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요 "작품 안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9.05.1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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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팀 이제 살았네, 살았어.”

신바시 역 인근 선술집.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영화잡지 기사를 읽던 친구가 탄성을 뱉었다. 감독 데뷔 이후 발표한 아홉 편의 작품 중 여덟 편이 한국의 국제영화제, 심지어 그 중 네 편(당시)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신작, <하나레이 베이>의 크랭크 업 소식. 전주 상영을 기준으로 정확히 1년 전이었다.

<하나레이 베이>는 두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되었다.

우선은 원작이었다.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씨클로>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베트남 출신 감독 트란 안 홍이 메가폰을 잡은 『상실의 시대』이후, 8년 만에 영화화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다음은 캐스팅이다. 상어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은 아들의 기일에 맞춰 매년 하와이 카우아이 섬을 찾는 주인공 ‘사치’역의 요시다 요라는 배우. 이는 긴 낭인생활 끝에 가까스로 감독에 데뷔한 친구가 단 한 줄로 요약해도 더없는 애회(哀懷)의 정서가 배어나오는 영화의 시놉시스와 대조적인 촌평(“살았다”)을 내놓은 원인이기도 하다.

“석세스 스토리”보다 ‘난관을 견디며 노력을 기울인 끝에 뜻을 이룬 사람의 전기’, 즉 “입지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력의 배우. 1997년 무대 연기자로 데뷔한 그는 명문극단의 말석이 아니라 자신의 추구하는 연극을 위해 두 명의 동료와 극단을 만들어 험로를 걸었다. TV드라마 데뷔에 즈음해 매니지먼트사와 계약했지만 ‘영업’이 아니라 이삿짐센터, 장의사 등 힘겨운 부업에 들이던 에너지를 연기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그가 출연한 아침드라마를 보고, 경탄한 어느 대배우가 그 자리에서 이미 캐스팅이 끝난 대공연에 없던 배역을 만들어 그녀를 영입했다. 6년 뒤 매니지먼트사에서 빌린 생활비를 한 푼의 에누리 없이 모두 갚았고, 기무라 타쿠야의 대표작, <히어로>에 홍일점 검사역으로 출연해 톱스타의 자리를 굳혔다. 그토록 사랑하던 영화에서도 치솟는 인기에 어울리는 비중의 배역을 맡자마자 일본아카데미상(<불량소녀, 너를 응원해>)을 수상했다. 차기작이자 첫 번째로 주연을 맡은 영화(<얄미운 여자>)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하나레이 베이> 캐스팅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공증인과 변호사가 등장하는 TV드라마의 배역을 위해 한자능력검정시험 2급을 취득하는가 하면, 테스트촬영을 할 때조차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 촬영현장에 머무는 결기가 첫째요, 한 편의 작품을 끝낼 때마다 모든 캐스트와 스태프의 머릿속에 ‘스타’가 아닌 ‘동료’로서 각인되는 친화력이 둘째, 발군의 연기력과 확고한 주관에 비해 감독과의 의견조율이 원만한 소통능력이 셋째, 여기에 일을 통해 만난 상대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기 위해 연령(그는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연령을 밝힌 일이 없다)이나 필모그래피에 대한 언급을 삼가는 배려는 덤이었다.

현재 TV드라마와 CM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요시다 요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분야는 ‘보수 면에서 결코 비교우위를 점하지 않는’ 영화다. “영화는 배우로서의 본질을 검증받는 장”이라는 그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사진: (주)디오시네마 제공

홍상현: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초청 사실을 알리며 한국의 여러분께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올해는 영화 데뷔 10주년이기도 하니 감회가 남다를 텐데.

요시다 요:

굳이 날짜를 헤아려 본 일은 없었는데. (웃음) 제게 있어 영화란 배우로서의 본질을 검증받는 장이며, 특히 <하나레이 베이>는 배우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일깨워준 보석 같은 작품이다. 그런 작품이 영화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갖춘 한국의 여러분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초청 소식을 듣자마자 SNS를 통해서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홍상현:

지금까지 주연한 작품 중 <얄미운 여자>와 <엄마와 나: 미움 받아도 괜찮아>가 부산국제영화제, 그리고 <하나레이 베이>가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한국의 영화제에서 이렇게 특별히 사랑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요시다 요:

일단 작품 자체가 가진 힘이 가장 큰 전제였을 것이다. 또한 이번 초청과 관련해서는 그간 전주국제영화제의 여러분께 사랑받아 온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이력이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작업에 참여할 때마다 어떻게 ‘연기(acting)’할 것인가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 어떻게 ‘존재(being)’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같은 선상의 고민을 한국영화를 볼 때마다 느꼈고. 이런 제 철학을 한국의 여러분께서 공감해주신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홍상현:

지난 3월 도쿄에서 시내를 순환하는 전철을 탔다. 열차 안의 TV에서 본 세 편의 CM 가운데 두 편의 모델이 당신이더라. 말 그대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데, 일본의 시장 환경 상 영화출연은 보수 면에서 결코 비교우위를 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영화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요시다 요:

눈여겨 봐주셔서 감사하다. (웃음) 강조 차원에서 재차 말씀드리면, 영화는 제게 ‘배우로서 역량을 시험받는 장’이다. 또한 무대 연기와도 이어지는 부분인데, 영화로는 TV드라마에 비해 보다 침착하게, 시간과 공을 들인 연기를 보여드릴 수 있다. 이는 제게 더 없는 행복이다. 그런 까닭에 가능한 한 영화작업을 늘리고 싶다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다.

 

홍상현:

하긴, 영화라는 매체는 관객이 작품을 대략 두 시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불 꺼진 상영관 안에서 끝까지 본다는 전제 아래서 만들어지니까.

요시다 요:

일본의 경우, 상품성을 검증 받은 다른 장르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 적지 않은 탓에 영화만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 면에서 아쉬움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영화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창작자들이 연극이나 TV드라마와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며, 때로는 그들의 인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힘’을 믿고 있기 때문 아니겠나.

<하나레이 베이>의 프로듀서 오가와 신지와 함께. 그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메종 드 히미코>, <허니와 클로버>, <구구는 고양이다>, <양지의 그녀> 등 수많은 히트작을 만든 ‘마이더스의 손’이다. 사진: (주)디오시네마 제공

홍상현: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왔을 때, 취재진 응대만으로도 빠듯한 스케줄인데 한국영화가 보고 싶다면서 개인적으로 추천작을 물었다. 당시 <버닝>을 언급한 걸로 기억하는데, 일본 공개 이벤트에 게스트로 참석해 이창동 감독에게 화환을 건넨 것을 보고 놀랐다. 홍보에까지 도움을 주었고. 이창동 감독도 <하나레이 베이>를 호평했는데, 차기작 출연 제의 같은 건 없으시던가? (웃음)

요시다 요:

(웃음) 그렇게까지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같이 (작품을) 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나누었다. 하지만 뭐랄까. 당장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배우로서 부족하다고 느끼거니와, 뛰어난 감독의 시선을 모을 수 있을만한 작품으로 필모그래피를 구성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다.

보고 나면 뭔가 후련해지는 ‘엔터테인먼트 무비’보다 ‘탁’하고 작은 돌 하나를 사람들 마음속에 던질 수 있는 영화를 사랑한다. 그 자리에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어렴풋한 끌림을 느끼고, 잠시 그 작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좋아하는데, 한국영화를 보면서 이런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다. 거창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무척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래서 언젠가 박찬욱 감독 혹은 앞서 말씀드린 맥락의 감성을 공유하는 작품으로 인연을 맺을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 <친절한 금자씨>는 그녀가 특히 사랑하는 한국영화 중 하나다). 이를 위해서라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지. 요 몇 년 새 거듭 한국의 영화제에 귀한 초청을 받으면서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 관객이 적어도 한 두 분 정도는 늘어났을 테니, 몸은 바다 건너에 있을 지라도, 부디 그런 분들께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

 

홍상현:

워낙 ‘프로근성의 화신’인 데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는 걸로 유명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어떻게 읽었나.

요시다 요:

(웃음) 어릴 적부터 딱히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닌데, 어른이 되면서 독서량이 늘었다. 영화도 도드라지게 많이 본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영화제에 와서 영화인들이 모여 풀어놓는 수많은 이야기를 저 자신의 무지를 실감하며 경청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제게 ‘책 한권을 단숨에 읽었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해 준 작가이며, 제 인격이 형성되는 데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소설 『하나레이 베이』는 42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소중한 ‘가족’의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화두를 던지되, 그 답을 독자에게 구하는 형태를 띠는 점이 좋았고. 다만, 주인공(사치)의 대사가 극단적으로 적고, 감정표현도 많지 않은 까닭에, (요시다) 요라는 사람 안에 그녀를 담아내는 일이 정말 만만치 않은 작업이 되리란 것을 캐스팅되는 순간부터 예감했다.

 

홍상현:

배우로서 창작력을 발휘해야할 필요성 말인가.

요시다 요:

그렇다. 하지만 마츠나가 감독이 장편영화로 만들면서 원작에 없는 에피소드라던가, 숲 속에서 큰 나무를 끌어안는 신 등 적절한 내용을 가필해줘서 사치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홍상현:

현장에서의 친화력이 뛰어다는 것이 영화계의 중평이다. 대부분 미국 로케로 진행된 <하나레이 베이>의 촬영장에서는 어땠나.

요시다 요:

작품이나 캐릭터에 따라 현장에서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으니 뭉뚱그려 말할 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캐스트도 스태프도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떤 포지션으로 작품의 제작에 참여하는 분에 대해서든, 일관된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다. 이번 <하나레이 베이> 촬영에서는 그런 제가 ‘사치’라는 인물로 살아가기 위해 ‘고독’을 선택했음에도 모두들 그런 저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셨다. 깊이 감사한다.

 

홍상현:

<하나레이 베이> 이야기로 더 들어가 보자. 이 작품은 대단히 슬프고도 아름다운‘판타지’다. 하지만 그 완성도에는 지금껏 발표한 다큐멘터리가 모두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마츠나가 감독 특유의 ‘리얼함’에 대한 감각이 큰 역할을 했다. 하와이 로케를 시작할 당시에도 이와 관련한 이벤트가 있었지 않나. (웃음)

요시다 요:

(웃음) 매니저를 동행하지 않은 채 나리타공항에 가서 혼자 탑승수속을 마치고 하와이의 촬영장까지 와 달라고 주문했다. 로케지(현지촬영장소)에 오기 전부터 ‘사치’가 되어주었으면 한다는 의도라고 파악하고 실행했다.

 

홍상현:

여정에서 사치를 만날 수 있었나.

요시다 요:

한 사람의 스태프도 없이, 혼자서, 그것도 해외 로케지로 향한 경험이 처음이다 보니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결과가 좋았다. 매니저란 어떤 형태로든 저를 도와주는 존재이고 어느 순간 바로 그 ‘보살핌’으로 인해 사치가 아닌 요시다 요로 돌아와 버릴 수 있으니까. 그런 리스크가 사라진 거다. 원작에서 사치가 10년 간 혼자 하와이 여행을 반복하는데, 이 여정은 제 안에 그녀를 받아들이는 시작점이 되었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하와이에 도착하는 것과 혼자서 불안감을 느끼며 하와이에 도착하는 건 마음가짐 면에서도 전혀 다르니까.

2016년 <얄미운 여자>에서 2019년 <하나레이 베이>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주연을 맡은 영화는 거의 매년 한국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사진: (주)디오시네마 제공

홍상현:

표상문화론을 배웠던 경험을 살려 당신이 모국어를 쓰는 첫 장면을 분석하다 살짝 전율이 일었다. 특유의 어조나 말버릇 등에서 단순히 다른 ‘배역’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려 한 시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전작 <엄마와 나>와도 극명하게 대비되고.

요시다 요:

배우로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에 감사드린다. 

언급하신 <엄마와 나>의 미츠코를 연기하면서는 그녀가 생물학적 연령과 무관한(혹은 의식적으로 무관하게 살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는 데 주목했다. 하지만 비슷한 연령대의 싱글마더라 해도 <하나레이 베이>의 사치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언급하신 ‘차별성’은 제 노력도 노력이지만, 마츠나가 감독의 연출력이 준 선물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마츠나가 감독은 제 연기가 넘치려는 순간마다 개입해 밸런스를 유지시켜주었다. 사치라는 인물,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준 거다.

20년 넘는 경력을 가진 배우인지라, 상응하는 경험과 더불어 그만큼의 손때, 혹은 버릇이 부지불식간에 형성되어 있었다. 마츠나가 감독이 저를 만나자 마자 한 일은 이를 간파하고 떼어내는 작업이었다. 실로 힘겨운 싸움이었는데, 그 와중에 사치에 대한 묘사를 표정연기부터 시작하려던 제 방향도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느끼는 감정 자체가 그녀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제 안에 있는 사치를 끌어낼 수 있었다. 신인배우의 초심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행복했다.

 

홍상현:

요시다 요의 배우인생이 <하나레이 베이>를 통해 ‘버전 2.0’에서 ‘버전 3.0’으로 진화했다는 이야기 같다. (웃음) 무대에서의 오랜 경험을 가진 ‘준비된 신인’으로서 인기 드라마 <히어로>의 홍일점 검사역을 맡은 것이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면, <하나레이 베이>는 그 두 번째가 되려나.

요시다 요:

끝까지 마츠나가 감독에게 의지하며 사치라는 인물을 창조했기에, 전심전력으로 매달렸지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제 힘으로 해냈다는 실감이 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마츠나가 감독과 작업할 수 있다면 이번에는 그로 하여금 제 연기를 통해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드리고 싶다.

 

홍상현:

이미 감독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니 보다 이상적인 배우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거다. (웃음)

다음 화제는 음악이다. <하나레이 베이>에서 음악이 갖는 메타포(metaphor)는 중요하다. 주인공 사치도 피아노 바를 운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실제의 당신도 친한 뮤지션의 콘서트에 특별출연할 정도의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연기를 위한 제재(material)”로써 접한 음악은 또 다른 느낌이었겠지.

요시다 요:

말씀처럼 음악이 사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저 또한 생각했다. 그녀의 내면에는 늘 음악이 흐르고, 그 음악에 의해 감정 또한 유지된다. 극중에서 그녀가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은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처럼 당연한 행위이다. 그래서 피아노를 연습했고, 이를 마스터하지 않으면 스타트라인에 설 수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이라는 테마곡이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소울뮤직(soul music)처럼 흐르고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아들에 대한 사랑을 자각하지 못했던 그녀의 내면에 ‘사랑의 테마’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그녀가 아들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시점에 이 곡이 흘러나옴으로써 관객에게 또 다른 치유의 느낌을 전해줄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홍상현:

적확한 통찰이다. 사치는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나 그녀의 테마는 “사랑의 기쁨”이다. 사랑을 몰랐고, 그래서 아들과 제대로 이별하지도 못했는데. 피아노 연주 신도 이를 묘사하는 연장선상에 놓여있지 않나.

요시다 요:

그렇다. 원래 처음 바에서 "사랑의 기쁨”을 연주하고, 다음으로 “아이 갓 리듬(I Got Rhythm)”,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편곡된 “사랑의 기쁨”을 연주하게 되어있었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운 이래 30년 만의 연주라서 초심자의 기분으로 연습했는데 연주를 거듭하면서 몇 번이나 사치의 감정을 느꼈다.

1997년 연극배우로 연기 인생을 시작한 요시다 요는 생물학적 연령이나 경력에 대한 언급을 삼간다. 일을 통해 만난 상대에게 부담감을 주기 않기 위해서다. 사진: (주)디오시네마 제공

홍상현:

등장인물이 거의 미국 현지 캐스트였다. 서로의 경험치는 물론이거니와 언어와 문화까지 다른 상황에서 정서적 교감에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텐데.

요시다 요: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가 다르다 하더라도 하나의 작품이라는 목표를 지향한다는 정신적 유대가 있었다. 또한 상대방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끈이 보다 견고했다.

덧붙여 소개하고 싶은 게 있다. 제 아무리 촬영장 분위기가 고조되어도 시간이 되면 현지에서 조합이 정해놓은 바에 따라 철저하게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몇 번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제때에 식사를 하고, 제대로 쉬는 것이 일을 잘 해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임을 깨닫고 공감했던 일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홍상현:

그밖에 특기할 만한 점이, 미국 현지 캐스트가 모두 신인, 혹은 비전문가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특히 아들의 죽음을 전하는 경찰관 역의 사이 칼라마 같은 경우, 모건 프리먼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의 표정연기가 압권이다.

요시다 요:

하와이 캐스트 가운데 실제로 극중 배역과 동일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

예컨대 극의 초반부에서 사치가 만나는 사고 유가족 지원 단체 담당자도 현역 종사자이다. 말씀하신 경찰관 역의 연기자는 평소 현지에서 아이들에게 카누를 가르치는데, 후에 가르친 아이들 중 누군가가 천재지변으로 목숨을 잃으면 극중에서 사치에게 건넨 것과 동일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고 들었다. (“아드님은 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가신 겁니다. 그 누구의 분노나 증오 때문도 아니랍니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정성 있는 그들 자신의 실제적 언어였던 거다. 공연(共演) 전부터 그들에 대한 사전정보를 숙지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커리어와 무관하게 실제상황 속에 서처럼 연기할 수 있었다.

 

홍상현:

말 그대로 “진실의 힘”. 그래서인가 <하나레이 베이>를 보면 픽션의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사치라는 사람의 일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욱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화제를 바꿔서, <하나레이 베이>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당신이 “한쪽 다리를 잃은 일본인 서퍼”를 찾아 섬을 헤매는 시퀀스다. “사치”가 슬픔의 구체적인 실체와 마주하는 계기이자, 작품의 감정이 가장 고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요시다 요:

다소 모순적이지만 어떻게 ‘사치를 연기’하지 않고 ‘사치 그 자체로 작품 속에 존재’할 것인지가 가장 큰 과제였기에, 배우로서의 다른 계획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하와이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일주일간의 도쿄 촬영을 마친 상황이라 더더욱 그랬고. 감독과 서로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가운데 작품의 심층에 파고드는 작업도 상당부분 진전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최대한 완벽에 가까운 한 컷을 건지기 위해 작게는 10번에서 많게는 20번의 테이크가 반복되었다.

 

홍상현:

별다른 코멘트 없이 테이크를 반복하는 마츠나가 감독의 스타일에 대해 들었을 때, <오아시스> 촬영 당시 이창동 감독의 연출스타일에 대한 설경구의 회고가 떠올랐다. 영향을 받은 건가?

요시다 요:

그렇다. 이창동 감독은 마츠나가 감독이 온 마음을 다해 존경하는 분이라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웃음)

테이크가 거듭되는 과정에서 여유가 생기면 배우가 불필요한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반복이 계속되면 이번에는 ‘뭐가 다른지 그 차이를 말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가면 다른 생각을 일체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어떻게든 힌트를 찾아내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결국 마츠나가 감독은 제 안의 잡념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수없이 테이크를 반복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눈앞에 놓여있는 것들에 반응하는 순수한 감정 상태를 유지했다. 원작에서 사치는 하와이의 자연과 거기서 마주친 이들의 말 등을 받아들이면서 변화해간다. 저 역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순수하게 반응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긴장시켰다.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고, 뜨거운 해변의 모래를 딛으면서.

 

홍상현:

아쉬운 점이 있을 때는 등 뒤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마츠나가 감독의 “하아...” 하는 한숨도 들으면서? (웃음)

요시다 요:

(웃음) 그는 참으로 엄격한 감독이다. 그런 그가 크랭크인 첫날, 제게 “저는 요시다 씨의 안에 반드시 사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은 제게 큰 힘이 되었고, 그에 대한 신뢰를 형성했다. 그렇듯 마츠나가 감독이 사치라는 캐릭터와 요시다 요라는 연기자를 조금이라도 빨리 조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실감했기에 제 아무리 엄격한 면이 있어도 반드시 그와 함께 영화를 완성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요시다 요가 “배우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일깨워준 보석 같은 작품”이라고 회고한 <하나레이 베이>는 오는 6월 6일 개봉한다.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영화 최고의 연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포스터: (주)디오시네마 제공

홍상현:

시사회에서“이 작품을 끝으로 배우를 그만둘까 했다”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필사적인 느낌이 전해져오더라. 그밖에 “아직 제 영혼은 이 작품의 세계 안에 있다”던 말도 인상적이었는데, 지금은 괜찮은가?

요시다 요:

물론 괜찮다. (웃음)

다만, <하나레이 베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왠지 아직도 제 마음이 사라져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객관화가 되지 않는다고 할까. 촬영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파온다. 무덤덤하게 회고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영혼을 불어넣어 작업했다는 반증일 뿐더러, 여전히 사치가 내 안에 있는 까닭에 저도 모르게 그녀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이는 부정적인 트라우마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배우로서 대단히 기쁘고 행복한 일이겠지, 그만큼 빠져들 수 있는 역을 만났다는 이야기니까.

그래도 이제는 사치라는 캐릭터, 그리고 <하나레이 베이>라는 작품을 넘어서야한다. 이것이 제 맥스(max)가 되면 안 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제게 있어 보배인 동시에 넘어서야할 질곡이다. 다음에도 마츠나가 감독과 함께 작품을 해보고 싶지만 서로 이 작품에서 보다 성장한 상태에서 재회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나레이 베이>는, ‘어떻게 보아주시면 좋겠다’고 규정짓고 싶지 않은 작품입니다.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가슴으로 느껴주셨으면 해요.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가족을 잃는 순간과 마주하고, 끝내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 이 영화를 한 번 쯤 떠올려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주인공 사치에게도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듯이.

감사하게도 영화가 6월에 한국에서 개봉한다고 들었습니다. 가급적이면 오래 극장에서 상영되면 좋겠네요. 시간을 두어 곱씹을 수 있고, 접할 때마다 볼거리와 느낌이 달라지는 작품이니까요. 부디 하와이의 자연에 몸을 맡기고 사치의 동화를 경험하는 가운데, 쉬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껴보셨으면 합니다.”

전주국제영화제 당시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에서. <하나레이 베이> 촬영 5개월 전 어머니를 떠나보낸 그가 슬픔의 지평을 넘어, 좀 더 오래 사람들 앞에 서있어 주기를. 2005년 1월 신주쿠 시어터 몰리에르 <종일 피어오르는 연기>의 무대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는 필자의 바람이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한국 관객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도 절절한 진심이 뭍어 나왔다. 신상에 대한 화제가 아니라 오직 연기로써 인정받고 싶어 하는 소신 때문에 당시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후에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하며 애도를 표한 것은 마츠나가 감독이다) 그는 <하나레이 베이> 촬영 5개월 전 어머니와 이별했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밝은 성격에, 개성이 강한 딸과 티격태격하는 일도 많았지만 배우가 되겠다며 고향인 큐슈를 떠나 고속버스로 15시간 만에 도쿄에 도착한 딸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제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며 울음을 터뜨리던 따듯한 어머니였다. “소중한 가족을 잃는 순간”을 말하던 떨림 위로“어머니를 보내고 저도 따라가고 싶었다”던 고백이 겹쳐졌다.

그러나 딱히 위로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저 작별인사와 함께 나눈 악수에 최대한의 온기가 전해지기를 바랐을 뿐.

그리고 생각했다. 부디 그가 슬픔의 지평을 넘어, 좀 더 오래 사람들 앞에 서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2005년 1월 신주쿠 시어터 몰리에르, <종일 피어오르는 연기>의 무대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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