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명승 문화재' 성락원은 경관적 가치가 충분하다

  • 기자명 뉴스톱
  • 기사승인 2019.05.07 10: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톱이 최근 보도한 <'조선의 비밀정원' 성락원? 문화재적 가치 거의 없다>라는 글을 보고 몇 가지 다른 의견이 있어 글을 쓴다.

해당 글의 내용에 대해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기록에 의한 검토가 부실했던 것도 맞다. 본인도 고전번역원 사이트에서 심상응沈相應을 검색해보니 기사에 나오는 내용 밖에 나오지 않았다. 성락원에 관련된 글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심상응이 이조판서라면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승정원일기’ 등에서 나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곳을 심상응이 만들었다는 것은 섣부른 것이다. 아마도 현재 주인이 심씨다 보니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한다. 기록이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이후 땅 주인 변화를 보면 원래 심씨 집안 소유였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자료를 보는 관점이 본인과 다른 부분이 있다. 이제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계묘년이라는 간기 중 황윤명이 생존한 시기는 오직 1903년뿐이니, 이는 결국 성락원 일대의 역사가 1903년 이전으로 내려가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할 뿐이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것은 성락원의 조성시대를 낮춰보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계유’라는 글은 그때 글을 새겼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계유’라는 글이 새겨지기 전, 성락원이 어디 갔다가 온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계유’라는 글로 조성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좋은 풍광이라면 과거에도 좋은 풍광이었을 것이다. 성락원 풍광을 다른 어느 곳에서 가져오지 않은 이상, 많은 사람들이 성락원 풍광을 즐겼을 것이라는 것은 기록이 없어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 정재훈은 ‘계묘’가 있는 글에 ‘孫文鶴書’라고 씌어있는 것으로 ‘계묘’를 1843년이라고 하고 손문학孫文鶴이 조성한 것으로 주장하나 ‘書’ 역시 글을 썼다는 것에 지나지 않고, 검색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한국전통의 원/334쪽)

조선지형도(1915) : 이원호 등(2015년)에서 전재

 

글에서 1927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기사를 인용하면서 지금 성락원 위치에 이강의 ‘별저’건물이 있었던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현재 성락원 건물이나 시설과는 관련 없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히 당시 건물과 현재 건물은 상관이 없다. 그러나 1921년에 작성된 지형도에 의하면 ‘이강공의 별저’라는 표기와 연못, 건물 등이 표기돼있다.(이원호 2012) 이것을 보면 이미 일제강점기에 이강의 별서와 정원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건물이 과거와 다르고, 조성시기가 늦을지언정 정원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이후 건물이 재건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강의 지위와 부라면 다시 짓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성락원이 위락시설로 만들려고 하면서 많이 훼손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조금 섣부른 판단이다. 1961년 성락원을 위락시설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글에 나온 61년 6월 2일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위락시설 공사는 7년 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면 1954년에 시작된 것이다. 링크 글에서 나오듯이 북한으로 납북된 박용하가 소유하던 것을 아마도 전쟁이 끝난 뒤 미군을 상대로 하는 위락시설을 만들려고 심상준이 풍광이 좋은 이곳을 구입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위락시설 조성은 시도로 끝났다. 성락원 집안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위락시설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한다.(이원호 2012) 송석정과 연못은 1954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이원호, 이세모 2013)

해당 글에서 결론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성락원의 역사는 거의 거짓에 가깝다.’고 했다. 그리고 ‘성락원은 1961년 이전에는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명백하며, 의친왕 혹은 이건과 연관이 있던 경내 건축물 역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니 이곳의 문화재적 가치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라고 했다. 그리고 ‘전격 공개가 소유주의 부채를 탕감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이원호는 성락원은 현재 복원 사업을 포함하여 4기로 나눈다. 첫 번째는 일제강점기 이강의 별저일 때, 두 번째는 1950년 심상준이 소유한 이후, 세 번째는 2008년 복원공사, 네 번째는 현재 생태계 복원 사업기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는 1961년 심상준이 현대식 시설을 도입하려 하면서 많이 변형된 것으로 본다. 이원호 논문에 의하면 지금 성락원은 이강의 사저일 때 정원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영벽지를 조사하여 물확도 찾아냈고, 식생도 그때 상황으로 되돌리려고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심상준이 위락시설을 짓고자 했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의 편의를 위해 도로 등이 개설됐지만 근본적으로 정원으로서의 가치가 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문화재청도 명승으로 지정한 것이다.

성락원 전경(원림복원을 위한 전통공간조성기법 연구)

현재 여러 자료를 보면 위 기사 주장대로 200년 이상 됐다는 자료를 찾기는 힘들다. 성락원 내에 200~300년 엄나무 등이 있다고 하니 조성년도를 유추해 볼뿐이다.(서울의 누정/509쪽) 어쨌든 이 주변 대지가 이강에게 넘겨질 때 ‘국유지’였다는 내용과 현재 경관으로 봐 성락원이 조선시대 후기 원형을 어느 정도 보전하고 있었다고 봐도 된다. 이강이 이 땅을 구입한 것도 일제강점기 지도에 나오듯 별저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성 밖에 별저를 짓는 것은 경관 좋은 곳에서 풍류를 즐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강이 성락원 터를 넘겨받았다는 것은 이 주변이 예전부터 경관이 좋다고 잘 알려진 곳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부족한 원형으로의 복원은 이후 연구하여 완성하면 된다.

영벽지에서 발굴된 물확을 보면 자연바위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강이 이것을 만들었는지 혹은 그 이전에 이 땅을 소유한 사람이 물확을 만들었는지는 명확히 알기 힘들다. 그러나 최소한 조선 후기 별서를 어떻게 향유했는가 하는 모습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변형된 것만으로 성락원이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섣부른 것이다. 집이나 석축과 같은 인공물은 변화한다. 글에서 나왔듯이 화재나 전쟁이나 소실되기도 한다. 낡거나 화재로 사라진 것은 다시 짓는 법이다. 그리고 다시 지었다는 것이 누적되면 역사가 되는 것이다.

다만 성락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조선 내 기록에서 ‘성락원’이라는 예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과 1950년 이후 변형이 많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락원의 역사적 가치를 손상시킬망정 성락원이 가지는 경관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기사에서도 지적하듯이 역사적 고증에 미흡한 것은 문화재청이나 성락원 관리담당인 성북구가 깊게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오류도 학자나 전문가들의 역량 부족이나 게으름 때문이다. 학자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성락원의 이름을 조선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이원호 논문(2012)에서도 밝히고 있다.

어쨌든 문화재청도 사적으로의 가치보다는 경관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기사에 나온 것처럼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됐던 것을 명승 항목이 신설되면서 2008년 명승 제35호로 변경됐다. 늦게나마 자기들의 오류를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명승은 경관이 좋아 보전할 가치고 있는 곳을 지정하는 것이다. 현재 명승은 명승 제 1호인 명주 청학동 소금강에서 명승 제115호 강진 백운동원림까지 115곳이 지정됐다. 그 곳 대부분이 좋은 경관을 가진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명승으로 지정했다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강이 별서로 꾸미기 이전의 기록과 흔적들을 검증하는 것이 남아 있지만, 최소한 조선후기 개인 원림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정해 보전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추신: 나는 기사에서 나온 “‘전격 공개’가 소유주의 부채를 탕감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복원 문제는 이미 2008년 이전부터 검토된 내용이다. 2008년 3월 ‘명승 제35호 성락원 종합정비계획 수립용역’이 발주되어 그해 말 보고서가 나왔다. 그리고 개방에 대한 것은 최소한 3년 전인 2016년부터 논의됐다는 것이 확인된다. 아래 링크한 출장보고서에서도 나왔지만 소유관계가 있어 동의 문제 등으로 늦어진 것으로 2016년 이전부터 개방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 최성호(블로그)는 건축설계를 현업으로 하고 있는 건축사다.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어 오랫동안 우리 전통건축과 한국문화에 대해 공부해왔다.

 

*참고문헌

○ <한국전통의 원> 정재훈, 도서출판 조경, 1996.10

○ <서울의 누정(내고향 서울 8)> 이상배, 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12.12.15.

○ <명승 제35호 성락원(城樂園)의 경관변화 특성> 이원호·이창훈·김동현·김재웅, 2015년도 추계학술논문발표회, 한국전통, 2015.10.23.

○ <京華勢族 庭園造營 特性에 關한 硏究- 조선말기에 조성된 정원을 중심으로> 김미란, 경원학교 산업환경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7.12.28.

○ <명승 제35호 성락원(城樂園)의 정원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이원호, Journal of Korean Institute of Traditional Landscape Architecture 제10권, 2012

○ <성락원(명승 제35호) 주변지역 필지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성북동 문화재 주변을 중심으로>, 이원호·이세미, 한국전통조경학회지 제31권 제2호, 2013

○ <성락원 영벽지의 원형 파악을 위한 3D 스캔기술 연구> 이원호·박동진·김동현·김재웅, 한국전통조경학회, 한국전통조경학회지 제31권 제3호, 2013

○ 성락원 다음백과

○ 성락원 복원 및 개방」을 위한 출장결과보고

○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5호 성락원 종합정비계획 수립용역입찰공고, 2018.03.1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