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낙태죄 폐지’ 법안이 헌재 결정보다 후퇴? 여성단체 주장 사실 아니다

  • 기자명 박가분
  • 기사승인 2019.04.2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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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1일 현행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라는 헌법 재판소의 결정이 나왔다. 이에 각종 사회단체와 여성계는 일제히 환영 논평을 냈다. 이러한 판결을 통해 오랜 기간 임신중절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몇 안 되는 OECD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헌재판결에 발맞춰 4월 15일 정의당 대표 이정미가 대표발의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 법률’이 제출되었다.

법안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신 14주 이내까지는 임신중절을 사유 불문 가능하도록 했다. 14주에서 21주 사이에서는 사회경제적 이유와 성폭력, 태아와 산모의 건강 그리고 근친상간 등 다섯 가지 사유(아래 <그림 3> 참조)에 해당될 경우 허용하도록 했다. 22주 이후부터는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가능성이 있는 때에만 허용하도록 규정했다.

그런데 낙태죄의 ‘무조건적 비범죄화’를 목표로 한 여성단체와 각종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이러한 법안에 대해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정의당 법안이 헌재 판결보다 후퇴했다는 것이 주요 주장이다. 이 글에서는 여성단체의 주장을 검증한다.

 

1. 여성단체, 헌재 결정 취지 왜곡하다

4월 16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이하 모낙폐)’은 성명을 통해 정의당의 발의안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또 다시 제약하는 법안”이라고 주장했다. 헌재 헌법불합치 의견은 ‘임신 22주 내에서는 “특정한 사유를 국가가 지정하거나 선별하지 않고” 여성의 자기 결정과 요청에 기반하여 임신중지가 이루어지는 것이 헌법상 타당하다’라는 의견을 내었는데, 정의당의 발의안은 시기와 사유를 제한하고 있으므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취지마저도 한참이나 후퇴시키는’ 법안이라는 주장이다. 위 성명을 바탕으로 한겨레,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미디어오늘 등이 기사를 작성하여 보도하였다.

 

임신중절에 대한 ‘완전한 비범죄화’를 지향하는 여성단체의 기조는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자신의 요구 관철을 위해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주수와 사유를 제한하는 정의당의 발의안은 ‘헌법재판소 결정취지마저도 한참이나 후퇴시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이를 제한할 것을 주문한 게 헌법재판소이기 때문이다.

 

우선 헌법재판소(이하 헌재) 결정문을 살펴보자. 모낙폐는 헌법불합치 의견이 22주 내에서는 사유를 묻지 않고 임신중절이 가능하게 하도록 하는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헌법불합치 의견은 그런 주장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착상시부터 임신 22주 내외의 시기를 ‘결정가능시기’라고 언급하며, 결정가능시기의 마지막 시기가 언제인지는 국회에서 정하라고 한다(그림1 참조). 즉, 22주 내에서는 사유를 묻지 않고 허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임신중절을 금지하는 마지막 시기가 언제인지를 22주 안의 범위에서 국회가 정하라는 것이며, 20주 혹은 18주부터 임신중절을 금지해도 위헌이 아니다.

 

또한 임신중절 시 사유를 묻지 말라고 헌재가 결정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헌법불합치 의견은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임신중절을 현 법률이 막고 있다며, 국회는 언제까지 사회경제적 사유를 묻지 않고 임신중절을 허용할지, 결정가능기간과 사회경제적 사유를 어떻게 조합할지를 국회에서 정하라고 결정문에서 언급한다(그림1 참조). 임신 기간에 따라 임신중절 사유를 묻지 않을지, 언제부터 어떤 사유를 물을지는 국회에서 정하라는 것이다.

 

<그림 1> 헌법재판소 결정문 일부 발췌 (1)

 

한편 임신 14주 내의 임신중절을 처벌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단순 위헌’ 의견도, 임신 14주 이내는 사유를 묻지 않고 임신중절이 가능하도록 해야 하지만, 14주 이후부터는 일정한 한계를 두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그림 2> 참조). 또한 22주 이후부터는 원칙적으로 제한하되 예외적인 경우에만 임신중절을 허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림 2> 헌법재판소 결정문 일부 발췌 (2)

 

낙태죄의 위헌성을 지적하며 개정하라는 헌재 결정에 따르면, 만약 보수적인 세력이 임신중절이 가능한 시기를 최대한 좁게 하고자 어떠한 사유에 의해서든 임신중절이 가능한 마지막 시기를 20주, 18주, 혹은 16주로 하고 그 뒤로는 임신중절을 금지하도록 법안을 정하고 국회에서 통과하여도 위헌이 아니다. 이를 이용해 보수세력은 주수와 사유 제한을 가능한 좁게 잡으려고 할 것이다. 정의당은 헌재가 정한 범위에서 가장 늦은 시기까지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임신중절이 가능하다고 발의한 바, 정의당의 법안과 보수세력이 발의한 법안 사이에 주수와 사유를 두고 논점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절을 제한하는 정의당의 법안이 헌재 결정문보다 후퇴했다고 주장하며 여러 기사에서도 인용된 모낙폐와 정의당 여성주의자 모임의 성명 내용은 헌재 결정문의 취지를 왜곡한 것이다. 반면 이번 정의당의 발의안은 아래 <그림3>에 요약되어 있듯이 오히려 헌재가 주문한 가이드라인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허용할 수 있는 가장 최대치를 잡아 발의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의당이 헌재 결정보다 더 급진적인 발의안(예컨대 임신중절의 무조건적 비범죄화)을 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애초에 헌재 결정을 권위 있게 인용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그림 3>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문 팩트체크. 출처: 진보너머

 

2. 헌재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충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울러 모낙폐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직후에 열린 4월 12일 기자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2012년 헌법재판소는 태아의 생명권을 공익으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사익으로 두고 이를 태아와 여성의 권리 충돌로 판단하였지만, 이번 결정에서는 그와 같은 구도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유감스럽게도 사실이 아니다. 헌재는 오히려 이번 결정문을 통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시했다. 예를 들어 헌재는 결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가 낙태를 전면적으로 금지할 경우, 태아의 생명권은 보호되는 반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완전히 박탈된다. 반대로 국가가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할 경우,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보호되는 반면 태아의 생명권은 완전히 박탈된다.”

 

<그림 4> 헌법재판소 결정문 일부 발췌 (3)

 

한 마디로 말해서 헌재의 입장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충돌하지만 이들 간의 타협점 혹은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태아의 생명권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헌재의 입장은 헌재만의 일방적 판단이 아니라 임신중절을 선택하거나 고민했던 여성들의 실제 사례를 반영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2019년 2월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만 15~44세 여성 1만 명 대상 온라인 조사)에 따르면 임신중절을 끝내 선택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 71.5%가 ‘태아의 생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를 주된 이유로 응답했다. 이처럼 태아의 생명을 중시하는 종교관과 개인적 가치관에 따라 임신중절에 대한 고민을 하는 여성들이 존재한다.

OECD회원국 임신중절 허용사유 등 현황. 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9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3. 낙태 합법화를 한 선진국에 비해서도 못 미치는 법안인가?

정의당의 발의안에 반발하는 일각에서는 이번 법안이 마치 임신중절 합법화 국가와 비교해도 한참 후퇴한 것처럼 평가하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해외에서 낙태를 전면 허용한 국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비영리 인권단체 Guttmaher Institute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기간과 사유의 제한 없이 임신중절을 완전히 비범죄화한 국가는 북한, 베트남, 중국과 같은 구 공산권 국가이거나 캐나다 정도이다.

한편 헌재도 결정문을 통해 낙태를 합법화한 유럽 대다수 나라는 ‘기간 방식’ 과 ‘적응사유 방식’을 병행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간 방식은 대체로 마지막 생리기간의 첫날부터 14주 이내의 일정한 요건을 갖춘 낙태를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라고 헌재는 설명하고 있다.

<그림 5> : 전세계 임신중절 합법화 지도.

 

4. 임신주수의 제한은 여성의 결정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가?

일부에서는 임신주수에 따라 임신중절 허용여부와 사유를 제한하는 것 자체가 여성의 선택권과 자기결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현실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임신중절을 일정 기간 내에 허용하는 대다수 임신중절 합법화 선진국들도 여성의 선택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논리적 비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보건복지부에서 2011년 실시한 「전국 인공임신중절 변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공임신중절 중 임신 3개월(12주) 이내에 이뤄지는 임신중절이 전체의 약 9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정의당 법안 발의안의 경우처럼 21주까지 임신중절 사유를 여러 종류의 사회경제적 이유를 포함해 폭넓게 인정한다면 절대다수 산모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대목이다.

 

조건 없이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14주라는 제한기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 가장 안전한 임신중절 방법인 임신중절 약물의 경우 사용기한이 대략 10주 내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14주라는 제한 기간 내에 임신중절 여부를 숙고하도록 독려하는 제도는 산모의 건강과 안전에 비춰 봐도 결코 비합리적이지 않다.

 

5. 나가며

임신주수에 따라 임신중절 허용여부와 사유를 제한하는 법안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약하므로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자면 적어도 그런 입장이 헌재의 결정 취지와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헌재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대립되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무엇보다 정의당이 대표발의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이 헌재의 결정 취지에 역행한다는 주장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만일 무조건적인 임신중절 비범죄화라는 요구를 일관되게 전개하려 했다면 애초에 헌재 판결 역시 비판했어야 옳다. 하지만 이들은 헌재판결을 자신들의 ‘정치적 승리’로 해석하는 동시에 ‘무조건적 비범죄화’라는 자신의 요구를 동시에 관철시키려다보니 헌재의 결정취지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자충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 헌재가 결정문을 통해 임신중절 허용기간과 사유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이상, 제도권 정당은 이러한 가이드라인 내에서 입법을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헌법 내의 질서를 존중하는 정치세력이 할 수 있는 일은 헌재 결정을 토대로 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 낙태죄 폐지가 실제 여성들의 삶을 바꾸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의 기사는 정의당 의견그룹 ‘진보너머’의 입장문에 기반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박가분 팩트체커는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공저)무엇이 정의인가(2011)'  등 단행본과 '암호화폐, 지급 수단인가 투기적 자산인가?(2019)' 등 논문을 출간했다. 제1회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을 수상('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 2014)했고 이 글은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되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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