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3.1운동이 있다면, 영국엔 '피털루 학살'이 있었다
상태바
한국에 3.1운동이 있다면, 영국엔 '피털루 학살'이 있었다
  • 이영석
  • 승인 2019.05.20 1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국 정치운동에 지대한 영향 '200주년' 피털루 학살 다시 보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운동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 성찰하는 여러 움직임과 이벤트가 있었다. 100년, 200년을 기념하는 것은 그 기회에 과거의 기억을 다시 재현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올해 영국에서도 지배권력이 자행한 폭력을 다시 성찰하려는 분위기가 있다. 지금부터 200년 전인 1819년 8월 지배세력이 민중을 대상으로 폭력을 자행한 학살이 벌어졌다. 흔히 피털루 학살이라고 한다. 물론 3.1운동의 폭력 당사자는 식민지권력이고 피털루 학살의 경우는 국가다. 그렇더라도 지배권력이 민중을 직접 겨냥해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사례이고 또 이 사건이 그후 사회운동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가들의 연구는 심심치 않게 이어져 왔지만, 이 학살사건을 국가적 차원에서 재조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작년 영화감독 마이크 리(Mike Lee)가 200주년에 맞추어 피털루를 새롭게 조명한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아마 올해 여름 개봉을 목표로 제작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경위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조지 크루익생크(George Cruikshank)가 그린 피터루 학살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1819년 8월 16일 맨체스터 중심가의 聖베드로광장에서는 급진운동가 헨리 헌트(Henry Hunt)의 대중연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기존 선거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그 개혁을 요구하려 했다. 이 연설을 듣기 위해 맨체스터와 그 인근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국 근대사에서 이런 규모의 군중이 자발적으로 운집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대략 6만-8만 명이 좁은 광장을 가득 메웠다. 맨체스터와 인근 도시 치안판사들은 이 집회를 분쇄하기 위해 군 기병연대를 동원해 광장 주위를 포위했으며, 연설 시작 직후에 기마병들이 집회 장소에 난입해 폭력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15명이 사망하고 400-700여 명이 부상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당시 기마병 대부분이 이전 워털루(Waterloo)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빗대어 이 학살극을 피털루(Peterloo) 학살이라 불렀다.

피털루는 왜 일어났는가. 성베드로광장 집회에서 초점이 된 것은 선거권과 의회개혁 문제였다. 에드워드 톰슨(E. P. Thompson)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1963) 첫 부분은 ‘런던교신협회’라는 수공업자 모임 주도자들을 체포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모임은 지금으로 말하면 회원들이 읽은 책 독후감과 회원 소식을 담은 뉴스레터를 발행해 배포하는, 자기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독서회였다. 당시 수공업자와 장인의 문자 해독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이들의 정치의식 또한 고양되어 있었다. 수공업자들의 관심을 끈 서적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인간의 권리』(1792)였다. 이 책에서 페인은 군주정과 세습귀족제도를 사라져야 할 구악으로 비난한다. 이런 수사는 원초적 형태의 무정부주의처럼 보이나, 이 책 2부에서는 보통선거에 입각한 대의제(정확히는 입헌군주제) 정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톰슨이 묘사한 ‘런던교신협회’ 회원 체포는 프랑스혁명 급진화 이후 민중의 불온한 분위기를 우려한 정부의 철저한 탄압정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급진 정치개혁과 수공업자 및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은 이후 나폴레옹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하운동 차원으로만 존속했고 20여년 이상 긴 침묵의 시기가 이어졌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 사회는 불온한 분위기가 사회적 항의로 이어졌다. 오랜 탄압에 따른 반사효과이기도 했다. 러다이트운동, 노숙자 행진(Blanketeers March), 더비셔 펜트리치의 무장반란 음모, 의회개혁운동 등이 잇달아 전개되었다. 피털루사건 이전에도 맨체스터가 이들 사회적 항의의 진원지가 된 적이 있었다. 1817년 의회개혁을 청원하기 위해 각자 담요를 준비한 사람들이 맨체스터에서 런던 의사당까지 행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주된 출발지 가운데 하나가 聖베드로광장이었다. 이 광장에 모여든 5천 명의 참가자를 포함해 랭커셔 지역에서만 2만5000명이 행진에 참가했다. 이때도 치안판사들은 근위기병연대를 동원해 행진을 강제 해산시켰다.

聖베드로광장 집회에서 선거제도가 주된 의제가 된 까닭은 무엇인가. 명예혁명 이후 영국의 헌정은 제한선거로 구성된 하원과 귀족회의인 상원에 바탕을 둔 군주정이었다. 입헌군주제라 하더라도 하원의원 선거 투표권자는 1832년 초에도 성인남성의 7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연수입 40실링 이상의 지대수입 가치를 지닌 자산소유자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또 기존 선거구도 농촌 중심 위주로 획정했기 때문에 18세기 후반 산업화에 따른 인구이동의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농촌의 상당수 선거구는 주민이 감소해 사실상 선거구의 의미를 상실했고(부패선거구), 새로운 상공업 지역은 증가하는 인구에 관계없이 이전 기준에 따라 선거구를 획정했다. 예컨대 1810년대 인구 20만의 맨체스터에는 의석이 할당되지 않았다. 한 통계에 따르면, 잉글랜드-웨일스 선거구 의석 515석 가운데 절반은 인구가 미달하는 부패선거구 154곳에서 선출되었다. 더욱이 농촌 선거구 의석 대부분(351석)은 사실상 177개 귀족가문의 후견(patronage)으로 뽑았다.

1819년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랭커셔 직포공 사회에 급진 정치개혁운동이 고양되었다. 그해 1월 24일 聖베드로광장에 1만여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헨리 헌트의 연설을 경청했다. 당시 그들이 내건 구호는 “곡물법 폐지를 주도할 각료를 선발하라”였다. 그 집회는 지방 군기병대가 제지해 별다른 사고 없이 해산되었다. 같은 해 7월 맨체스터 치안판사들은 내무장관 헨리 에딩턴(Henry Addington)에게 대규모 시위가 임박했음을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경제불황기에 공업지대 노동자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규제도 없이 인쇄물이 자유롭게 유포됨으로써 이런 분위기가 더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소수 선동가들이 출판물과 연설로 노동자들을 부추긴다는 주장이었다. 치안판사 지휘 하의 인력만으로 집회를 막기가 어렵기 때문에 지원을 바란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A print published on 27 August 1819 depicting Hunt's arrest by the constables. 출처: 위키피디아

8월 집회는 맨체스터 일부 언론인들이 기획했다. 『맨체스터 옵저버(Manchester Observer)』지 편집인 조지프 존슨(Joseph Johnson)은 몇몇 동료와 ‘애국연맹’이라는 비밀단체를 결성하고 그 자신이 운영을 맡았다. 그는 비밀리에 헨리 헌트에게 편지를 보내 8월 2일 노동자집회 연설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편지 내용은 당시 암약중인 스파이들이 염탐해 치안판사와 내무부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대중집회 음모를 간파한 정부는 제15 기병연대를 맨체스터로 급파했다. 존슨을 비롯한 주최측은 좀 더 완벽한 준비를 하기 위해 집회를 9일로 연기했다. 맨체스터 치안판사들은 내무부로부터 주최측의 집회공고가 나자마자 불법집회임을 공포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국왕의 재가 없이 각료나 의원 선출을 추가로 요구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논리였다. 8월 3일 집회 공고가 나자 치안판사들은 의원 선출 요구 집회가 불법이라는 점을 공포했다. 존슨과 그의 동료들은 9일 집회를 16일로 연기하고 집회 주제를 변경했다. 선거법 개정과 의회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라는 논거를 제시했다. 이에 치안판사측은 집회 당일 제15 기병연대 병력 600명, 보병 수백 명, 야포 2문, 체셔 출신 의용대 400명, 비밀경찰요원 400여명을 동원해 경계를 폈다. 의용대는 대부분 이 지역 자영농, 소상점주, 상인, 술집주인 등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위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회를 분쇄하고 가능하다면 주모자들 모두를 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헨리 헌트의 연설이 시작된 직후 광장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기병들이 군중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며 쇄도했다. 노동운동가 새뮤얼 뱀퍼드(Samuel Bamford)는 젊은 시절 이 집회에 참가해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겪었다. 후일 자서전에서 그는 그 기억을 재현한다. 피털루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진귀한 기록이다.

 

“기마병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때 군중은 환호로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소리를 치면서 사람들의 머리 위로 군도를 휘둘렀고 고삐를 늦추는가 했더니 말에 박차를 가하고서는 곧장 돌진하여 사람들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수하라’고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고수하라.’ 그러자 우리 측에서 모두들 ‘고수하라’고 외쳤다. 기마대는 당황했다. 사람에다 말의 무게까지 합쳐서 빽빽히 밀집한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기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군도를 휘두르며 가로막고 있는 맨손의 사람들을 베며 길을 냈다. 그러나 토막난 팔과, 헤벌어진 두개골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럴 수가! 저럴 수가!’ 그리고는 ‘흩어져! 흩어져! 저들이 앞의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저들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라는 외침이 들렸고, 모두 ‘흩어져! 흩어져!’ 하고 울부짖었다. 군중이 주춤하고 물러서자 밀려오는 조수처럼 그들이 마구잡이로 몰려왔고 우왕좌왕하는 군중과 도망가지 못해 군도에 찔린 사람들의 비명, 탄원과 저주가 마치 머리 위에서 치는 천둥과 같은 소리를 냈다.“

 

10여분 후에 군중이 흩어진 직후의 광경을 뱀퍼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대학살이 시작된 지 10분만에 광장은 텅 비고 황막해졌다. 태양은 음울히 미동도 하지 않는 대기를 내리비치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창문에는 커튼과 가리개가 쳐져 있었다. 앞서 말했던 새 주택 가운데 한 집에서 한두 명의 신사가 때때로 밖을 내다보았고 그 집 문 가까이에 한 무리의 사람들[경관?]이 모여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부상자를 돕거나 시체를 운반했다. 연단에는 몇 개의 부러진 깃대가 꽂혀 있고 찢긴 깃발이 한두 개 축 늘어져 있었다. 한켠에는 가지각색의 모자, 숄, 구두, 그밖에 남녀 옷가지들이 짓밟히고 찢어지고 핏물이 묻은 채로 온 광장에 널려 있었다. 기마대는 이미 말에서 내려 어떤 이는 복장을 정돈하고 또 어떤 이는 군도를 닦아냈다. 그들이 난도질해 아무렇게나 덮어놓은 곳에는 아직도 일단의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이들 중 몇몇은 아직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어떤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광장에는 군마가 콧김을 내뿜거나 앞발을 차는 낮으막한 소리만 들리고 사위는 적막했다.”

 

이날의 학살로 사망자는 15명, 부상자는 400-700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구호작업을 벌였던 맨체스터 구빈위원회는 부상자 수를 420명으로 추산한다. ‘피털루 학살’이라는 표현은 『맨체스터 업저버』지 발행인 제임스 로(James Wroe)가 처음 썼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 학살의 경위를 간략하게 소개한 팸플릿을 간행해 전국에 유포시켰다. 실제로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던 귀환병사 존 리스(John Lees)는 그 무렵 올덤(Oldham)에서 직조공으로 일했는데 이 집회에 참가했다가 부상을 당했다. 그 후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하기에 이른다. 죽기 직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워털루에서 치고 박고 서로 싸웠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살인이었다.” 이 소식도 외부에 퍼져나가 한편으로는 공포를, 다른 한편으로 분노를 야기했다.

피털루 학살은 19세기 전반 영국 노동계급의 항의와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집회를 계획한 『맨체스터 옵저버』지의 편집인들은 모두 구속되었다. 기업가 존 테일러(John E. Taylor)는 당시 학살극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는데, 1821년 몇몇 기업가들 모임에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새로운 신문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을 창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신문[현재 제호는 ‘가디언’]은 오늘날에도 영국의 대표적인 진보계열 신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후 차티스트 운동기까지 급진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의제는 의회개혁과 선거권이었다. 모든 노동자집회에서 ‘피털루’는 지배층 억압의 유력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집회 피켓에 적힌 가장 흔한 구호는 “피털루 학살을 기억하라”였다.

한편, 학살 당시 시인 퍼시 셸리(Percy B. Shelly)는 이탈리아에 체류 중이었다. 학살 소식을 듣고 그는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혼돈의 가면극(The Masque of Anarchy)>이라는 시에 ‘맨체스터 학살에 덧붙여’라는 부제를 달아 한 급진계열 잡지에 보냈으나 언론 규제로 싣지 못했다. 이 시는 1832년 팸플릿으로 간행된다. 그 후 거의 모든 노동자 집회에서 셸리의 시가 낭독되곤 했다.

 

팔짱을 끼고 똑바로 응시하며,

두려워하지도 놀라지도 말며

살인을 자행하는 그들을 지켜보라

그들의 분노가 사라질 때까지.

 

그런 후에야 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처음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리니

그리하여 흐르던 피는

얼굴 빨개진 그들에게 소리치리라.

<혼돈의 가면극> 중

 

이번 여름에 개봉할 영화 <피털루>에서 어떤 시각에서 이 학살을 조명할지 궁금하다. 지금껏 알려진 바로는, 마이크 리 감독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상자 존 리스(John Lees) 시점을 적절하게 활용해 내러티브를 끌어나갔다고 한다.

이영석   steinhof@naver.com  최근글보기
서양사학자. 광주대 명예교수다. 저서로 『영국 제국의 초상』(2009), 『공장의 역사』(2012), 『지식인과 사회』(2014), 『역사가를 사로잡은 역사들』(2015), 『영국사 깊이 읽기』(2016), 『삶으로서의 역사』(2017) 『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2019)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