거주하는 유생 장석영에게 문안의 작성을 의뢰했다. 장석영은 곽종석과 함께 ‘주문팔현(洲門八賢)’으로 불리던 이진상의 수제자 8인 중 한 사람이었다.

곽종석은 자신의 제자인 김황에게도 문안의 작성을 지시했다. 그는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고종 인산에 참여했고, 3.1운동의 발발을 목격하고 경성에 와 있던 유생들과 곽종석의 비밀 연락을 주선한 주인공이었다. 그는 3월 9부터 13일까지 5일 동안 곽종석의 처소에 머물며 초안을 작성했다.

김창숙이 거창에서 곽종석을 만난 것은 3월 15일이었다. 두 사람은 파리장서 운동 추진을 논의하고 장석영과 김황이 작성한 초안을 놓고 고심한 끝에 김황이 작성한 초안을 저본으로 부적절한 내용을 빼고 필요한 내용을 추가하여 문안을 완성하였다. 이를 곽종석의 호 면우를 따 면우본(勉宇本)이라 한다.

파리장서 운동을 촉발한 또 하나의 사건은 3월 1일 아침 ‘국민대회’ 명의로 경성 시내에 뿌려진 격문 ‘오호 통재라, 아! 이천만 동포여’였다. 격문에는 고종의 독살에 가담한 적신의 이름으로 이완용, 윤택영, 조중응, 송병준, 신흥우 등과 함께 유림대표로 김윤식의 이름이 올라있었다. 이에 격분한 유생들은 유림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즉각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김황이 작성한 청원서에는 ‘고종 독살’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 있었으나, 김창숙과 곽종석은 이것을 삭제했다.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에 들어가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초해야만 외교 문서로서 적절하며, 그럼으로써 열강 대표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창숙은 면우본을 휴대하고 경성으로 돌아갔다.

서울에서 김창숙은 운동의 주모자들과 재회했다. 유림의 단결을 위해 전국 8도에 파견되었던 인사들이 모여 성과를 공유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그 중 호남 유림을 대표하는 전우가 불참을 선언한 것은 큰 아쉬움이었다. 전우는 불참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씨 종사를 복벽하여 대통령 제도를 허용치 않을 것을 분명히 하고, 공자교를 세워 기독교를 배제할 것을 분명히 하고, 군부의 원한을 씻어낼 것을 분명히 하고, 원수같은 이적의 무리를 몰아낼 것을 분명히 하고, 단발 제도를 엄금할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중략) 이렇게 된다면 서명 권유에 따랐다가 몸이 만갈래로 찢겨 죽는다 하더라도 또한 웃음을 머금고서 땅에 묻힐 수 있을 것이다.
- 추담별집 권1, 상해, 1929, 29면/임경석의 글에서 재인용

 

전우는 유학자였다. ‘이씨 종사(李氏 宗社)’를 다시 세우는 문제뿐만 아니라 단발 제도를 폐하는 등 공자의 가르침을 지키는 데 철저했다. 청원서에 자신의 요구가 담기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다른 내용들로 인해 참여를 거절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요구를 수용해 줄 경우에는 몸이 만 갈래로 찢기어도 웃으며 죽을 수 있다고 했다.

파리장서. 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김창숙이 상해로 떠날 준비에 착수했을 즈음, 호서 지방 유학자 17인이 지산 김복한을 수석 서명자로 하는 별개의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경성으로 보냄으로써 뜻하지 않게 파리장서가 2통이 되었다. 이에 통합의 필요를 느낀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호서 유림의 대표자 임석후와 영남 유림의 대표자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은 서명자 명단, 해외 파견 대표자 선정, 파리강화회의 제출 문서의 확정을 놓고 숙의했다. 특히 영남 유림에서 작성한 면우본과 호서 유림에서 작성한 지산본 중 하나를 선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참석자 다수가 면우본을 지지하고 지산본을 들고 온 임석후도 동의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면우본이 파리장서로 결정되었다.

파리장서를 제출할 유림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은 3월 23일 밤 10시 경성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넘어 안동, 봉천, 천진, 제남, 남경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 것은 3월 27일이었다. 당시 상해에는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신채호, 조완구를 비롯한 수많은 망명자들이 있었다. 김창숙은 이들과 논의했고, 김규식이 이미 파리평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직접 파리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김창숙은 파리장서를 서양어로 번역·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평화회의에 발송하는 한편 각국 대사, 공사, 영사관 및 중국의 정계 요인들에게 보내고 해외 동포가 거주하는 여러 항구나 도시에도 산포하였다.

백범 김구(왼쪽) 심산 김창숙. 심산은 백범과 같은 노선을 걸었지만 이승만과는 대립의 길을 걸었다. (사진 출처: 심산사상연구회)

김창숙이 상해로 가져간 면우본은 파리로 발송되기 전 한 번 더 수정이 가해졌다. 면우본에서 발송 주체는 ‘한국 유림 대표 곽종석 등은 파리 평화회의의 각하 여러분에게 삼가 장서를 올립니다’로 되어 있었으나, 김창숙이 파리로 보낸 장서, 즉 심산본에는 '한국 유림 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인은 파리 평화회의 각하 여러분에게 삼가 장서를 올립니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면우본에는 한국 병합 이후 독립을 희구해 온 주체는 ‘우리 임금과 우리나라(吾君吾民)’으로 표현되었지만, 심산본에는 ‘우리나라 우리 인민(吾國吾民)’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 우리 인민(吾國吾民)은 자나깨나 탄식하며, 언제나 하늘이 우리를 돌보시어 좋은 운수가 돌아올 것인가?

파리장서 운동의 유림 대표로서 임무를 마친 김창숙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대의원이 되었다. 알다시피 의정원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이라는 조항을 임시헌장의 제1조로 내세웠다. 이는 김창숙이 ‘이씨종사(李氏宗社)’의 복구를 운동의 전제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는 증거다. 김창숙은 유학자였지만 유학의 완고한 도학에 얽매이지 않은 개혁적인 유학자였다.

참고자료

임경석, '유교 지식인의 독립운동 - 1919년 파리장서의 작성 경위와 문안 변동', 2000년

최우석, '3.1운동기 김윤식, 이용직의 독립청원서 제출사건', 2011년

심산사상연구회, 『김창숙문존』,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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