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비밀정원' 성락원? 문화재적 가치 거의 없다

  • 기자명 석지훈
  • 기사승인 2019.05.0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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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사이에 여러 언론에서는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성락원 (명승 제 35호)의 임시 개방 소식을 일제히 전했다. 거의 모든 언론들은 성락원이 "200년 만에 개방" 된 "조선의 비밀정원"이라고 적으면서, 이 별장이 조선시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고, 이후 의친왕 이강이 소유했다가 심상응의 후손이 다시 사들여 지금까지 관리해왔다는 식으로 일제히 동일한 내용을 보도했다.

 

 

하지만 이번 언론 보도를 포함해, 심지어 문화재청 공식 안내문과 그간 나왔던 수많은 발간물에 실렸던 내용 대부분이 거의 다 엉터리에 거짓 투성이의 왜곡이라면 믿어지겠는가? 유감스럽게도, 현재로서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일단 현재 성락원 구내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추사의 바위글씨라던가 하는 것들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애초에 바위 글씨 휘호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 어떠한 건축물이나 구조물이 있었다고 단언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바위글씨라는 것은 꼭 그 당대에 새겨졌을 가능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금강산 전역을 수놓은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글씨나,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라고 알려진 "제일강산" (第一江山) 휘호가 전국 각지에 대여섯개나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락원 전경(원림복원을 위한 전통공간조성기법 연구)

현재 성락원 구내에 남아있는 바위글씨 가운데 이곳의 역사와 구체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영벽지(影碧池)라고 알려진 연못가 바위에 쓰여있는 것으로, 여기에는 영벽지라는 연못 이름과 함께 “계묘(癸卯) 5월”이라는 일자가 기록된 한시가 새겨져 있다. 영벽지라는 휘호에는 “해생(海生)”이라는 호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그간 조선 말기의 내시이자 서화가로 활동한 황윤명(黃允明, 1844 ~ ?)이 쓴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런데 계묘년이라는 간기 중 황윤명이 생존한 (혹은 생존했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오직 1903년뿐이니, 이는 결국 성락원 일대의 역사가 1903년 이전으로 내려가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할 뿐이다.

 

이러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간 알려져 왔던 성락원의 기원부터 얘기해보자. 우선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 혹은 沈想應)이라는 사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심상응이라는 사람을 이리저리 찾아보면, 청송 심씨 본관으로 고종 때인 1891년 신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1898년에 잠시 경기관찰부 주사(“任京畿觀祭府主事沈相應”, 『승정원일기』 1898년 2월 22일자 기사)를 지낸 인물이 하나 있을 뿐이다.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그동안 아무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편 의친왕 이강이 “35년 동안 이곳을 소유했다”라는 주장은 현재로서는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선 한말의 신문 기록 중 일부에 의친왕이 "동소문 밖 성북동"에 있는 김덕수 (金德秀)라는 인물의 정자에 행차했다는 기록은 조금 있지만 (『황성신문』 1906년 8월 6일 및 13일 기사 등등), 이것이 성락원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 설령 이 김덕수라는 사람의 정자가 지금의 성락원이었다 하더라도, 당시 의친왕의 행차 길에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가 동행했던 사실(「城北納凉」, 『황성신문』 1906년 8월 13일자)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일부 기사에 나온 것처럼 성락원이 “독립운동의 근거지로도 이용됐다”라는 주장 역시 무색하게 만든다. 애초에 조선 말기까지 대개 성북동이라고 하면 혜화문(동소문) 밖 고갯길 너머, 지금의 성북천 일대가 있는 지역의 일부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한말 기록에서 김덕수의 정자가 있다고 쓰여있는 “성북동”이 지금 성락원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1917년 임야소유대장

 

조금 더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1917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임야조사부에서 발행한 임야소유대장을 통해, 현재의 성락원 부지에 해당하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산 12의 임야 1만3500평이 그 해 9월에 국유지에서 의친왕 이강의 소유로 “양여”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미루어보면 1917년 9월 이후 의친왕이 이 일대의 임야를 실제로 소유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이 자리에 현재의 성락원과 같은 구체적인 정원이나 별장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이강이 이곳을 “35년 간 소유”했다는 주장 역시 그대로 논박된다.

 

1927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또 1927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李堈公別邸火災」)에는 지금의 성북동에 해당하는 숭인면 성북리에 이강의 “별저”가 있었으나 이것이 그 해 12월 20일에 일어난 화재로 전소됐다고 보도된 바 있다. 그 정확한 위치나 번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 이것이 현재의 성락원 위치에 해당하는 성북리 산 12를 가리키는 것임은 명백해 보인다. 이를 토대로 보면 1917년 당시 임야였던 이 일대에 그 이후로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건물이나 시설이 들어섰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문제의 『동아일보』 기사에는 안채 14칸을 포함해 별저의 상당 부분이 전소됐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현존하는 성락원의 건물이나 시설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의친왕의 아들 이건 (1909 - 1990)

 

이후 1932년에 이 부지는 의친왕의 아들인 이건 (李鍵)에게 증여되었다(이원호, 이세미, 「성락원(명승 제35호) 주변지역 필지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 성북동 문화재 주변을 중심으로」,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1:2), 2013. pp.86-88.). 이건은 해방이 될 때까지 이 필지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그가 모모야마 겐이치(桃山虔一)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귀화를 해 버렸기 떄문에, 자연히 이 필지의 소유권도 무효가 되었다. 그리하여 1947년에는 박용하(朴容夏)라는 인물이 이를 불하받아 소유하게 됐는데, 당시의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그는 해방 공간에서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교수를 잠시 지내다(「學窓에 不祥事, 高大 商大 兩校生 衝突」, 『동아일보』 1947년 10월 23일자.), 정부 수립 후 제 2대 체신부 차관(「遞信次官에 朴氏, 五大法官도 發令」, 『경향신문』 1948년 11월 5일자.)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박용하는 6.25 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이 필지는 오랫동안 빈 터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버려져있던 이 성북동 계곡의 별장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은 1961년 6월의 일이었다. 동아일보가 연재한 "서울의 새 명소"라는 연재 기사에 처음으로 이 성락원이 소개된 것이다(「서울의 새 名所 (6) - 成樂園」, 『동아일보』 1961년 6월 2일자). 그런데 이 기사를 읽어보면 정말로 충격을 금할 수 없다.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성락원"이라는 것은 사실상 1961년에 가서야 처음으로 만들어진, 그것도 무슨 유적지는 커녕 "종합관광지"였기 때문이다.

1961년 6월 2일 성락원 기사

 

문제의 『동아일보』 1961년 6월 2일자 기사에 따르면, "성락원"은 기존에 "의친왕의 고옥(古屋)이 있던 지구"를 중심으로 건설된 시범관광지구로, 총 3만 평의 "개인 소유 땅"에다 7만 평의 존치 보안림을 끼워 총 10만 평에 이르는 규모로 건설된 "종합 관광시설을 갖춘 현대식 공원"이라는 것이다. 본 공사는 7년 전, 즉 1954년부터 시작되어, 연못과 550평 규모의 수각정(水閣亭)을 이미 완공했으며, 수영 풀장과 관광용 홀, 12층 규모의 호텔, 25동의 방갈로 등을 지으려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사는 "당국의 협조 없이", 순전히 당시 제동산업 사장이었던 심상준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으로, 호텔의 주요 고객은 유엔군 휴가장병 유치를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사에 언급된 “연못”과 “수각정”은 현재 성락원의 핵심에 해당하는 정자 송석정과 그 아래의 연못을 가리킨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락원 종합관광지 조성 공사는 돌연 중단되고야 만다. 이는 기사에 언급된 것과 같은 "한화 15억원, 외화 400만 달러"에 달하는 호텔 건설 자금을 심상준이 제대로 끌어오지 못했던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기사를 보면, 당시 심상준이 경제기획원에서 주최하는 "외자도입대상사업 건설 적격자" 신청에 "관광사업" 부문을 신청해 이를 승인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外資導入 事業適格者를 選定」, 『동아일보』 1962년 1월 24일자), 그 후 그 해 4월에 심상준이 미국에 다녀왔다는 소식이 보도된 이후(「空港日記」, 『동아일보』 1962년 4월 25일자) 아무런 후속보도가 없던 것을 보아 이 외자도입 교섭이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1960년대 초중반까지 수많은 유력 자산가들이 호텔 및 오락 산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것이 적지 않은데, 성락원 역시 결국은 그런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1976년 3월 25일 동아일보 성락원 기사

 

그 후 성락원은 세인의 관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1976년 2월에 잠시 언론에 다시 등장했다 (「通學路막은 私有地」, 『동아일보』 1976년 3월 25일자). 당시 성락원 부지를 돌아가는 관통도로를 이 지역에 거주하는 중고등학생들이 통학로로 이용했는데, 이를 소유주 심상준의 지시로 철조망으로 막아서 일대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성락원의 부지도 이 시기에 큰 변화를 겪었다. 1975년 8월 5일 기존의 필지 (성북동 산 5번지)가 분할되어 기존의 필지에서 현재의 규모인 2536㎡ (건물 제외)로 크게 줄어들었고(이원호, 이세미, 앞의 논문, 2013, p.88.), 이후 분할된 필지에는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다. 아마도 심상준은 호텔 건립 사업이 무산된 이후로도 이 넓은 대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가, 70년대에 이르러 이 지역이 다시 개발되면서 기회를 틈타 이를 분할해 매각한 것으로 보인다. 76년 당시 관통도로가 폐쇄된 것은 바로 이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성락원 필지변화(이원호, 이세미 논문 참조)

 

그 후 성락원은 심상준과 관련된 언론보도에 그의 자택이라고 간간히 소개되었을 뿐, 그 어디에도 기록이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1982년에 가서야 심상준이 정식으로 성락원의 소유권자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심상준은 불과 2년 만인 1984년에 성락원을 다시 그의 회사인 국제원양어업주식회사 명의로 전환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심상준 개인의 재정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던 성락원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1992년 12월 26일, 당시 문화부가 성락원을 사적 제 378호로 지정했던 때 부터였다. 바로 이 때 처음으로 철종 때 이조판서니, 의친왕이니 하는 이야기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당시 문화부의 근거 자료가 무슨 자체 조사 결과가 아닌 "소유주들의 자체 기억"에 의거했다는 것이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문화재 지정 심사에 있어 소유주나 혹은 발견자의 주장이 강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당장 같은 해 8월에 “발견”되어 “거북선에 장착됐던 대포”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국보로 지정되었던 별황자총통이, 불과 4년 만인 96년 6월 위조품으로 드러난 사실이 있었다.

 

그런데 성락원은 2008년 1월 8일 기존의 사적 제378호에서 명승 제 35호로 재분류, 지정되었는데, 이는 2007년 4월 13일 있었던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제 4차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문화재청 편, 『문화재위원회 회의록 (중) - 사적분과』, (대전: 문화재청, 2008). pp.343-354.). 여기서 문화재보호법 상의 “명승”이란 “저명한 건물이 있는 경승지 또는 원지로서 예술적 ·경관적 가치가 큰 것”을 가리키며, “사적”이란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인데, 성락원이 사적에서 명승으로 재분류된 것은 달리 말해 성락원의 역사성이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실상 인정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당시 자문위원들의 회의 내용을 보면 여전히 성락원이 “철종 때 심상응의 별장”이라는 엉터리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재지정 단계에서도 문화재청이 성락원의 정확한 역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보아하니 이번 성락원 "공개"는 성락원의 현 소유주인 심철 씨 (심상준의 장남) 일가가 운영하는 한국가구박물관의 명의로 진행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2015년 이래 심철 씨 일가가 190억원 가량의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고, 성락원 역시 역시 심철 씨 일가의 소유인 한국가구박물관 건물들과 더불어 그간 수 차례 경매 절차를 밟고 있었던 듯하다. 이번의 "전격 공개" 역시 아마도 심철 씨의 개인 부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간단히 정리하자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성락원의 역사는 거의 거짓에 가깝다. 경내에 있는 바위글자 등의 구체적인 역사성 규명은 좀더 자세히 지켜봐야겠지만, 그것을 차치하더라도 성락원은 1961년 이전에는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명백하며, 의친왕 혹은 이건과 연관이 있던 경내 건축물 역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니 이 곳의 문화재적 가치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번의 "전격 공개" 역시 해방 후 원 소유주인 심상준 이래 누적되어온 부채를 탕감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으며, 한편으로 지금껏 수많은 언론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기관인 문화재청, 그리고 그 상급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이에 대해 아무런 정밀 조사나 고증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통렬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하겠다.

 

필자 석지훈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한국 근대사로 석사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시간대학교 (University of Michigan) 아시아문화언어학부 한국학과정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전통문화와 문화유산 인식의 변모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20세기에 사진, 영상, 음향 매체가 한국의 전통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중점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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